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23화 (23/171)

23화 할 때는 하는 남자

문이 열리자 사형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제, 이, 이건······.”

“······벽 너머에 수상한 빈 공간이 있어서 기감으로 약한 부분을 찾아 두드려 봤더니 이런······. 이건 선조님께서 후인(後人)을 위해 준비하신 안배인 것 같습니다.”

나는 사형이 내 해킹 실력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300년 전 인물인 혼원검제의 이름을 팔았다.

어차피 천하제일인이니 생사경의 고수이니 해도 이미 돌아가신 분.

나도 이제 공동파의 제자이니 이름 좀 팔았다고 화내지는 않겠지.

내 말에 사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선조님의 안배가 더 있었구나······. 사제 대단해! 사제가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거야!”

나는 내 손을 잡으려는 사형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빼면서 피했다.

남자 주제에 어딜 만지려고?

“과찬이십니다. 사형. 우제는 그저 우연히 운 좋게 발견했을 뿐입니다. 선조님의 안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혼원검제 선조님의 유지를 수습하시지요.”

“응. 그래야지, 같이 가자. 사제.”

내 말에 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한 건지 호구인 건지 모르겠지만, 사형은 운이 좋아서 안배를 발견했다는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기관진식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저럴 수 있는 거겠지.

“내가 먼저 들어갈게.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제. 뒤따라와.”

“알겠습니다.”

먼저 가준다니 좋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형과 한 뼘의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로 검은 속살을 드러내는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

그렇게 한 발짝, 어둠 안으로 발자국을 내딛은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

뇌리를 뒤흔드는 소음이 울렸다.

그와 함께 내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걷던 사형의 기척이 기감에서 사라졌다.

‘진법인가?’

나는 곧바로 이 이질적인 감각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건 진법이었다.

하긴, 기관에는 반드시 진법이 따라붙는 법이다.

현실에서도 중요 정보는 이중삼중 방화벽을 쳐서 보안을 유지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학문 이름도 기관진식이 아닌가?

‘자, 무슨 진법이냐.’

물론 나는 무슨 진법이 나와도 생문(生門)을 찾아 파해하거나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진(陣)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기감을 뻗치던 순간.

‘윽!’

기의 흐름이 꼬이면서 기혈이 뒤틀렸다.

의식의 끈이 잠깐 끊겼다 이어졌다.

시야가 밝아졌다.

천장이 보였다.

나무로 된 낡은 천장.

나는 몸을 움직였다.

움찔.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호오. 이 아이요?”

“그렇소. 우리말을 할 줄 모르고, 조선어만 내뱉는 걸 보면 해동에서 온 미아 같은데, 궁(宮)에 팔면 얼마나 받겠소?”

“요즘 궁(宮)에 화자(火者)가 많이 필요하다 들었소. 저 멀리 해동에서까지 화자를 수급하고 있다하오.”

잊은 적 없는, 아니 잊을래야 잊은 적 없던 대화들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중국어를 몰라서 그 당시에는 몰랐던, 하지만 이제는 중국어를 알기 때문에 잘 들리는 대화.

이 대화는 나를 팔아먹으려는 상인 왕삼과 나를 황궁에 팔아치운 브로커인 환관 거세업자, 일명 엄공(閹工)이라 불리는 장이현이 나누는 대화였다.

두 사람은 나를 두고 쑥덕대더니 이내 몸값 협상을 마쳤다.

움찔.

나는 몸을 움직였지만, 핏자국이 있는 낡은 나무 수술대에 단단히 묶인 사지는 요지부동이었다.

“흐흐흐. 너한테도 이역만리 타향에서 유리걸식(遊離乞食)하다 굶어 죽는 삶보다는, 궁(宮)에서 환관으로 의식주 걱정 없이 먹고사는 삶이 좋을 것이야. 혹시 모르는가? 옛 조고(趙高)처럼 천하의 권세를 움켜쥐는 내재(內宰)로 출세할지. 하하하. 그렇게 출세하면 이 왕삼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느니라.”

왕삼이 나를 바라보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뭐?

조고처럼 출세해?

조고가 진나라 멸망의 원흉인 간신배인 건 둘째치고, 그의 말은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전생의 나는 환관으로서 출세해 구천구백구십구세 삼창을 듣고, 정보기관인 동창과 서창을 부리고 엄당을 통해 조정까지 장악, 황제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기는 했으니까.

대신들 앞에서 권력으로 사슴을 가리켜 이건 말이라고 협박하던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권세를 지닌 조고(趙高)도, 후한 말 황제의 눈을 가리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십상시(十常侍)도, 구천구백세 삼창을 들은 위충현(魏忠賢)도 권세가로서는 전부 나보다 한 수 아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권력을 가지면 뭘 하는가?

‘섹스를 할 수 없잖아!’

