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폐기물 재활용
미타성수를 사형에게 분리수거하기 전.
나는 우선 탁자 위에 놓인 비급 중에 표지에 고풍스러운 서체로 삼음진결이라고 쓰여 있는 서책을 꺼내 들었다.
공동파의 기본 내가기공은 양강기공인 소양심법과 음한기공인 삼음진결로 나뉜다.
공동파 무공의 근본 원리는 음양전도.
따라서 양의 무공과 음의 무공을 둘 다 배워야 음양전도를 통해 음기와 양기를 역전, 수승화강을 이루어 공동파 무공의 극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공동파에 남은 내가기공은 양강기공인 소양심법뿐이었는데, 오늘 음한기공인 삼음진결이 발견된 것이다.
아무튼 소양심법과 삼음진결이 극성에 이르면, 음양전도의 묘리를 담은 상승의 심법인 혼원일기공에 비로소 입문할 수 있게 되지만.
‘혼원일기공은 여기에 없지.’
아쉽게도 혼원일기공은 여기에 없었다.
뭐 나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혼원일기공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니까.
어쨌거나 사형에게 미타성수를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사형이 삼음진결의 구결을 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원래는 내가기공을 처음 배울 때는 전영이 그랬던 것처럼 구결을 가르쳐주면서 심법의 경로대로 진기도인을 해주는게 정석이기는 한데······.
‘내가? 남자 몸에 손을 대서 진기도인을 한다고?’
범재 위장은 둘째치고, 진기도인을 하려면 반드시 신체 접촉을 해야 했다.
허리 부근의 명문혈에 손을 얹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내가 절세미녀도 아니고 사내, 그것도 빌어먹을 사형의 몸에 자진해서 신체 접촉을 한다?
‘그럴 수는 없지.’
안 그래도 이미 사형에게 첫 포옹, 첫 키스마크를 포함해서 수많은 첫 순정(純情)이 시커먼 남자의 체취로 추악하게 더럽혀진 상황이었다.
아직도 아까 들판에서 겪었던 ‘그 키스마크 사건’을 떠올리면 정신 오염과 함께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의 순정을 사형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요즘 가끔 사형이 나를 보는 눈길을 보면 진정으로 남색(男色)이 아닌지 의심이 갈 때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사수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되도록 신체 접촉은 삼가야 했다.
사형과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파트너니까,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건 사양이었다.
전생에 만났던 환관 놈 중에는 남자라도 여자보다 예쁘면 오히려 더 좋다고, 여자보다 예쁜 남자를 선호하는, 고자가 되어버린 충격으로 정신줄마저 놓아버린 미친 변태 새끼들도 있었다.
심지어 남녀상열지사보다 비역질이 더 좋다고, 남자 애첩을 둔 미친 남색가 환관 놈들도 많았다.
‘변태 고자 내시 새끼들 같으니······.’
하지만 나는 그런 변태가 아니었다. 환관 시절에도 수없이 주변에서 권하던 남색(男色)의 수렁에서도 꿋꿋하게 정상적인 욕망과 취향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은 나다.
이제 다시 양물을 되찾았는데, 그쪽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러니 진기도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형은 무공에 대해서는 천재 중의 천재, 천무지체의 소유자니까 이런 기초 내가기공 따위는 한 번 보면 구결을 전부 외울 것이다.
“사형. 미타성수를 복용하기 전에 먼저 이 비급을 살피고 구결을 숙지하십시오. 실전됐던 본 파의 기초 음한기공인 삼음진결입니다.”
나는 사형에게 비급을 건넸다.
내 말에 사형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삼음진결의 비급을 넘겼다.
삼음진결은 기초공이기는 해도 음한기공의 성질을 지닌 내가기공. 미타성수를 복용할 때는 양강기공인 소양심법이 아닌 삼음진결을 운용해야 했다.
팔랑팔랑.
300년 넘게 방치되어있는 것 치고는 상태가 멀쩡하기 짝이 없는 비급서가 넘어갔다.
2분쯤 지났을까.
비급서를 한 번 훑어본 사형이 책을 탁하고 덮었다.
“삼음진결의 구절, 전부 외웠어. 사제.”
사형이 내게 말했다.
그걸 그렇게 대충 본 것만으로 외웠다고?
역시 천무지체는 천무지체인 모양.
“좋습니다. 이제 복용하시지요.”
“응.”
사형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찰랑이는 미타성수가 담긴 컵을 받아들었다.
쭈욱.
사형이 깔끔하게 미타성수를 원샷했다.
그래. 폐기물 재활용은 이렇게 하는 거지.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취하는 사형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
유진휘는 미타성수를 마시자마자 전신의 기혈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미타성수 안에 천년의 세월 동안 농축된 음한지기가 풀려나와 그녀의 혈도를 거칠게 헤집었다.
