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복마검법
사형이 나를 안내한 곳은 목욕탕 입구와 반대편에 뚫린 통로였다.
야명주를 잔뜩 박아 어둡지 않은 통로를 지나서 사형과 도착한 장소는 창고였다.
커다란 항아리가 가득 들어찬 창고.
한쪽 벽면에는 목욕탕만큼은 아니지만, 물이 졸졸졸 흘러내려 작은 냇가를 이루고 있었다.
항아리 안의 내용물은 확인해보니 벽곡단이었다.
나는 벽곡단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상태는 멀쩡하군.’
안 그래도 밤새 산세가 험한 공동산을 이리저리 헤맨 상황이라 기력이 많이 소진된 상황.
아까 영약을 복용해서 어느 정도 활력을 보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
나는 벽곡단 한 알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텁텁한 곡물 맛이 났다.
벽곡단은 맛보다는 300년을 가도 멀쩡한, 유통 혁명이라고 할 만한 보존 성능이 핵심이었다.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벽 아래 기연 비동에서 제조일시부터 100년이 훨씬 넘어가는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우고도 멀쩡한 클리셰가 거짓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100% 진실이었다.
300년을 버텨도 멀쩡한 보존성에 한 알에 한 끼 식사와 맞먹는 칼로리까지.
그야말로 중세 무림의 신비가 집약된 비상식량계의 혁명이 벽곡단인 것이다.
그래서 전대 고수가 은거하려고 만든 비동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벽곡단을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여기가 그런 장소인 모양이었다.
한쪽 벽면에 흐르는 물줄기는 식수용인 것 같고.
“그 검흔은 어디 있습니까?”
벽곡단으로 공복 상태가 해결되고 뇌에 영양소가 공급되자 어느 정도 진정된 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나는 복마검법의 구결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복마검법뿐만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유명 문파의 진산절기들은 황궁무고 깊숙한 곳에 전부 비치되어 있었다.
관무불가침이 유지되면서도 황궁이 강호 무림보다 힘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이유.
그건 황궁에서는 이미 유명 문파의 진산절기를 입수, 무학을 연구하여 각 문파에 맞는 파해법을 전부 개발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진산절기 전부를 보유하고 있는 건 아니고, 각 문파를 대표하는 절기 하나 정도만 보관하고 있는 정도다.
황궁무고에 있는 공동파 무공은 복마검법뿐이고.
아무튼 나는 황궁무고에 있는 모든 무공의 구결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구결을 외우는 거랑, 그걸 내가 사형이나 타인에게 알려주는 거랑은 다른 문제란 말이지.’
복마검법의 구결을 알고 있지만, 그걸 다짜고짜 사형이나 사부에게 그냥 말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전생에 사형이 복마검법을 입수한 광성단혈로 와서 자연스럽게 입수하려다가 비급이 없어서 당황한 거다.
아무튼 사형이 검흔이라는 말을 안 했다면, 공동산에 널린 동굴 중 하나를 점찍어서 몰래 만든 비급을 넣어 기연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할 뻔했다.
아니라서 다행이다.
“여기 있어. 사제.”
사형의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돌로 된 벽면에 어지럽게 뒤엉킨 채로 그려진 선이 있었다.
딱 봐도 검으로 그은 것 같은 흔적, 그러니까 검흔이었다.
“이 검흔이 혼원검제 선조님께서 후인(後人)들한테 남긴 복마검법의 도해(圖解)인 것 같아.”
사형이 살짝 진지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나는 사형의 말에 벽면을 향해 다가가 어지럽게 새겨진 검흔을 살짝 쓰다듬었다.
언뜻 보기에는 어지럽고 불규칙하게 새겨진 것 같은 선들.
하지만 전생에는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으며, 이번 생에서는 공동파의 무학을 수행 중인 나였기에 벽면에 새겨진 검흔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건 복마검법의 검흔이다. 혼원검제가 직접 새긴.’
복마검법의 기본 초식과 파생 변화가 벽면에 검흔으로 새겨져 있었다.
힘 낭비 하나 없이 무섭도록 정확하고 매끈하게 파인 검흔의 모습은 이 벽에 검흔을 새긴 장본인이 지고한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복마검법을 이 정도 퀄리티로 석벽에 상세하게 새길 정도의 고수라면 혼원검제밖에 없다.
문제는.
‘이거 후인들한테 전수하려고 남긴 검흔이 아닌데?’