나는 새를 진짜로 떨어뜨릴 수 있는 무공도 황제보다 더한 권력도 가져봤지만 내게는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양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자인데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천하제일미녀를 만나도 그녀의 여심(女心)을 얻지 못하는 삶이란!

용두질조차 하지 못하는 삶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권력을 부리면 부릴수록 내게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이라는 이름의 갈증만 더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뭐?

은혜를 잊지 말라고?

“그럼 지금부터 정신(淨身)을 시작하겠소.”

스윽.

장이현이 수술용으로 사용되는 칼을 들었다.

정신(淨身).

깨끗한 신체라는 단어로, 고자를 가리키는 말이자 고자로 만드는 수술을 고상하게 말할 때 쓰는 말이기도 했다.

더불어 좋은 한자 뜻풀이와는 다르게 일상에서는 고자 새끼 비슷한 어감의 욕으로 쓰이기도 했다.

고환과 음경을 잘라 사내 구실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 몸을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다.

부글부글.

감정이 들끓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온몸의 촉각이 생생하지만, 실은 환영을 보여주는 절진에 걸려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건대 300년 전 천하제일인인 혼원검제가 후인(後人)을 시험하기 위해 설치한, 트라우마와 심마(心魔)를 자극하는 환영을 보여주는 진법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역시 기분이 더럽다.

환영이라는 걸 알아도, 견딜 수 없다.

“이 개새끼들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생각을 바꿨다.

후인을 시험한다고? 시험 용도로 이런 불쾌한 기억을 생생하게 다시 겪게 만들다니.

300년 전 천하제일인이고 뭐고 이미 죽은 사람 주제에 산 사람을 이렇게 좆같게 실험해?

생문(生門)은 찾지 않는다.

진법을 부순다.

환영진은 타인의 정신세계에 강제로 간섭해서 환영을 보여주는 진법.

하등한 환영진은 오감만을 속일 뿐이지만, 고등한 환영진은 정신세계에 직접 간섭한다.

그러니 오감(五感)은 물론 기감조차 속일 정도로 진짜 현실적인 환각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고의 경지인 현경에 전생에 도달했던 무인.

그리고 현경의 경지란 심득을 통해 소우주(小宇宙)를 완성하는 것.

소우주를 완성하고 상단전을 타통하면 스스로의 심상을 무학의 깨달음으로 제련(製鍊)하여 무도(武道)로 발현할 수 있다.

이것이 세간에서는 이른바 심검(心劍)이라 불리는, 심상무도(心想武道)의 경지이다.

비록 회귀해서 내력은 잃어버렸지만, 정신은 그대로이기에 내 완성된 소우주(小宇宙) 역시 그대로였다.

그 말은.

“이런 씨발, 두 번 다시 안 쓰고 싶었는데.”

나는 한국어로 환영 속의 원수 놈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뭐라 중얼거리는 거요?”

“나도 조선어는 잘 모르지만, 칼을 보고 무서워하는 모양이군. 정신(淨身)이 두려워서 벌벌 떠는 건 이쪽에서는 흔한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오히려 오줌을 안 지리는 게 더 신기하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는 두 원수를 보면서 나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현실이었다면 불가능했지만, 이곳은 정신세계.

현경의 고수가 완성한 정신세계 속에서는 같은 현경의 고수라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환술과 환영진 역시 정상적이라면 현경의 고수의 이미 완성된 정신과 의념에는 통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소우주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신체는 아직 미숙하고 내력도 부족했기에 환영진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심상세계를 이미 간섭받은 지금, 환영진 파훼는 시간문제다.

심상무도는 마음의 무학, 현실에서는 신체와 내력이 저열해서 펼칠 수 없을지 몰라도 정신세계 속에서 펼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면서 ‘그 쓰레기 내공’의 구결을 외웠다.

우우우우우웅!

규화보전의 묘리를 따라 단전에서 있을 리 없는 음한지기가 치솟았다

정신세계이기에 가능한 기적.

투둑.

내 사지를 결박한 밧줄이 얼다가 깨졌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이 깃든 냉기가 전신에서 휘몰아쳤다.

“으윽?!”

“뭐, 뭐야?!”

원수들의 환영이, 내 트라우마가 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몸을 일으키며 마음의 무학을 펼쳤다.

그와 함께.

일편빙심(一片氷心)

오직 환골탈태와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위해 단련한 심상무도. 일편빙심이라는 말대로 남녀상열지사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 빚어낸, 한 조각 얼음처럼 정순한 마음이 얼음의 칼날로 화해 원수들을 덮쳤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굉음과 함께 원수들의 몸이 얼음 칼날에 꿰뚫리면서 산산조각 부서졌다.

부서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수술대도, 낡고 더러운 엄공의 공방도, 나아가 나를 간섭하는 진법의 법력(法力)도 모조리 얼어붙어 무너졌다.