아팠다.
체내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흐윽!’
유진휘는 새파랗게 얼어 붙어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비명을 삼켰다.
‘사제가 양보해준 영약이야······. 반드시······. 임독양맥을 타통해 벌모세수를 이루고 전부 내력으로 전환해야만 해······!’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동상의 고통 속에서 유진휘는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의식을 유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제가 직접 양보해준 영약이었다.
그러니 영약 복용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유진휘의 머릿속에 사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장한 각오로 공동파에는 어중간한 고수 여럿보다는 사문의 이름을 천하에 떨칠 단 한 명의 일대고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제의 목소리가 유진휘의 귓가에 맴돌았다.
미타성수.
복용하는 것만으로 공력이 크게 증대되고, 벌모세수를 이룰 수 있다는 기물(奇物).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영약이었다.
실제로 한 명만 복용 가능한 절세의 영약을 앞에 두고 사형제지간이나 사제지간에 영약을 독점하기 위해 칼부림이 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비단 사파, 마교가 아닌 명문정파의 인물조차 영약을 앞에 두고 평정심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 누구나 미타성수 같은 천고의 영약을 앞에 둔다면 욕망으로 눈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제는 그런 누구나 탐낼 만한 절세의 영약을 그녀 본인에게 선뜻 양보해주었다.
‘사제의 기회를 내가 가져온 만큼······. 나는 반드시 미타성수의 정기를 온전히 흡수해야해.’
유진휘는 아직도 기억했다.
사제가 미타성수를 발견하고 흘리던 기쁨의 눈물을.
그리고 그녀에게 절세의 영약을 양보하면서도, 미련으로 인해 파르르 떨리던 손을 기억했다.
그녀가 몇 번이고 사제에게 양보했는데도 고개를 저으며 사형인 본인이 영약을 취하는 쪽이 사문의 재건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던 사제의 말을 기억했다.
사문의 재건과 사형인 그녀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본인의 안위는 필요없다는 사제의 말을 기억했다.
유진휘는 사제가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실은 여린 속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타성수를 건넬 때까지, 사제는 번뇌하고 또 번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제는 스스로의 욕망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절제하고, 자신에게 영약을 건넸다.
자신이 양보해도, 나눠 먹자고 해도 재차 그녀 본인에게 영약을 건네던 사제의 모습을 유진휘는 기억했다.
욕망에 초탈한 것보다는, 욕망을 절제하는 쪽이 더 힘들다.
하지만 사제는 욕망을 절제한 것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영약 대신 마음만 받겠다고 했었지······.’
마음만 받겠다.
그 말이 유진휘의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 이 순간, 유진휘는 사제에게 고마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두근.
얼어붙은 체내 속에서 유진휘의 심장이 뛰었다.
유진휘는 사제의 고운 마음씨와 그의 말을 생각하면서 극음지기로 인해 얼어 붙어가는 혈도에 내공을 삼음진결의 구결을 따라 운용했다.
우웅.
그녀의 단전에서 미약한 진동과 함께 솟아오른 내기가 기혈을 얼리면서 질주하는 미타성수의 정기와 마주했다.
유진휘는 미타성수의 극음지기를 삼음진결의 묘리에 따라 운용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으읏?!’
아무리 천고의 기재이자 천무지체의 소유자인 유진휘였지만, 내공의 절대량이 미타성수의 정기에 비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극음지기의 통제가 실패하자, 고삐 풀린 음한기기가 유진휘의 기혈 안에서 마구 날뛰었다.
온몸을 얼리는 극한의 한기 속에서 유진휘가 당황한 그때.
“사형.”
그녀의 귓가에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음진결을 외우면서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혈(穴)을 통해 음한지기를 인도하십시오.”
그녀의 귓가에 사제가 부르는 혈자리가 들려왔다.
영약 복용 부작용으로 폐인이 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갑작스러운 사제의 조언이었지만, 유진휘는 사제를 믿었다.
“인중혈, 전중혈, 음교혈, 회음혈······.”
절세의 영약 앞에서도 욕망을 절제하고 그녀에게 양보한 사제의 선의를 믿었다.
사문의 재건과 자신의 안녕을 바란다는 사제의 진심을 믿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불만인 점이 있었다.
‘사제 본인의 행복도 조금 바랐으면 좋겠어.’
사제는 언제나 이타적이었다.
그는 사부를 위해, 사형인 그녀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고 절세의 영약도 서슴없이 내주었다.