사형의 말과는 달리 석벽에 새겨진 검흔은 후인들에게 복마검법을 친절히 알려주는 도해(圖解)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용도에 가까웠다.
나는 조용히 석벽에 손을 대고 내력을 일으켜 기감을 조심스럽게 투사하며 눈을 감았다.
소양심법의 구결대로 내력을 전부 운용해서 온 정신을 기감에 집중하자, 두꺼운 석벽 너머에 있는 빈공간이 감지되었다.
‘예상대로군. 역시 이 검흔은 암호였어.’
탐지를 끝낸 나는 내력을 거뒀다.
흔한 기연 패턴이었다.
명문대파 소속 전대 고수가 비동에 안배를 남긴다고 치자.
당연히 보통 그런 전대 고수라면 문파에 소속감이 강할 테고, 후인이 안배를 얻더라도 되도록 본인과 같은 문파의 문도가 얻기를 바랄 것이다.
진산절기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일이다.
이에 따라 안배 보안 용도로 등장한 장치가 이 석벽의 검흔처럼, 문파의 비전절학을 펼쳐야만 열 수 있는 특수한 기관장치였다.
문파의 비전절학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라면 당연히 문도일 테니, 전대 고수 역시 안심하고 안배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 검흔도 마찬가지야. 복마검법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가 아니라면 문을 못 열게 하는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눈앞의 검흔이 암호라는 거였다.
아마 극성에 이른 복마검법을 검흔을 따라 펼쳐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일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혼원검제가 남긴 진짜 안배는 이 석벽 너머에 있는 거로군.’
결론을 도출해낸 나는 손을 살짝 떨었다.
전생의 유진휘가 혼원비동에서 먹은 영약은 미타성수, 그가 입수한 비급서는 삼음진결(三陰眞訣), 칠살검(七殺劍), 현천검(玄天劍), 행운유수(行雲流水), 복마대력수(伏魔大力手), 건양지(乾陽指), 곤음지(坤陰指)까지 총 일곱 개였을 것이다.
미타성수도 물론 귀한 물건이고, 비급서에 적힌 일곱 무공도 나름대로 쓸 만한, 일류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원검제는 300년 전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에 준동한 혈교의 진군을 막아내고 강호 무림을 구원한 영웅이자 천하제일인이며 생사경의 경지에 닿은 절대고수였다.
내가 살았던 현대 지구의 역사와는 달리 무공이 실존하는 이곳 이세계 중세 무림의 명나라는 원래 역사보다 더 오랜 기간인 300년 넘게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황궁무공과 진법을 펼치는 명나라의 황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원래 역사에서 명나라 망국(亡國)의 원인이었던 대규모 농민 반란은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황군과의 관무불가침에 대가로 비상시에 협력하는 강호 무림의 존재로 농민 반란은 소규모 봉기 단계에서 모조리 진압되었다.
무공을 모르거나, 삼류 무공만 가진 무지렁이 농민들과 상승절학을 보유하지 못한 여진족 군대로는 무공을 익힌 관군과 그에 협력하는 무림 고수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원래 역사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이세계 중세 무림에서는 숭정지치(崇禎之治)로 칭송받는 명의 중흥군주가 되었고, 명나라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절대고수가 비동에 남긴 유산이 고작 일류 무공 일곱 개에 미타성수와 홍양태뿐이다?
‘말도 안 되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즉, 혼원검제가 남긴 저것들은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했다.
광성단혈 근처에 별다른 기관진식이 없던 이유도, 어디까지나 진짜는 따로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진짜 안배가 있는 곳은 아마도 이 석벽 너머.
하지만 전생의 유진휘는 진짜 안배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하다. 유진휘가 아무리 천재라지만 광성단혈을 발견했을 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열다섯의 유진휘는 기관진식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다.
아니, 오히려 이 검흔에서 복마검법을 얻어간 것만으로도 유진휘의 천재성은 이미 입증되었다.
‘보안용으로 만든 암호 검흔에서 복마검법의 구결을 역산(逆算)하다니? 이게 천재가 아니면 누가 천재냐고.’
석벽에 새겨진 검흔은 도해가 아니다.
애초에 암호 용도니 오히려 불친절하고, 외부인이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어졌다.
