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어야
공동파 본산 접객당.
과거 공동파 전성기에는 본산을 방문한 수많은 방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기에 접객당 또한 손님을 맞기 위해 많은 하인이 들락날락하던 거대 전각이었다. 하지만 본산이 몰락한 지금의 접객당은 사실상 폐가로서 방치되고 있었다.
손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 서 대인이 본산에 올 때가 있었기에 접객당 관리는 하고 있었지만, 대다수 접객당 내부 방들은 흉가나 다름없었다.
“누추한 방에 귀한 손님을 모셔서 미안하오.”
다 쓰러져가는 접객당에서 그나마 멀쩡한 방으로 안내한 사부가 이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으레 하는 겸양의 말인 누추하다였지만, 공동파의 접객당은 내가 봐도 누추했기 때문에 살짝 뻘쭘했다.
“괜찮습니다.”
흑사룡의 얼굴이 움찔하는 게 그 증거였다.
그녀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공동파의 낡은 접객당을 보고 눈빛이 동요하고 있었다.
마치 고시원에 처음 와 본 갑부처럼 말이다.
어떻게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지? 같은 표정을 애써 감추는 흑사룡.
하긴 흑사룡은 사내처럼 거칠게 자라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거대 사파의 하나뿐인 소방주.
공동파 같은 다 망해가는 문파에 온 경험은 별로 없겠지.
“멀리서 온 객이니, 환대의 의미에서 본 파에서 차라도 한 잔 내오도록 하겠소. 서 소저.”
“예, 장문인.”
드르륵.
사부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서하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과를 내오게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린.
요리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서하린에게 다과를 맡기다니.
벌써 불안하다.
“자, 앉게나.”
전영을 시작으로 나와 사형 그리고 흑사룡이 착석했다.
“답신은 어디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흑사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전영에게 건넸다.
전영이 봉투의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쳤다.
[일시는 보름 뒤, 시각은 정오, 장소는 화정현이다. 비무대는 본 방에서 준비하지. 공증인의 입회하에, 이 대 삼의 후기지수 비무를 행한다.]
전영이 서신의 내용을 읊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내건 조건을 수락한다.
흑룡방이 이기면 공동파는 화정현에서 영구히 철수하고 50년간 봉문한다.
반면에 공동파가 이기면 흑룡방은 감숙성에서 영구히 철수하고 사영회는 관아에 넘겨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없이 깔끔한 내용.
역시 적사월이 일 처리 하나는 잘한다.
“본 방의 공증인은 하오문에서 맡을 것입니다. 귀 파에서도 공증인을 내세우십시오.”
보통 강호의 방식으로 뭔가를 놓고 해결하는 비무의 경우 공증인을 반드시 내세워야 했다.
공증인을 내세우는 이유는 나중에 져놓고 딴말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비무의 결과를 강호 무림 전체에 빠르게 바이럴하는 역할은 덤이다.
“본 파의 공증인은 서문세가에 청할 예정일세.”
사부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문세가.
자타공인 감숙제일문파로 감숙성의 패권을 장악한 그들을 이번 비무에서 제외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감숙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서문세가의 비호나 묵인이 필요했다.
우리가 제발 오지 말라고 해도 놈들은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 터.
그러니 차라리 공식적으로 같은 정파로서 공증인 해달라고 역할을 아예 못박는 게 그쪽도 우리도 편했다.
‘게다가 지금쯤 서문세가 놈들도 똥줄이 오지게 타겠지.’
50년의 간신배 경력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서문세가 가주전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공동파 욕이 메들리로 흘러나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원래 서문세가의 계획은 흑룡방의 계획을 방조하여 공동파를 차도살인한 뒤, 공동파가 멸문하면 공동파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고 흑룡방을 토사구팽하는 것.
하지만 이 계획은 어디까지나 흑룡방이 흑도의 방식으로 공동파를 조진다는 전제에서만 성립했다.
물론 원래라면 흑룡방이 굳이 비무에 응할 필요 없이 흑도의 방식으로 공동파를 상대할 테니 서문세가는 강 건너 불구경만 하다가 어부지리를 취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공동파가 비무를 제안하고 흑룡방이 이를 받아들인 이상, 서문세가는 비무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이 일에 그 어떤 숟가락도 못 올리게 됐지.’
하지만 문제는 흑룡방이 내 농간으로 공동파의 비무 제안을 승낙했다는 것.
덕분에 비무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정당한 비무의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서문세가는 더 이상 화정현의 일에 간섭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공동파가 비무에 패배해도 서문세가는 공동파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 수 없다.
우리가 이겨도 마찬가지다. 서문세가가 화정현의 이권에 숟가락을 올릴 건덕지는 없다.
정당한 비무의 결과이기 때문에 제3자인 서문세가가 끼어들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비무에서 서문세가의 역할은 공증인과 뒤처리 셔틀뿐이었다.
‘거기에 공증인 요청까지 받으면 아주 가관이겠군. 가주 놈 얼굴이 볼만하겠어.’
나는 서문세가의 가주이자 화경의 고수인 진천검왕 서문현천의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물론 공증인 요청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감숙제일문파의 체면 때문이었다.
감숙성에서 일어나는 일, 더군다나 같은 정파에다 구파일방의 일원이었던 명문 공동파의 일을 무시한다?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강호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해라 할지라도 해야 했다.
그것이 강호 무림의 법도니까.
벌써 쾌락 없는 책임을 떠맡은 서문현천의 혈압 오르는 표정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놈이 세운 공든 탑을 내가 무너뜨린 것이다.
역시 정적을 정치질로 괴롭히는 건 즐겁다.
“알겠습니다.”
위소련이 전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그때.
“다과를 내왔습니다.”
딸칵.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싸구려 녹차와 함께 다과가 등장했다.
