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검을 잘 쓰는 남자
사형은 과연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는 혼원검제가 새긴 검흔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복마검법의 형을 역산해서 재현해냈다.
“사형, 거기서는 검을 횡으로 휘두르는 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맞아. 이쪽이 좀 더 검세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거 같아.”
때때로 형(形)이 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자세를 교정해줬다.
물론 신체 접촉 없이 말로만.
검법은 수법(手法)이나 지법(指法)처럼 운우지락(雲雨之樂)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무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만병지왕이라는 말처럼, 대다수 무림인의 보편적인 무기는 검이었다.
특히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정파 무림인들은 높은 확률로 검을 사용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준 높은 검법을 배우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보다 하수(下手)인 절세미녀들에게 검법을 지도해준다는 명목으로 스킨십을 시도할 수 있다.
뒤에서 백허그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허리와 등을 감싸면서, 미녀의 가늘면서도 새하얀 팔뚝을 만지면서 그녀들의 검세를 교정해주는 것이다.
‘소저한테는 환검보다 쾌검이 더 어울리오.’
이런 멋있는 대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이 공자는 검에 조예가 깊군요! 배울 점이 많아요! 앞으로도 지도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머! 이 공자의 몸은 정말로 탄탄하군요!’
아름다운 소저들과의 은근한 스킨십!
그 과정에서 내 완벽한 육체미를 느낀 소저들의 은근한 어필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잘 쓰면 당연히 미녀와의 비무도 많이 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비전절학 중에는 흔들다리 효과라는 것이 있다.
위험한 흔들다리에서 남녀가 만났을 때, 흔들다리의 위기감 때문에 두근거리는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효과인데 이는 비무에서도 적용됐다.
흔히 말하는 대련에서 위기에서 비롯된 호승심을 연심으로 착각하는 게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날 이긴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거다.
‘검의 고수가 제 이상형이었어요! 이 공자의 검에 반했어요!’
머릿속에 내게 호승심을 불태우던 미녀가 고백하는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나 역시 미녀들과 대련하다 보면 흔들다리 효과를 노릴 수 있으리라.
꼭 흔들다리 효과가 아니더라도, 무림에서 대부분의 비무는 일종의 친목 행사에 가까웠다.
그러니 비무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미녀와의 접점이 늘어나니 좋다.
일단 미녀들과 만나야 여심(女心)을 가져오지 않겠는가?
검의 이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 만병지왕이 검이라는 말처럼 검은 가장 보편적인 무기이면서 동시에 무림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무기.
따라서 검을 잘 쓰는 남자는 무림에서 인기가 많았다.
절정의 검객은 현대로 따진다면 뇌섹남 같은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다.
검술하는 섹시한 남자, 검섹남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래서 전생의 검성 유진휘는 일대검객에다 잘생긴 외모라는 이점까지 더해져서 검섹남의 정점에 등극, 뭇 중원 여인들에게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인기를 누렸다.
그러니 중원 무림의 검섹남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법, 수법과 함께 검법을 열심히 연마해야 했다.
이제 다시는 전생에 배웠던, 하남자에 게이스럽고 인기도 없으며 폼도 나지 않는 손톱 할퀴기 무공인 구화음백조(九華陰魄爪) 따위는 펼치지 않으리라.
어쨌건 사형이 사저였다면 내가 직접 붙어서 지도했을 것이다. 사실 직접 자세를 교정해주는 편이 더 효율적이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휘는 시커먼 남자였고, 나는 남자 따위에게 신체접촉을 할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비효율적이라도 말로 지도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형은 천재 중의 천재였고, 내가 말하는 걸 찰떡같이 알아들으면서 자세를 곧바로 바르게 교정했다.
*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난 뒤.
비동 창고에 틀어박혀 벽곡단을 주워 먹으면서 복마검법을 복원하던 작업이 마침내 끝났다.
“해냈어! 사제! 우리가 해냈어! 도해 해독이 끝났어! 우리가 본 파의 실전된 진산절기를 되찾았어!”
