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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87화 (87/171)

87화 그녀의 저주

“흑, 히끅.”

이철수의 품에 안겨 울던 적사월의 눈물이 잦아들었다.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적사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보, 본녀가 지금 무슨 짓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적사월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계속해서 뛰기 시작했다.

적사월의 온몸에 이철수의 체온이, 옷 너머로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의 감촉이 느껴졌다.

망측하다.

46년이나 어린 소년의 품에 안겨서 소녀처럼 엉엉 울던 그녀의 모습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꼬옥.

적사월이 두 팔로 이철수를 안았다.

“······조, 조금만 더 이대로······.”

그와 만나지 못하는 지난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적사월은 그의 부재감을 절실히 느꼈다.

없으면 안 됐다.

전부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사과해서라도.

옆에 있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독점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게 해다오······.’

적사월은 뒷말을 삼켰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아직 무공에도 입문하지 않았던 시절에 어미가 이렇게 그녀를 안아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어미가 그녀를 창기로 팔아버리려 한 이후부터.

적사월은 타인의 체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포근했다는 말이더냐······.’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두근, 두근. 마치 잃어버린 어미새를 찾은 아기새처럼, 적사월은 이철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시는,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지금처럼 오랫동안 그와 멀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래, 다시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60년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흔들었다.

두근, 두근.

적사월이 눈을 감았다.

그의 체온, 온기, 감촉, 체취까지 전부 담아두고 싶었다.

그녀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전부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제 좀 진정됐나?”

이철수가 조용히 적사월을 떼어냈다.

“아······.”

그의 품에서 떨어질 때, 적사월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그녀가 눈물로 퉁퉁 부은 눈가를 소맷자락으로 슥슥 닦아냈다.

“······죄송해요. 가가. 소녀가 또 결례를······.”

한 번 해본 사과는 그다지 굴욕적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을 독점할 수 있다면 이깟 사과 쯤은 몇 번이고 할 자신이 있었다.

“괜찮아.”

이철수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얹어졌다.

스윽, 스윽.

또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적사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이 쓰담쓰담이었다. 이 감촉이었다. 가가가 그녀를 아낀다는 애정 표현이었다.

쓰담쓰담이 끝났다.

적사월이 눈을 내리깔았다.

겨우 만든 사과의 시간이었다. 겨우 만든 단둘이 있는 시간이었다. 폐가 보다 못한 공동파의 접객당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고급 장원보다 더 소중한 공간이었다.

“······소녀,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그러니 가가께서도······.”

“앞으로 일이 있을 때마다 종종 들르지.”

이철수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사파제일인 적사월 앞에서 감히 말허리를 자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같은 우내삼존인 천마, 신승마저도 그녀를 존중했다.

구주팔황이 모두 경외하는 현경의 절대고수가 적사월이었다.

이철수의 배분을 따지자면 그녀의 손주뻘.

이건 심각한 무례였다. 하지만, 그 무례에 적사월의 심장이 미칠 듯이 계속 뛰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가께서 세간의 시선을 피해 언제건 소녀를 만날 수 있도록 곤화루의 뒷문을 열어놓겠어요.”

적사월은 그녀의 가가가 원하는 바를 이제 알고 있었다.

가가께서는, 세인의 시선을 신경 썼다.

그러니 가가와 계속 만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아가 그분과 정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관계를 당분간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다.

‘아쉽지만······.’

아쉽다.

그분과의 관계를 과시하지 못하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적사월은 참았다.

과시하지 못하는 것보다, 그분과 만나지 못하는 것이 훨씬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때가 되면 종종 들르지.”

뒤이어 이철수의 대답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그녀가 처음으로 지어본,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고마워요, 가가.”

적사월의 감사 인사를 들은 이철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그날의 공동파 산행이 끝났다.

*

수레를 끌고 온 인부들은 이미 돌아간 상황.

향화를 마치고 홀로 공동산을 내려오는 적사월의 발길은 가벼웠다.

‘후후후. 가가께서 본녀의 주루에 들러준다 약조하였느니라.’

적사월의 머릿속에 오늘 있던 일이 재생되었다.

가가께서는 그녀의 사죄를 받아주셨다.

그리고 주루에 다시 들러주겠노라 약조하였다.

약간의 재물로 그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니.

기쁘다.

기쁘지 아니할 수 없다.

적사월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두근.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적사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직도 그분의 감촉이 온몸에 생생했다.

“으읏······.”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온통 이철수 생각뿐이었다.

그가 없는 세상이 싫었다. 그가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안 됐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본녀가······.’

탁.

적사월의 발걸음이 멈췄다.

우연일까? 그녀가 도달한 장소는 일전에 공동산을 내려오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그 냇가였다.

밤이 아닌 낮인 지금,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적사월이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인피면구를 벗겨냈다.

인피면구 아래에서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천하제일미.

찌푸리는 얼굴조차 아름답다는, 고금제일을 다투는 압도적인 미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번도 연심으로 붉어진 적 없는 그녀의 얼굴은, 누군가를 사모하는 소녀처럼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나, 나는······.”

평소에도 거울을 자주 보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런 표정도, 감정도 전부 처음이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천하의 본녀가······. 이런······.”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가 손을 치켜들었다. 붉은 강기가 손에 피어올랐다. 적사월이 수강이 피어오른 손을 그대로 냇물을 향해 내리쳤다.

쿠콰콰콰콰콰콰콰!

폭음과 함께 기파가 피어올라 주변을 휩쓸었다.

짹짹짹짹.

근처 새들이 혼비백산해서 날아올랐다.