나도 현경의 심득이 없고 복마검법의 구결을 몰랐다면 검흔이 복마검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진휘는 벽에 새겨진 암호 용도의 검흔에서 도리어 그동안 습득한 공동파의 무학을 총동원해 복마검법의 구결을 역산해낸 것이다.
복마검법이 어디 저잣거리 삼류 무공이나, 혼원검제가 미끼용으로 던져놓은 일류 무공도 아니고 공동파를 대표하는 상승절학인데 그걸 저런 검흔에서 역산한다고?
그야말로 미친 재능이다. 괜히 대종사의 자질이 아니다.
전생에도 첩보와 기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거랑 옆에서 그 재능을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황궁무고에 찾아와서 굳이 복마검법의 구결을 확인한 것도 그것 때문이겠군.’
어느 시점에서 유진휘는 이 석벽의 비밀을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장성한 뒤에 혼원비동에 다시 들어가려 시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었다.
겉으로는 폐관수련 목적이었지만, 실은 기관장치 너머에 있을 진짜 안배를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비동이 무너져서 결국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전생에서 유진휘가 황궁무고에 입장해서 복마검법의 비급서를 확인한 것도, 본인이 역산한 복마검법의 구결이 진짜 복마검법의 구결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일 테고.
천무지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미친 오성(悟性)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도해가 너무 난해하더라고. 역시 본 파를 대표하는 진산절학이라 그런 걸까? 조금만 더 보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옆에서 유진휘가 중얼거렸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니 어이가 없어서 턱이 벌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진짜 기연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사형, 혼자서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독장난명(獨掌難鳴)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제(愚弟)는 비록 사형처럼 일대기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 역시 한 명의 무인이자 사형의 사제입니다. 그러니 저도 복마검법의 도해(圖解)를 해독하는 사형한테 미력한 도움이나마 보탤 수 있게 해주십시오.”
복마검법의 구결을 역산하는 사형에게 적당히 힌트를 줘서 빠르게 복마검법 복원을 마무리 짓고 저 문을 열어야 했다.
‘흐흐흐······. 혼원검제의 안배를 두고 물러설 수는 없지.’
혼원검제는 공동파 역대 최강의 무인.
그가 저런 복잡한 장치까지 해가면서 남긴 안배는 무공일 가능성이 99.9999%였다.
그리고 공동파 무학의 기저에 깔린 근본 원리는 음양전도.
음양전도는 수승화강을 이루는 수단이며, 수승화강을 이루면 궁극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공동파 무공의 지향점은 궁극의 생명인 것이다.
그런 공동파의 무학으로 생사경에 닿은 혼원검제가 남긴 무학이라면 당연히 공동파 무공의 정점에 올라선 최상승의 절학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혼원검제가 남긴 무학은 궁극의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는 신공(神功)일 가능성이 높았다.
‘궁극의 생명, 생명력이 넘친다는 건 곧 정력이 넘친다는 말······. 따라서 혼원검제가 남긴 신공이야말로 궁극의 정력에 닿을 수 있는 광세절학일 것이야.’
흐흐흐.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았다.
전대 천하제일인의 무공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궁극의 생명력, 아니 정력이 중요하다.
무려 생사경의 경지에 달한, 궁극의 생명을 이룬 무인이 직접 남긴, 궁극의 정력을 보장하는 신공절학을 눈앞에서 놓친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
그러니 저 문을 열어야 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생사경의 심득에서 비롯된 궁극의 정력을 얻어야 했다.
소림사, 화산파, 무당파 같은 다른 구파일방 무학의 근본 원리에는 생명력이 없다.
따라서 그들의 무공은 정력에 쓸모가 없다. 그래서 필요도 없다.
태극? 매화? 그런 걸 탐구해서 대체 어디에 써먹는다는 말인가?
심지어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는 불가(佛家)이기 때문에, 소림칠십이종절예는 욕망을 절제해야 화후가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욕망을,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절제하라니! 그야말로 끔찍한 철학을 지닌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공동파는 아니다.
역시 생명력을 추구하는 공동파 무학에 입문한 건 좋은 결정이었다.
아무튼 어차피 복마검법의 구결은 알고 있으니, 들키지 않는 선에서 구결 복원을 앞당기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내 말을 들은 사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배시시 웃으면서 내게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도와주는 거야? 고마워 사제!”
사형의 말을 들은 나는 웃었다.
이제, 빨리 복마검법을 복원하고 벽 너머에 있을 궁극의 정력을 가지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