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향기 없는 모란꽃
“소협께서는······. 소녀한테서 여인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까?”
덥석.
내 손목을 갑자기 붙잡은 적사월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면사를 써서 그녀의 얼굴 표정을 살필 길은 없다.
내 무공이 조금 더 고강했다면 면사 미녀를 만난 무협소설 주인공들처럼 면사 너머를 꿰뚫어 그녀의 얼굴 표정을 살필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2류따리 좆밥 수준이니까 불가능하다.
아니 표정을 알아도 상관없다.
적사월은 나만큼은 아니지만, 나와 버금가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급은 되는 연기의 고수.
그녀의 표정만으로 진위여부를 판별할 수는 없다. 북경 조정에서의 궁중 암투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그 누구의 표정도 감정도 믿지 말라는 거였다. 나와 비슷한 레벨의 연기 고수가 즐비했으니까.
적사월 역시 그렇다.
미염공을 거둔 것도, 어쩌면 미염공 없이 순수한 미모와 동정심으로 나를 유혹하려는 또 다른 술책일 것이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적사월은 60년 묵은 노괴이자 사파제일인이며 사도련의 수장.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황궁 시절 나처럼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인 행동일 터.
그러니 이것은 함정이다. 아까처럼 나를 시험하려는 행위다.
넘어가면 안 된다.
우선 나는 손목을 빼려 시도해봤지만, 그녀의 고운 손이 내 손목을 옭아매어 놔주지 않았다.
천하제일미답게 부드러운 손길이 내 손목에 느껴졌다.
미인의 섬섬옥수의 감촉은 고운 비단 같아서 좋았지만, 나는 그 감촉을 즐길 여력이 없었다.
마치 끈끈한 거미줄에 걸린 느낌.
‘거미한테는 교미를 끝낸 뒤에 암거미가 수거미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더니······.’
그건 흡정공을 익힌 적사월 역시 마찬가지일 터.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심장이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양물이 달려 있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기껏 2회차 인생에서 쌓아 올린 정력을 여기서 암거미에게 걸려 흡정공으로 잃을 수는 없다.
손을 빼낼 수 없다면, 이 상황을 이용해야 했다.
상대가 연기를 한다면, 나 역시 연기로 받아쳐야 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면서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능 소저는 사천을 넘어 구주팔황에 위명을 떨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 능 소저가 여인의 매력이 없다면, 천하의 다른 여인들은 전부 사내나 다름없는 박색에 불과할 것입니다. 능 소저는 빙기옥골의 자태를 지닌, 사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매력적인 여인이며 사내인 저 또한 그런 능 소저의 자태를 아름답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혀에 기름칠을 한 듯, 환관 시절의 아부 실력을 살려 유려한 말솜씨로 적사월에게 칭찬을 날렸다.
실제로 능월향의 얼굴을 한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가슴을 살짝 보여줄 때 순간 이성의 끈을 놓칠 뻔하기도 했다.
고자였던 1회차 인생과는 달리, 양물이 멀쩡한 2회차 인생에서는 종종 신체가 이성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방금이 그런 위험 사태였다.
다행이 현경의 경지까지 올랐던 내 완성된 정신과 이성이 신체를 통제해서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건 그녀의 매력은 사실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도 전부 진실이었다.
방금 내가 내뱉은 아부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그녀의 거짓말탐지기 안법에 진실로 걸릴 거라는 이야기였다.
“······.”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이 침묵했다.
내 말이 진실로 판명나니까 혼란스러운 거겠지.
면사로 가리지 못한 그녀의 귀와 목덜미가 붉어진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녀의 시중을 거절하셨습니까?”
“그것은······. 그대한테 마음이 없기 때문이요.”
나는 적사월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에 적사월이 흠칫 떨었다.
“마, 마음이라뇨, 소녀는······.”
“운우지락이란 사내와 여인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의 결정체이자 결과물이요. 정(情)을 통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마음이 통하는 남녀가 만나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눠야 음양의 조화가 극대화되는 법. 도가의 정통 수행인 방중술에도 지나치게 욕망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금욕도 하지 말고 중도를 지키라는 가르침으로 이를 전하고 있소. 하지만 소저께서는 나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채, 단지 나를 시험하기 위해 미염공을 사용하였으니, 사내대장부이자 방중술의 수행자로서 거기에 어찌 넘어갈 수 있겠소? 마음 없이 이지가 흐트러진 상대와 교합하는 것, 그것은 진정한 운우지락이 아니라 공허한 육체의 교합일 뿐이오.”
내 말에 적사월이 다시 침묵했다.
내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내 손을 스으윽 빼내면서 남은 차를 후루룩 마셨다.
