80. 잿빛 도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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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잿빛 도시 (3)
2023.07.22.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지하에 있던 후포 일행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얼어붙었다.
차고 축축한 공기에 섞인 악취를 따라왔는데 이런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몹시도 불길한 것들이 그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사람 팔뚝만 한,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반투명하고 길쭉한 알들.
반투명한 알껍데기에는 혈관 같은 것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안에는 기괴하게 생긴 것이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지하 통로로 뻗어 있던 관들은 중앙에 있는 기계의 꼭대기와 연결되어 있었고, 기계의 옆면에서 뻗어 나온 무수히 많은 가느다란 관들이 알과 하나하나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허서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옥엽이 앞으로 나아가 알껍데기 안을 자세히 관찰했다.
“괴물이네요.”
옥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굵은 관이 꿀렁, 움직였다.
무언가가 관을 타고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가 동시에 가느다란 관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알껍데기 안을 채운 액체가 붉게 물들었다.
안에 들어있는 괴물들이 꿈틀꿈틀 움직이자 붉었던 액체가 서서히 투명하게 변해갔다.
괴물이 피를 흡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환웅은 지하에서 괴물을 키우고 있고, 신시에서 흘리는 피는 괴물의 양분이 되었다.
인간과 범, 그 외 다양한 생물의 죽음을 먹고 자란 괴물들.
괴물에게서 퍼져나오는 공포와 악취는 수많은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허서가 알껍데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가락 끝이 닿기 전에 얼른 거두었다.
“환웅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내는 거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후포는 생각했다.
이것이 무엇이든, 어떻게 만들어냈든, 피와 죽음이 있어야만 탄생하는 것은 불길하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크르르르르르-
후포의 몸이 울리며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주군, 아직 저게 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옥엽이 말리려 했지만, 후포가 더 빨랐다.
그의 거대한 육체가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열 개의 손톱이 난무하며 근처에 있는 불길한 것들을 사정없이 베어냈다.
알껍데기는 성장한 괴물만큼 강하지 않아서 후포의 손짓 하나에 베어지고 깨졌다.
촤아아악-
안에 들어 있던 액체가 터져 나오자 허서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끈적거리는 액체와 함께 덜 자란 괴물이 미끄덩거리며 굴러떨어졌다.
아직 세상에 나올 준비가 되지 않은 괴물은 그래도 살겠다고 꿈틀거렸다.
콰직-!
옥엽이 작은 괴물을 발로 밟자, 덜 여문 육체가 완전히 바스라졌다.
마로가 후포의 뒤를 따라서 알을 깨뜨렸고 옥엽과 허서도 동참했다.
알이 깨지는 소리와 분무하는 액체가 풍기는 비린내, 그리고 괴물이 밟혀서 터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울 때.
이살 타워 꼭대기에 서 있던 환웅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가 내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
하루가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내서 범바위가 완전해지는 순간에, 착호는 강한 힘에 휘말려 허공으로 내던져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아니, ‘그’는 유영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뇌리에 똑똑히 새겨졌다.
평화로운 신시, 혼혈이기에 당한 차별, 노력 끝에 얻은 인정과 안정, 신시 밖에서 만난 작은 생물 눈송이와 어느 날부터 신시에 퍼지기 시작한 불길한 기운.
그리고 타배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영웅 설.
‘설?’
거기서 장면이 멈췄다.
‘그’는 설을 떠올렸다.
신시의 영웅이자 든든한 친구, 그리고 훌륭한 조언가였던 설.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
설은 신시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설이 신시에서 영웅 취급을 받게 된 걸까?
영웅은 난세에서 나오는데 평화로운 신시에 영웅이 나올 만한 사건이 있었나?
‘나는 언제부터 그와 친구였던 거지?’
‘그’는 설을 처음 만난 순간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음성은 기억했다.
-“이 모든 건 범이 벌인 짓이지요. 범들이 신시를 지배하기 위해 꾸민 게 틀림없어요.”
-“보세요. 이번에도 그가 만나주지 않았지요? 후포가 당신을 피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의 꿍꿍이를 알아낼까 봐서.”
-“검을 들어야 해요, 타배. 그러지 않으면 신시가 멸망할 거예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디서?
‘그’는 그 음성을 어디서 들었었는지 도통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다만 설의 음성을 떠올리는 순간, 아주 불길한 무언가가 뱃속에서 요동쳤다.