복마검법의 최후절초인 위타복마를 마지막으로 복마검법의 구결 복원을 완벽하게 끝낸 사형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내게 뛰어들었다.
아니 갑자기 왜 저래?
이렇게 갑자기 기습 포옹을 시도한다고?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여기서 포옹을 거부한다면? 사형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볼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대체 이게 무슨 가불기냐고.
어쩔 수 없다.
이미 더럽혀진 첫 포옹이었다.
눈물을 감고 이번 한 번만큼은 포옹을 내줄 수밖에 없다.
와락.
나는 분루를 삼키면서, 부들부들 끓는 속내를 감추며 사형과 포옹했다.
코 끝에 달콤한 들꽃 향기가 스쳤다.
“전부 사제 덕분이야! 사제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복마검법의 도해(圖解)를 완벽히 해독할 수 없었을 거야! 사제가 나와 본 파의 은인이야!”
내 품에 안긴 사형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은인은 무슨.
어차피 내가 없었더라도, 전생처럼 사형 혼자서 충분히 복마검법을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시행착오를 줄여서 당연한 결과를 좀 더 앞당겨준 것에 불과하다.
‘하여간, 누가 천무지체 아니랄까 봐 미친 재능은 미친 재능이야.’
아무리 내 조언을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했다고 해도 이틀 만에 검흔을 역산해서 복마검법을 복원해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무재(武才)다.
“아닙니다. 사형. 우제(愚弟)가 본 파의 은인이라뇨. 황송한 말씀입니다. 우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약간의 조언밖에는 없습니다. 복마검법 도해 해독 성공의 공로는 오로지 사형의 공로, 전부 사형의 뛰어난 오성(悟性)과 무재(武才) 덕분입니다.”
내 말에 사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중간중간 해독이 막힐 때마다 사제의 적절한 조언이 없었더라면 해독에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야. 사제 덕분에 빨리 해독할 수 있었어. 그러니 도해 해독의 공로는 사제의 것이야.”
사형은 본인도 나 없이도 해독 가능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나를 칭찬해주다니.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저러는 건 겸양이 아니라 기만이다.
사형이 아니라 사저였다면 업계 포상이었겠지만, 에휴.
아무튼 포옹은 이제 충분하다.
더 이상 남자와 접촉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사형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냈다.
“우제(愚弟)의 별것 아닌 공을 치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아니야. 사제 덕분이야. 그나저나 사제, 우리 이제 비동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 시일이 많이 지체됐어. 사부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사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비동에 틀어박혀 복마검법을 복원하는 동안, 전영은 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딱히 흔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전생의 기록에도 전영이 실종된 유진휘를 먼저 찾아냈다는 정보는 없었다.
뭐 전영은 지금쯤 발에 땀 나도록 공동산을 돌아다니고 있겠지만,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가 혼원비동을 발견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나가서 본산으로 돌아가는게 맞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형, 아직 비동에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선조의 안배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잠시만 우제가 비동을 수색할 시간을 주십시오.”
“응, 알았어.”
내 부탁에 사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선을 검흔이 새겨진 석벽 쪽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지금 본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뭘 하려고 남자 사형이랑 이틀 동안 밀폐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검술 복원을 했겠는가?
전부 혼원검제가 남긴 궁극의 정력 비결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석벽에 손을 짚었다.
“사제, 그 석벽은 왜? 거기에 뭔가 있어?”
사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면서 눈을 감고 석벽 내부로 기감을 투사했다.
우웅.
석벽이 미약하게 울리면서, 머릿속에 기감을 통해 감지된 석벽 내부 구조가 3차원 형상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석벽 내부에 설치된 기관장치 설계가 낱낱이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 석벽을 정직하게 열려면 극성의 복마검법을 석벽에 새겨진 검로대로 펼쳐야 했다.
하지만 사형도 나도 아직 복마검법을 극성으로 펼칠 수 없었다.
복마검법 복원은 성공했지만, 복마검법과 짝을 이루는 내가기공인 혼원일기공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복마검법을 펼치는 건 현시점에서 불가능했다.