그렇게 내가 진법을 무너뜨리려는 그때.

“가가(哥哥) 그만두시어요.”

스윽.

등 뒤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눈앞에 불쑥 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상상했던 이상형,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닌 절세가인(絶世佳人)이 몸매가 비치는 반투명한 나삼(羅衫)을 입고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 쌍의 수밀도(水蜜桃)를 닮은 그녀의 풍만하고 하얀 가슴이 내 가슴에 뭉개졌다.

“가가. 나쁜 꿈이라도 꾸셨나요?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다니 소첩은 가가의 건강이 염려되어요.”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몸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이 휘영청 뜬 밤 아래 호수에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기화요초(琪花瑤草)와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장식된 정원의 나무에는 육즙이 뚝뚝 흐르는 빨간 고기가 걸려 있었다.

고증에 충실한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다.

진법의 변화로 풍경이 변한 것이다.

“소첩도! 소첩도 가가의 품에 안기고 싶사와요!”

“아니에요! 가가! 우선 저부터······.”

나삼을 입은, 서로 다른 미색(美色)을 지닌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일곱 미녀가 아양을 떨며 내게 안기려고 들었다.

삼처사첩과 주지육림.

내가 그토록 바라던, 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눈앞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끈.

그녀들의 부드러운 살결, 달콤한 향기에 반응한 내 양물이 굳건히 우뚝 솟아올랐다.

웅장할 정도로 거대한, 교합만으로 여인을 바로 극락으로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이상적인 크기의 양물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상황이었지만.

‘역시 불쾌하군.’

기분은 전혀 좋지 않았다.

이곳은 진법이 만들어낸 환영 세계.

저 삼처사첩들도, 주지육림도 전부 실존하지 않는 허상(虛像)의 존재일 뿐이다.

내가 뇌가 아닌 양물로 사고하는 색마(色魔)였다면 이 허상에 걸려 저 미녀들과 질펀한 난교(亂攪)를 즐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색마가 아니라 색도의 일대종사.

내가 추구하는 색도는 단순한 육체적 쾌락의 충족이 아니었다.

육체적 쾌락의 충족이라면 지금이라도 이룰 수 있다. 홍등(紅燈)을 내건 기루에 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없다.

진정한 쾌락, 진짜 좋은 운우지락(雲雨之樂)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서로 정(情)이 통하는 섹스인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마음이 통하는 섹스를 할 때 여자는 옥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돼서 행복감을 느끼니까.

상대를 극락으로 보내는 진짜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여심(女心)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쾌락 없이 육체적 쾌락만 추구하는 운우지락은 금방 한계에 도달한다.

정신적 쾌락이야말로 운우지락의 정점이자 내가 추구하는 색도의 이상향이다.

“너희한테는 마음이 없다.”

하지만 환영에게 마음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환영과 진짜 섹스, 궁극의 운우지락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오직 육체뿐만인 허망한 관계 따위,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감(五感)과 육체(肉體)를 넘어 심상(心想)까지 충족하는 쾌락이야말로 진짜 운우지락이다.

나는 내가 직접 단련한 매력으로 절세가인의 여심(女心)을 쟁취하여 삼처사첩을 이룩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직접 만든 주지육림에서 그녀들과 마음이 통하는 궁극의 조운모우(朝雲暮雨)를 즐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짜 쾌락은 필요 없다.

“너희와는 진짜 섹스를 할 수 없어!”

나는 절세가인들에게 더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나는 색마가 아니다.

나는 양물로 사고하지 않는다.

나는 더없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고하는, 뭇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뇌가 섹시한 남자다.

뇌섹남의 매력을 지닌, 장차 색도의 일대종사가 될 나에게 이런 저열하고 저급한 미인계(美人計)를 쓰다니.

용납할 수 없다.

일편빙심(一片氷心)

내 격렬한 마음에 심상무도가 반응했다.

그와 함께 일어난 냉기의 칼날이 공간을 얼리며 얼어붙은 거목의 형상으로 피어난다.

거목에서 자라난 빙결의 나뭇가지와 흩날리는 서리 나뭇잎이 그대로 일곱 미녀를 꿰뚫고 술로 채워진 호수를, 나아가 온 천하를 얼렸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하얗게 얼린 그때.

세계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멈췄다.

“끌끌끌끌끌···.”

모든 방위에서 혀 차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승의 전음 수법인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다.

“이거, 내 예상을 뛰어넘는 후인(後人)이 왔군.”

온통 회색으로 물든 주지육림에 홀로 선, 역태극이 새겨진 검은 무복의 중년인이 보였다.

나는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중년인이 바로 혼원검제.

300년 전 원말명초의 혼란기에 혈교의 진군을 막고 강호 무림을 구원한 공동파 역대 최강의 고수이자 천하제일인.

그리고 궁극의 생명인 순극생기(純極生氣), 아니 절대 정력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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