탁자 위에 올려진 쟁반에 있는 다과는 아무리 봐도 멀쩡한 물건은 아니었다.
새까맣게 숯처럼 탄 형상을 한 정체불명의 과자.
거기에 녹차도 왠지 모르게 탁한 액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냄새부터 심상치 않은 ‘다과’의 등장에 흑사룡의 얼굴이 움찔했다.
“자, 마음껏 들게나.”
부드럽게 웃으며 다과를 권하는 전영.
이거 설마 위소련을 엿 먹이려는 건가?
그런 거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이 내주는 다과를 거부하는 건 접대의 예의에도 어긋나고 소방주의 체면도 상하게 만드는 일.
위소련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다과라는 이름의 끔찍한 물체를 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위소련이 떨리는 손으로 차를 후루룩 들이키며 과자를 손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
입 안에 다과가 들어가자마자 몸이 들썩하는 위소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을 본 사람처럼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끄윽······. 이건 대체······. 거기 시녀! 이런 끔찍한 다과라니! 설마 본 소방주와 대 흑룡방을 모욕할 셈인가! 그래서 이런 물건을 내온 건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다시 점등하는 위소련.
그녀의 애써 참았던 거친 성격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위소련의 몸에서 무형의 기세가 일어나 서하린에게 순식간에 쏘아졌다.
위소련과 눈을 마주한 서하린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무림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서하린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건 사영회의 칼부림이었고, 사영회의 배후에는 흑룡방이 있었다.
서하린에게는 위소련이야말로 진정한 흑막이자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거기에 서하린은 아직 무공도 안 익힌 일반인. 사파제일후기지수로 일류의 경지에 닿은 위소련의 기세를 그녀는 절대 버틸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지.’
서하린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어쨌거나 그녀는 미래의 사매이자 정파제일미녀요, 황제와 제법 닮은 소녀가 아니던가.
여기서는 내가 나설 시간이었다.
우웅.
소양심법의 내력을 단전에서 일으켰다.
단전에서 치솟은 내력이 혈도를 타고 전신을 휘돌았다. 그 상황에서 역라순혈공으로 내력을 증폭한다.
쿠콰콰콰콰콰!
거친 내력이 온몸을 내달리는 순간, 나는 재빠르게 위소련과 서하린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허공에서 위소련의 기세와 내 내력이 그대로 충돌했다.
이대로면 아까 사형과 위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이 엉망이 되어버릴 거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부딪힌 기운을 갈무리해 천장으로 쏘아보냈다.
우지끈!
천장으로 치솟은 기운 때문에 대들보에서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염병.
안 그래도 불안한 폐가에 이렇게 데미지를 주다니.
나는 대들보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받으면서, 위소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아이를 향해 출수한다라···. 흑도는 제 기분이 상하면 사람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더니. 그 평에 어울리는 짓거리군.”
“······너도 이 다과를 먹어보면 내 심정을 알 거다. 난 처음에 공동파에서 날 독살하려는 줄 알았다.”
내 말에 새까맣게 탄 다과를 가리키는 위소련.
독살이라는 말에 서하린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모두의 시선이 다과를 향했다.
“이상하군. 독살이라니. 아무리 봐도 맛있게만 보이는 다과인데 말이오. 그쪽 말대로 이 다과를 내가 먹어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면······. 그대는 무고한 민초인 서 소저한테 출수한 걸 사과해야 할 거요.”
“······그게 맛있어 보인다고? 인세에 다시없을 극독의 맛과 같은 다과를 먹고도 네가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주지.”
위소련이 부들부들 떨면서 나와 서하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히끅!”
서하린이 주저앉아 딸꾹질했다.
“좋소.”
나는 위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에 탁자 위에 있는 다과를 입 안에 넣고 씹었다.
‘!!’
각오는 했지만, 그 다과라는 이름의 숯덩이는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동창 말단 요원으로 현장 업무를 하면서 별의별 괴식을 다 먹어본 나였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맛없을 정도.
그야말로 위장이 이 음식이라는 물체를 거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굴복할 거였다면, 위소련과 내기를 하지도 않았다.
내게는 50년이 넘어가는 궁중 암투 경험을 통해 익힌 현경의 경지에 달한 연기력이 있었다.
나는 초인적인 통제력으로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통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가히 칸 영화제 대상을 초월한 수준의 연기였다.
“맛있군. 차와 잘 어울리는 은은한 단맛에 부드러운 식감과 목넘김이 참으로 예술적인 다과요.”
주륵.
나는 서하린이 끓인 차도 마셨다.
대체 차를 어떻게 끓인 건지. 하수구 구정물의 오물 냄새를 능가하는, 시궁창 물을 그대로 들이키는 듯한 끔찍한 맛이 식도에 번졌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얼굴과 전신의 근육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하나하나 전부 컨트롤하면서 말했다.
“차 또한 향이 좋소. 비록 싸구려 녹차지만, 서 소저의 솜씨로 그 향과 맛이 극대화되어 깊이가 있어졌구려. 서 소저의 용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맛이오.”
주륵.
미처 통제하지 못한, 끔찍한 맛에 자극받은 눈물샘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했을 실수.
하지만 나는 소리장도와 구밀복검이 날아다니는 북경 조정에서 정치질로 반대파를 전부 숙청하고 황제 위에 군림하던 중원 역사상 최악의 간신배.
당연히 이 정도 위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죄송하오. 너무 감동적인 맛이라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소. 이제는 돌아가신 내 어머님께서 식후에 끓여주던 차의 맛과도 같은 맛이라 그만······. 이토록 감동적인 순간을 선사해준 서 소저한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구려.”
나는 즉석 애드리브 연기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딸칵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품평이 전부 끝난 순간.
위소련의 얼굴이 경악과 혼돈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러길래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어야지,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