그녀보다 무재와 오성이 부족한 둔재인데도, 사제는 그녀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지도, 열등감을 품고 그녀를 적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가져간 것이라고는 뱀탕과 영약이기는 하지만 미타성수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홍양태뿐이었다.
스스로의 약한 마음을 어른스러운 척으로 가리는 사제였기에 더더욱 유진휘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러니 만약 그녀가 사제의 조언을 통해 벌모세수를 이룬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사제를 위하리라.
은혜를 입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사제였다.
본인마저 외면한 그를 위할 사람은 이 세상에는 오직 사형인 그녀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진휘는 사제가 불러준 혈도 순서대로 음한지기를 삼음진결의 구결에 따라 인도했다.
음한지기가 인중에서부터 가슴 중앙인 전중혈, 가슴과 음부 사이의 음교혈, 엉덩이 바로 위의 회음혈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차례대로 돌기 시작했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날뛰는 음한지기가 점점 삼음진결의 통제 하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말을 따라!’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유진휘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동사(凍死)에 버금가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음한지기를 통제했다.
저 먼 북해(北海)의 눈보라와 맞먹는 음한지기가 혈도를 마구 할퀴어댔지만, 유진휘는 고통을 인내했다.
조금씩, 조금씩 고통과 한기가 잦아들면서 음한지기의 고삐를 잡았다.
유진휘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사제는 틀리지 않았다.
사제 덕분에 폐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은혜는 평생을 걸쳐서 갚아도 모자라다.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한 그때.
쿵!
거센 격류가 꽉 막힌 벽과 마주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쌓인 탁기로 막힌 경맥인 임맥이었다.
“그대로 임맥을 뚫으십시오.”
이번에도 사제의 조언을 따라 유진휘는 음한지기를 임맥에 쌓인 탁기에 계속 부딪혔다.
쿵! 쿠웅!
탁기의 벽에 균열이 가면서 오는 고통이 유진휘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고통을 감내했다. 그렇게 그녀가 계속 끈질기게 음한지기를 임맥에 부딪힌 그때.
쿠웅!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부좌 튼 몸이 들썩였다.
그와 함께 균열이 갔던 탁기의 벽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뻥 뚫린 임맥으로 음한지기가 도도하면서도 거세게 흘렀다.
드디어 임맥을 타통한 것이다.
“임맥을 타통한 음한지기를 백회혈으로 보내십시오. 이제 독맥을 타통할 차례입니다.”
유진휘는 이번에도 사제의 말을 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삼음진결의 통제에 따르는 음한지기를 몰아 이번에는 독맥을 가로막는 탁기의 벽에 부딪혔다.
쿵! 쿠웅!
독맥의 저항은 더 거셌다.
주륵.
유진휘의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그녀는 몸을 얼리는 음한지기의 고통, 경맥을 찢기는 듯한 고통을 소리 없이 참으면서 계속해서 집요하게 독맥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쿠웅!
독맥을 가로막는 탁기가 무너지면서 그녀의 몸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의식이 새하얗게,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들썩인 것은 자신의 몸일까, 아니면 세상이었을까.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유진휘는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때려 부순 음한지기는 쉼 없이 그녀의 체내를 돌았다.
생사현관이 뚫린 몸.
미래의 검성 유진휘로서의 기틀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
두 번에 걸쳐서 몸을 들썩이던 사형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했다.
이 정도야 진맥을 안 해봐도 안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것이다.
내 시야에 사형의 몸에서 피어오른 한기 때문에 주변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통을 참는 표정이었던 사형의 얼굴은 이제 편안하게 변해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행공을 하는 모습.
그와 함께 사형의 몸에서 검고 찐득한 타르 같은 물질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면서 밀려난, 그의 몸 안에 쌓인 탁기가 체외로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벌모세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운기행공이 끝나면 전생보다 더 많은 양의 정기를 내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어쩌면 임독양맥을 타통하고도 일 갑자에 버금가는 내공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이게 다 현경의 경지에 이른 음한기공의 전문가인 내가 사형의 운기 경로를 말로 인도해준 덕분이다.
빌어먹을.
하여간 남자 주제에 손이 많이 가서 탈이다.
‘으 냄새.’
사형의 몸에서 배출된 탁기 덩어리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에 예민한 후각이 반응했다.
벌모세수는 다 좋은데 저 빌어먹을 악취가 문제다.
무슨 정화조 같은 냄새가 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나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을 감고 코를 부여잡아 콧구멍을 틀어막은 채로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행공을 하는 사형의 곁을 지나서 동굴 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검붉은 이끼, 양의 성질을 띈 영약인 홍양태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양기가 느껴지는 홍양태를 조심스럽게 뜯은 뒤에 그대로 입 안으로 넣고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제 내 정력을 증진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