“소저의 겉모습은 성을 기울게 할 정도의 미색을 지니고 있으나, 그 속마음은 박색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추하구려. 진정한 미인이란 내면이 아름다운 여인인 법. 내면이 아름답지 않은 소저의 외면적인 매력은 내게는 향기 없는 모란꽃처럼 공허하게만 느껴질 뿐이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몸이 떨렸다.
화면호검의 시험을 통과한 순간 그녀가 내게 호감을 품었다는 건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호감이 계속 이어진 건지, 아니면 집착으로 변질된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날 시험하려는 저 태도로 보아하니 높은 확률로 다른 끈적한 감정으로 변이된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미염공을 사용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면어플로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니.
내가 현경의 경지가 아니었더라면, 여기서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지 몰랐다.
내 의지에 반하는 운우지락이라니.
그런 건 올바른 색도라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의지로, 서로의 마음이 통한 상태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색도의 가르침이었다.
솔직히 실망했다.
“······그건······.”
“이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합시다. 내 부탁, 지킬 수 있겠소?”
변명은 더 듣기 싫다.
나는 적사월의 말허리를 잘라버리면서 책상 위의 서신을 스윽 밀어내며 말했다.
적사월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네. 소협께서 소녀의 무례를 용서하신다면야······.”
“용서하겠소. 대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적사월의 대답을 들은 나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찻잔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만남이었소. 그럼 이만, 갈 길이 바빠서.”
“······살펴 가십시오. 소협.”
적사월의 떨떠름한 배웅을 들으면서 나는 특실을 나서며 속으로 웃었다.
‘이제 판이 제대로 커지겠군.’
당문, 아미, 청성은 무조건 공증인으로 입회할 것이다.
거기에 하오문의 정보망을 빌려 이번 대결을 정파 전체와 사파 전체의 대결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게 만들었으니.
체면 때문이라도 다른 구파일방 육대세가 놈들 역시 감숙성에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팔문 역시 마찬가지고.
‘이렇게 판이 커진다면······.’
서문세가가 딴마음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건 물론이요, 당문과 청성 아미와 커넥션을 만들어서 비무 이후 서문세가의 암수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세가가 있는 난주는 감숙의 중심지이자 실크로드의 요충지.
그리고 사천은 중원에서 제일가는 비단 생산지이다. 사천에서 나는 특산품 비단인 성도촉금(成都蜀锦)이 경계를 넘어 감숙성 난주에 도착, 이후 돈황 등지의 실크로드 무역 거점을 따라 중동과 유럽으로 수출되는 것이다.
비단길 거점인 감숙과 비단의 원산지인 사천의 경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고, 자연스럽게 감숙성의 이권을 장악한 서문세가도 사천의 대문파인 청성, 아미, 당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 문파는 이미 흑룡방과 오랜 세월 동안 원한 관계로 얽힌 상태고, 흑룡방이 감숙성에 진출을 시도하는 건 사천 제패를 위한 대전략의 주춧돌이다.
그러니 이번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공동파가 세 문파 대신 흑룡방의 사천 제패를 좌절시킨 꼴이고, 세 문파는 공동파의 우군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문세가는 두 번 다시 공동파에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동파 재건이 청성, 당문, 아미의 지원으로 원 역사보다 더 빨라지는 건 덤이었다.
물론 이런 정치적 성과는 전부 부가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흐흐 신인의 데뷔 쇼케이스는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지. 동네 조기 축구 대회를 우승하는 것과 월드컵 우승은 차원이 다른 것처럼, 흑룡방과 공동파의 비무를 이기는 것과 정파와 사파 전체의 비무를 이기는 건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지니게 될 것이야.’
중원 전역에서 이 이철수의 의협심을 칭송하고, 정파의 이름난 미녀들이 밤새 멸마척사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협객 이철수의 용모를 떠올리면서 잠 못 이루고 가슴앓이하는 나날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공동파 본산에 나를 향한 풋풋한 연심이 깃든 미녀들의 팬레터가 무수히 흩날리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었다.
이제 남은 건 내 술수를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순진한 공동파 소년 제자 둘을 벗겨 먹을 생각만 하고 있을 진천검왕을 서문세가로 찾아가 티배깅하는 것뿐이었다.
*
이철수가 유진휘와 함께 자리를 떠난 뒤.
곤화루 2층 특실에 홀로 남겨진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근, 두근, 두근.
적사월의 풍만한 가슴 속에 있는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적사월의 머릿속에는 아직 이철수가 했던 말이 감돌고 있었다.
“향기 없는 모란꽃······.”
외면은 아름답지만, 내면은 추하다.
향기 없는 모란꽃과 같다.