사형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천재적인 오성과 무재, 그리고 일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바탕으로 혼원일기공 없이도 극성에 이른 복마검법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비동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전생의 사형도 장성한 뒤에 광성단혈에 다시 돌아왔지만, 비동이 무너져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문을 열어야 했다.
그리고 컴퓨터에서 로그인을 꼭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정직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기관장치 역시 그러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일종의 해킹이었다.
‘300년 전에 설치된 물건이라 그런지 구식이군.’
나는 머릿속으로 그려낸 기관장치 해부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형이라면 모를까, 나는 전생부터 기관진식 관련 지식을 습득했다.
이 방면에서는 제갈세가의 가주만큼은 아니지만 대가(大家)라고 자칭 가능한 수준은 되었다.
원래는 환생 대법 실행 이후 미래에 부활한 내가 취할 안배 용도로 만들 내 무덤 때문에 배운 지식이었다.
금은보화와 무공서, 영약이 같이 묻힌 내 무덤을 탐욕스러운 도굴꾼 놈들로부터 방어할 보안 장치로는 기관진식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덤에 설치할 기관장치와 기문진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기관진식을 배웠다.
비록 환생이 아닌 회귀를 해버린 덕분에 정성들여 만든 내 무덤은 없어졌지만, 기관진식 지식은 고스란히 내 머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보안 장치에는 반드시 취약점이 있지. 기관장치 또한 예외가 아니야.’
전생의 지식 덕분에 나는 혼원검제가 석벽에 설치한 기관장치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안배를 숨긴 기관장치라고는 해도 300년 전의 구닥다리 물건.
당연히 30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최신 기관장치와 비교하면 수준이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선진 기관진식 지식을 보유한 나에게 이 정도 기관장치 풀이는 여반장(如反掌)이었다.
나는 조용히 파악한 취약점에다 손바닥을 댄 뒤에 은밀하게 내력을 흘렸다.
파스스스.
끼릭, 끼리리릭! 끼리리리리릭!
석벽 내부 취약점에 주입된 내력이 폭발하면서 석벽 내부에서 금속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기관장치가 망가지는 소리였다.
“사, 사제?!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사형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작업에 집중했다.
취약점을 안다고 해서 기관장치를 뚫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딱 정확하게, 취약점을 뚫고 문이 열릴 정도로만 장치를 망가뜨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 적정량 이상이나 이하의 힘을 가하면 기관장치가 터져서 비동이 무너지거나, 반대로 장치가 이상하게 망가져서 문이 영영 열리지 않는 수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머리핀을 열쇠 구멍에 넣어 자물쇠를 따는 작업이나, 청진기를 금고에 대고 다이얼을 돌려 금고 문을 여는 작업과도 같다.
따라서 이 작업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힘 조절이 필수였다.
그리고 현경의 경지에 올랐던 내게 이 정도 내력 컨트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나는 석벽의 취약점을 찾아 손바닥으로 내력을 주입, 적정량의 힘으로 장치를 망가뜨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일에 열중하는 남자가 매력적이라던데······.’
실제로 현대에서 여인들이 남자친구의 가장 섹시한 순간으로 많이 꼽는 장면이 자동차 조수석에서 보는 후진할 때 뒤돌아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남자의 집중에는 자연스러운 매력이 우러나온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주변에는 내 섹시한 집중을 봐줄 여인이 없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정도 집중력이면 미녀에게 호감을 살 정도는 될 텐데 말이다.
그렇게 마지막 여덟 번째 취약점에 내력을 주입해서 망가뜨린 순간.
끼릭, 끼릭, 끼리리릭!
거창한 금속 파열음이 나면 기관 장치가 완전히 망가졌다.
쿠구구구구궁!
그와 함께 비동 창고 전체가 흔들리면서, 검흔이 새겨진 석벽이 반으로 갈라지며 검은 속살을 드러냈다.
‘보안 해제 성공이군.’
마침내, 궁극의 정력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