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천하에서 제일 나쁜
이철수의 말을 들은 능월향, 아니 적사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극성의 섭심유혼기를 버텼다고?’
거기에 더해 면사를 벗고 시험을 통과한 자가 아니라면 볼 수 없다는 능월향의 본모습을 보여준 것도 모자라, 사내와의 접촉 금지라는 자체 규율까지 깨어가며, 친히 새하얀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뻗어 그의 손까지 어루만졌건만.
이철수의 이지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신체가 동요하는 건 적사월도 느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리현상일 뿐.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섭심유혼기의 공력이 강해질수록 더 또렷해지고 선명해졌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 보고 반해버린다는, 얼굴 자체가 미염공이자 섭혼술이랑 평을 받는 절세의 미모를 지닌 천하제일미 적사월의 본모습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뭇 사내의 심금을 울리는 미모를 지닌 능월향의 얼굴이었다.
미염공의 효과가 미모가 절색(絶色)일수록 높아진다. 그래서 적사월은 능월향의 얼굴과 극성의 섭심유혼기의 조합으로 화경의 고수도 능히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화경의 고수는커녕 이제 겨우 이류에 불과한 소년 제자에게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적사월의 코 끝에 섭심유혼기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 고자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순간 고자를 의심했지만, 적사월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철수는 고자는 아니었다.
그날 밤, 그녀의 눈으로 직접 꼿꼿하게 선 그의 대물을 확인했지 않은가?
열네 살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거근인 그 물건을.
그렇다고 이철수가 남색가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의 신체는 분명 여인의 색기에 반응했으니까.
두근.
그날의 일을 떠올린 적사월의 심장이 뛰었다.
적사월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안 된다.
지금 심장이 뛰어서는.
이러면 유혹을 하려다가 도리어 당하는, 주객전도의 형상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적사월은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제 놈이 신승이야 천마야 뭐야.’
고자도 남색가도 아닌 사내 중에서 그녀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단둘.
정파제일인인 소림사의 신승(神僧)과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천마신교의 수장인 천마(天魔)뿐이었다.
우내삼존의 일원이자 정파와 마도의 정점에 오른 절대고수였다.
그렇다. 신승도 천마도 어디까지나 같은 현경의 고수였기에 유혹을 이겨낼 수 있던 것이다.
그녀보다 까마득한 하수인 이철수가 유혹을 이겨냈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적사월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면서, 사내를 유혹하려 익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런가요? 소녀는 그저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하려 잡기(雜技)를 사용했을 뿐이랍니다. 혹시 소녀의 잡기가 소협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이 자리에서 사과드릴게요.”
적사월이 섭심유혼기가 담긴 미소를 그에게 날리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연스럽게 앞섶이 살짝 풀어지면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사내라면 누구나 손에 쥐고 따먹고 싶을 정도로 농염한 한 쌍의 수밀도(水蜜桃)였다.
‘사내들이 커다란 가슴을 좋아한다는 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
연애도, 사랑도 해본 적 없는 적사월이었다. 하지만 남심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사내는 커다란 가슴을 좋아한다.
그리고 적사월은 미모뿐만 아니라 몸매마저 완벽한 미녀였다.
그녀의 가슴은 크기뿐만 아니라 모양까지 완벽했다. 폭이 넓은 외출복 위로도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내는 가슴 때문에 십대 후반부터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였다.
‘이런 가슴 따위, 거추장스럽고 남의 시선만 끌 뿐인데······.’
물론 적사월은 그런 본인의 가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0대 소녀일 때부터 그녀의 가슴을 향하는 사내들의 음탕한 시선, 노골적인 음담패설은 다시는 겪기 싫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차라리 작았으면 조금 눈에 덜 띄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거추장스럽다고만 생각했던 가슴이, 이철수를 유혹할 비장의 무기가 되어주었다.
‘자, 아낌없이 보고 넘어오거라.’
적사월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보기만 해도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미소였다.
그녀의 적안이 이철수를 향했다.
하지만 이철수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욕망 한 점 없는, 북해의 빙산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눈동자.
거기에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기세가 적사월의 몸을 압박했다.
그것은 무공의 기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만인(萬人)의 위에서 군림한, 군주만이 지닐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위압감이었다.
“소용없다고 말했을 텐데.”
이철수가 일견 불쾌함까지 깃든 목소리로 말한 순간, 적사월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아직 3월이요. 추위가 전부 물러가지 않은 상황이니, 앞섬은 여미는 것이 좋겠구려. 고뿔 들겠소.”
하지만 그 기도도 순간이었다.
이철수의 몸에서 풍기는 군림자의 기도가 사라졌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봄날처럼 따뜻한 기도가 이철수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자유자재로 표정과 기도, 말투를 변검처럼 현란하게 바꾸는 이철수의 태도에 적사월은 그녀도 모르게 이미 주도권을 내어준 지 오래였다.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도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이철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철수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손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가슴에 손이 닿지 않게 주의하며 적사월의 앞섬을 다시 여몄다.
‘읏······.’
두근.
두근, 두근.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이철수가 색(色)에 미친, 아무에게나 양물을 휘두르는 미친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무려 극성의 섭심유혼기를 버틴 남자였다.