남녀가 서로 정을 통하는 것이 진짜 음양의 즐거움이다. 정이 없는 관계는 그저 공허한 육체적 교합일 뿐이다.
60년 세월 동안 그녀가 그런 지적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정파의 꼰대 땡중인 신승(神僧)마저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인정했다.
천하제일미. 그 말대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 자체가 미염공과 섭혼술에 가까운 비합리적 외모를 지닌 그녀를 대면하고도 감히 내면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자는 없었다.
모조리 그녀의 외모에 홀려서, 외면도 내면도 완벽하다며 찬양하기 바빴으니까.
그녀를 요녀라고 부르는 정파 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면하기 전까지 온갖 욕설을 퍼붓던 자들이 만나자마자 미염공도 없이 홀리면서 그녀를 찬양하는 모습은 이미 수도 없이 겪어왔다.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사내를 전부 반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수준의,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미모를 보유한 적사월에게 있어 이철수의 말은 폭언이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두근, 두근.
제어할 수 없이 계속해서 뛰는 가슴, 가빠지는 호흡, 붉어지는 얼굴.
그의 손길이 닿았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손에도 가슴에도.
‘안 돼!’
적사월이 끊어질 듯한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았다.
안 된다.
이대로 마음을 내어줄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폭언까지 퍼부은 상대지 않은가? 여인을 배려하지 않는, 나쁜 사내는 싫다. 더욱이 얼굴이 그리 잘생긴 것도 아니니 더더욱.
게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데다가 사파의 수장인 자신이 정파의 소년을 마음에 두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적사월의 마음을 쉽게 내줄 수는 없지.
적사월은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집었다.
어쨌거나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제자야.”
적사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 속에서 하얀 가면을 쓰고 검은 무복을 입은 호리호리한 체형의 미남자가 솟아올랐다.
백면암군(白面暗君) 매지량.
적사월의 하나뿐인 제자이자 현 하오문주이며 경천십칠주 중 오사에 속하는 화경의 고수이자 동시에 남색(男色)으로 유명한 남색가였다.
그녀의 미모에 휘둘리지 않는 남색가. 그것이 적사월이 사내인 백면암군을 제자로 삼은 이유였다.
사내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반할 수밖에 없고, 여인은 그녀의 미모를 보는 순간 시기와 질투를 참지 못하니까.
역설적으로 사내이되 여인에게 관심 없는 남색가만이 그녀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예, 사부님.”
“이 서신을 서문세가를 제외한 구파일방 육대세가에, 서문세가의 눈길을 피해 전달해주도록 하여라. 그리고 서신이 도착한 직후부터 하오문의 정보망과 매담자들을 동원해서 이번 비무를 중원 곳곳, 모르는 이들이 없도록 소문내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이철수에 대한 감시는 유지할까요?”
백면암군의 말에 적사월이 침묵했다.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본 백면암군이 살짝 머뭇거렸다.
스승을 오래 모신 그였지만, 사부님의 저런 모습은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그리고 믿기 어렵겠지만.
그가 볼때 그 사부님, 천하의 모든 사내를 비웃던 그 사부님께서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부의 부끄러움을 대신 짊어지는 것 또한 제자의 일이었다.
백면암군이 입을 열었다.
“유지하겠습니다. 사부님의 지시사항을 전부 이행한다면, 공동파 제자인 이철수는 자연스럽게 천하의 이목을 끌게 될 테니, 그 이전부터 본문에서 주시하는 쪽이 맞습니다.”
“······그런 영락한 백도 문파의 제자 따위, 본녀는 딱히 별로 관심 없지만, 네가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정기적으로 보고서도 올리겠습니다.”
“그것도 알아서 하거라. 그런 보고서 따위, 본녀는 어차피 안 볼 테지만 말이야. 보고서를 버리는 수고가 하나 늘었구나.”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불초 제자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냐.”
백면암군이 탁자 위의 서신을 조심히 품에 넣고 특실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적사월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이철수 정기 보고서라니.
“제자 녀석 주제에 멋대로 굴고 말이야······.”
그런 서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종이는 귀한 자원이다. 그러니 버리기 전에 한 번쯤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고서를 기대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밤.
화정현 곤화루에서 전서구 여럿이 검푸른 밤하늘을 가로질렀고.
곧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 곳곳의 하오문 분타에 전영이 직접 쓰고 이철수가 전달한 공증인 입회 서신이 도착했으며.
도착한 서신은 표국 의뢰를 통해 출처 세탁을 거친 뒤 서문세가를 제외한 구파일방 육대세가 총단으로 전달되었다.
서문세가에 이철수와 유진휘가 도착했을 때 중원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