‘그’는 범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그래, 죽여야만 해.’
‘그’의 뇌는 멋대로 결심했다.
‘범들을 모두 죽여야 해.’
그리하여 척살검을 손에 쥐었다.
-“내가 이 검으로 범을 베겠습니다.”
‘그’를 우러러보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했다.
범을 멸하겠다고.
새까만 척살검이 햇빛을 받아서 더욱 까맣게 빛났다.
고개를 들자 검 끝에 맺힌 태양이 ‘그’의 눈동자를 아프게 찔렀다.
그 순간, ‘그’의 뇌를 지배하던 뭔가가 산산이 깨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범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미친 건가?’
후회는 늦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범을 죽이기 위해 모든 종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무기를 들고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범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는 후포를 좋아했고, 허서, 풍래와 친했으며 마로, 불티와는 함께 검 훈련을 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그’는 덧붙였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후포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의 명령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에 실망이 깃들었지만, 대부분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걸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래, 다시 한번 후포를 만나러 가보자. 후포는 마음 씀씀이가 깊으니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줄 거야.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같이 찾아볼 수 있겠지.’
설이 나타난 건, ‘그’가 신단수 근처를 지나갈 때였다.
설은 ‘그’를 보며 히죽 웃었고 ‘그’는 설이 영웅도, 친구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거대하고 불길한 무언가가 ‘그’의 뒤를 덮쳤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
착호가 ‘그’가 되어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 때, 유수의 눈에는 착호가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체구가 작고 마른 소년이 갑자기 “찾았다!”고 하더니 범바위가 되었고, 나머지 일행이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유수 오라버니!”
상황이 심상찮음을 깨달은 운로가 빽 외치며 달려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손님이란 말이야!”
“어…….”
유수는 이 상황이 너무 어리둥절해서 착호가 운로의 손님이 아니라는 부분도 지적하지 못했다.
“무슨 짓을 했어? 죽인 거야? 응?”
운로가 유수의 팔을 토닥토닥 내리치며 채근할 때였다.
“설…….”
석상처럼 굳어 있던 6명의 입에서 동시에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설.
유수도 설을 알고 있었다.
신시의 영웅 설. 지혜롭고 다정한 설. 곰족이 범족을 멸하려 할 때도 범족의 편에 서서 여러 조언을 해주었던 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 청년들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걸까?
설은 수천 년 전의 인물인데.
“너는 누구지?”
또다시 여섯 명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서로 다른 여섯 명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입술만 움직여 같은 말을 하는 모습이 섬뜩했다.
“그건 내가 아니야.”
“나는 여기에 있다.”
“멈춰. 싸우면 안 돼.”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입술만 움직이던 6명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오싹-
유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때, 6명이 갑자기 번쩍 눈을 뜨며 외쳤다.
“너구나, 눈송이!”
그 순간.
고요히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범바위가 쩌억, 굉음을 내며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범바위 안에 태양이라도 존재하는 듯, 균열 사이사이로 눈을 찌를 듯 매서운 빛이 쏟아져나왔다.
모든 것이 잿빛이라 햇빛조차 회색이었던 그림자의 세계에 강렬한 색채를 지닌 빛이 내리쬐었다.
나무에도, 집에도, 강에도, 흙에도, 작은 식물에도, 그리고 그림자의 세계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범들에게도, 빛은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쿠콰아아아아-
발아래가 흔들렸다.
유수는 운로와 금몽을 양팔로 한 명씩 끌어안았다.
운로와 금몽이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수는 이 세계의 끝이 왔음을 짐작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유수 혼자라면 결계의 틈을 비집고 나갈 수 있겠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는 무리였다.
진동이 점점 심해졌다.
집 안에 있던 범들이 우왕좌왕하며 밖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범바위의 빛은 점점 강해져만 가는데 눈앞은 캄캄하게만 느껴졌다.
수천 년 전에 곰족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막막해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가?’
그때 긴장해서 굳어 있는 유수의 어깨에 제하가 손을 얹었다.
고개를 돌린 유수는 제하의 차분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황금빛의 깊은 눈동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유수를 향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수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답답함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괜찮아.”
제하가 말했다.
부드럽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 세계의 종말이 아니야.”
빛이 유수의 눈을 찔렀다.
이 빛이 범바위에게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빛은 다른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시작이야.”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