오욕칠정을 초월한 현경의 절대자도 아닌, 한낱 이류 무인이 말이다.
이것은 이철수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초인적인 평정심을 가졌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마 그의 눈앞에 헐벗은 절세미녀들이 떼로 몰려들더라도, 이철수는 평정심을 유지하리라.
불가의 고승이나 도가의 도사조차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늘.
이철수의 자제력은 이미 그들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남자야말로, 여인의 미색(美色)에 미혹되지 않고 겉모습이 아닌 마음만 보는 남자야말로 그녀가 원하던 이상형이었다.
적사월은 아직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철수를 유혹하려다 역으로 유혹에 당해버린 것이다.
그의 손이 닿은 가슴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그의 손길이 만약 진짜 가슴에 닿았다면, 그렇다면······.
그 이후를 상상하던 적사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게 둘 수는 없는 일이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한테······. 내가······. 그런······.’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적사월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게다가 그녀는 현경의 고수였다. 아무리 섭심유혼기의 유혹을 뿌리쳤다고한들, 이류밖에 안 되는 애송이를 제압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쥐어짜듯 가슴에 통증이 올라왔다.
‘그때는 그랬으면서 지금은 왜······.’
적사월의 마음 한쪽 구석에서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화면호검의 모습으로 대면했을 때는 분명 함께 음양의 도를 논하자고 했던 이철수였다.
그런데 대체 왜, 지금은 그녀가 먼저 무려 하룻밤을 언급했는데도 거절한다는 말인가.
그 점이 야속했다.
아니, 괘씸했다.
‘설마 이 내가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한 건······.’
그래서 봐주지 않은 건가?
아니다.
화면호검의 얼굴로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던가? 실제로 거사 직전까지 갔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적사월의 손이 또 떨렸다.
‘나쁜 새끼······.’
그는 결국 소원을 합방에 쓰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다.
나쁜 놈.
나쁜 남자.
그녀가 바라던 이상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년.
화면호검으로 만났을 때는 음담패설과 희롱을 자연스럽게 하더니, 능월향으로 마주한 지금은 다정한 풍류공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 그의 모습인가? 참과 거짓을 가리는 찰심안으로도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적안(赤眼)은 지금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걱정하는 이철수의 모습이 진실이라 판정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적사월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다시 면사를 쓰면서 섭심유혼기를 거뒀다.
“죄송합니다. 소협. 소녀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용서해주셔요.”
비장의 수단인 가슴까지 안 통한 이상, 그를 더 이상 유혹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러니 미염공은 거둔다.
‘절대 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 것이야.’
면사를 다시 써서 얼굴을 가린 행위에 대해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적사월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 가지 부탁을 더 들어준다면, 내 소저의 무례를 용서해주겠소.”
“어떤 부탁이죠?”
두근.
적사월의 심장이 뛰었다.
부탁이라니.
그럴 리 없을 거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면사로 가린 얼굴을 넘어서 이제는 귀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어떤 부탁일까.
백화루에서 그녀와 단둘이 만나자는 부탁 정도라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 생각은 있었다.
천하 모든 풍류공자들이 원한다는 능월향과의 독대였다. 부탁으로는 차고 넘친다.
적사월이 그렇게 기대감을 부풀린 그때.
“본 서신이 구파일방 육대세가에 전달되고 본 파의 공증인이 정해지면 하오문의 정보망을 통해 본 파와 흑룡방의 비무를 구주팔황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소문내 주시오. 이번 비무가 본 파와 흑룡방의 대결이 아닌, 정파와 사파의 대결이 되도록 말이오. 어차피 하오문 또한 본 비무의 공증인으로 입회한다고 들었소. 소문이 크게 나면 흑룡방과 하오문에도 이득일 거라 생각하오.”
이철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굳었다.
까드득.
적사월이 작게 이를 갈았다. 그녀의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철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차피 비무의 결과는 변수가 없다면 흑룡방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비무가 벌어지기 전에 판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천하 무림에 소문을 방방곡곡 내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흑룡방과 공동파의 대결을 넘어 정파와 사파의 대결이 된다면 흑룡방의 승리 효과 또한 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 하오문의 태상문주로서도 이철수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은 아니었다.
‘이 나쁜 새끼가······.’
적사월이 고개를 떨궜다.
천하제일미인 그녀였다.
사내에게 이토록 푸대접받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마와 신승은 그녀와 동급의 고수인데다, 사내가 아닌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놈들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철수는 아니었다.
그는 분명 화면호검을 보고 양물을 세우고,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능월향에게는······.
“소협.”
덥석.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낀 적사월이 이철수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손이 잡힌 이철수가 살짝 떨었다.
망설이던 적사월이 결심을 굳혔다.
그래.
나는 지금 사도련주 적사월이 아니다.
사천제일기녀 능월향이다.
그러니 사내의 손목 정도는 붙잡고 조금 애원해도 괜찮다.
적사월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그를 유혹해서 다른 사내와 같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첫 목표는 잊어버린 채로 이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소녀한테서 여인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까?”
진짜 천하에서 제일 나쁜 새끼.
적사월은 이철수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감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적사월의 질문을 들은 이철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