엉망진창이 된, 흙바닥이 드러난 냇가에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이건······. 본녀가 아니야······.”

적사월의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래.

이건 내가 아니다.

46세나 연하인 소년에게 진심으로 연모의 마음을 품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능월향으로서······.

정파의 후기지수를 타락하게 만들기 위한 계책에 불과할 뿐이다.

“······본녀는······. 그 누구도 마음에 두지 않느니라······.”

적사월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

야밤을 틈타 숨어든, 짐승이 되어버린 사부의 목을 쳐냈을 때부터.

적사월은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도, 기대하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금까지 사내에게, 아니 인간에게 당한 상처가 수없이 많았다.더 이상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으흑······.”

그녀의 적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믿기 싫었다. 하지만 계속 떠올랐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그의 체온이, 그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감촉이 계속 떠올랐다.

마치 저주처럼.

심장이 통제를 벗어나 뛰었다. 몸이 그녀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기뻐했다. 얼굴이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붉어졌다.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하는데도······.

“······능월향이라면······.”

하지만 적사월이 아닌 능월향이라면.

······정인을 두거나,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줘도 괜찮았다.

그래.

어차피 능월향으로 하는 일이니까.

주섬주섬.

적사월이 품 안에 있던 능월향의 인피면구를 다시 뒤집어썼다.

사파제일인 염왕 적사월에서 사천제일기녀 염희 능월향으로 돌아온 적사월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본녀의 진짜 마음은······. 주지 않을 것이야······. 절대로······.”

그래.

절대로.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의 연심을 부정하듯 억누르며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중얼거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능월향으로밖에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찬 이철수를 지워내는 건 끝내 실패했다.

*

적사월을 돌려보낸 뒤.

나는 머리에 흐른 식은땀을 훔쳤다.

‘휴, 살았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만일 거기서 말 하나라도 잘못했다가는 그 즉시 적사월에게 납치당했으리라.

다행히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서 망정이지.

“사제. 기분 좋아 보이네.”

다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사형이었다.

매일 웃던 평소와는 달리 살짝 찬바람이 감도는 사형의 얼굴.

“······그러게요, 유 사형.”

옆에서 서하린이 불쑥 나왔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왠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도 이제 물러갔으니, 남은 수행을 해야겠지? 내년 경연을 대비해서라도 말이야.”“유 사형의 말이 맞아요. 이 사형.”

덥석.

유진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

나는 서문청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야, 전속 시비. 나 좀 도와줘.”

“흥! 싫어요!”

매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서문청하.

아니 오늘 다들 왜 이래.

그렇게 나는 유진휘와 서하린에게 끌려 대연무장으로 향했고, 평소보다 더 독한 수행을 강제로 겪어야만 했다.

아니 나에게 왜 그러냐고.

*

일과가 끝난 공동파 본산.

이철수가 한창 홀로 케겔과 젤크, 행잉을 포함한 야간 수행을 하고 있을 때쯤 접객당에 세 명의 소년소녀가 모여 있었다.

아직 흉가나 다름없는 접객당 깊은 곳에 은밀하게 모인 소년소녀 세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금발에 벽안이 인상적인 이국적인 미소녀 서하린.

의도치 않게 공동파의 시비 겸 인질 겸 식객이라는 미묘한 신분이 되어버린 서문청하.

그리고 공동파의 장문제자 유진휘였다.

“사매. 난 왜 여기로 부른 거야.”

“맞아요. 야심한 밤에 대체 무슨 속셈으로······.”

유진휘와 서문청하의 시선이 서하린을 향했다.

그렇다.

오늘의 회합을 주최한 사람은 서하린이었다.

아스라이 흔들리는 호롱불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에 텅 빈 벽안을 지닌 서하린이 차갑게 말했다.

“······두 분 다 추후 상황을 대비해야 된다는 생각은 없나요?”

서하린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늘 있었던 일이 재생됐다.

염희 능월향.

사천제일기녀. 차세대 천하제일미.

그렇게 꼽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과거에 이철수와의 추문이 돌았을 때부터 이미 수집해둔 서하린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능월향을 접한 서하린은 충격을 받았다.

검후 은설란.

그녀에게 사형이 고백했을 때도 서하린은 자신만만했다.

‘결국 사내들은 어린 여인을 선호하기 마련, 사형 역시 마찬가지야.’

그녀에게는 은설란에게 없는 나이라는 무기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검후와는 달리 사매라는 신분으로 매일 같이 붙어 다닐 수 있었으니, 사형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게다가 미모도 객관적으로 볼 때 은설란에게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서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색목인 혼혈을 싫어하는 중원인이 있다는 점이 변수였지만, 사형은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능월향은 달랐다.

그녀보다 한 차원 위의 미모와 20대라는 꽃다운 나이에 더해 공동산 아랫마을인 화정현에 있는 곤화루의 루주라는 직위까지.

중년인 검후와는 달리 언제건 이철수에게 접근 가능한 능월향은 모든 면에서 위협적이었다. 특히 오늘 처음 본 능월향의 미모는 서하린이 그녀도 모르게 경계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인세를 초월한, 천상의 선녀와도 같은 미모.

서하린 본인도 객관적으로 미소녀라고 생각했지만, 능월향에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인인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진데, 사내인 이철수의 생각은?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 혼자서는 안 돼.’

서하린은 깨달았다.

혼자서는 능월향을 대적할 수 없다.

이 사형의 곁에 머무를 수 없다.

그렇다면······.

아군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서하린이 유진휘와 서문청하를 불러낸 이유였다.

서하린의 차가운 눈길이 유진휘와 서문청하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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