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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90화 (90/171)

90화 능월향의 마음 - 삽화

그 연놈들만 아니었어도.

더 많이 그분과 밀회를 가질 수 있었다. 더 많이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더 많이 그분의 쓰담쓰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향매라고 조금 더 불릴 수 있었다.

향매.

그 애칭을 속으로 입에 담은 적사월의 얼굴이 빨개졌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가······.”

아무도 없는 곤화루 5층. 적사월이 이철수의 애칭을 불렀다.

“가가께서 향매한테 야명주를 팔아주셨어.”

적사월은 이철수가 판매한 야명주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 정도면 필시 사문에서도 애지중지하던 보물이리라.

사문의 보물. 가가의 보물.

보물의 매매를 맡길 정도로 그분에게 신임받았다. 그분께서 향매를 찾아주셨다.

“우리 사이라고 해주셨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우리 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사이다. 가가와 나 사이다.

다른 불여시들이 끼어들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세계다.

그 사실에 적사월의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가 떠올랐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파제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풀어진 표정이었다.

딸칵.

적사월이 기관장치를 작동시키자, 벽이 열리며 5층의 밀실이 드러났다.

밀실 안에 있는 건······.

벽에 붙은 이철수의 거대한 용모파기, 아니 초상화가 있었다. 용모파기 아래 탁자에는 지금까지 하오문에서 매일 이철수의 행적을 기록해서 올린 보고서들이 가지런히 책자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적사월이 소중하게 야명주를 올려놓았다.

“가가, 소녀의 가가. 향매의 가가······.”

적사월이 야명주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소녀는 반드시······. 가가의 마음을 쟁취할 거예요.”

어린 년이 아닌, 경륜과 관록이 넘치는 내가 반드시.

그분의 마음을 쟁취하겠다.

“그러니 언제나 소녀를 생각해주셔요.”

적사월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황홀한 표정으로 야명주를 쓰다듬으며 웃다가 멈칫했다.

“아, 아냐 이건······.”

그녀의 눈에 뒤늦게 밀실의 광경이 제대로 들어왔다.

커다란 이철수 초상화에 이철수의 행적이 적힌 보고서가 권 단위로 책장에 꽂힌 것도 모자라 그가 팔아넘긴 야명주를 애지중지하다니.

누가 봐도 이건······.

정인을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아닌가?

게다가 어린 소녀들을 그렇게 진심으로 질투······.

“아니야······. 진심이 아니야.”

적사월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진심이 아니다.

저건 초상화가 아니라 용모파기고, 그의 보고서를 모아놓은 건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다.

그래, 적사월의 마음은 주지 않았다. 나는 사내에게 진심이 된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또······.

그때처럼.

적사월의 머릿속에 오래전, 하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창살을 통과한 달빛이 아름답게 내려앉던 밤. 짐승이 되어버린 스승의 모습을, 그런 그의 목을 잘라낸 모습을, 손에 사부의 피를 묻힌 그녀의 모습을.

그녀더러 사부를 해친 패륜아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때의 일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다.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적안이 흔들렸다.

“······본녀의 마음은······. 아무한테나 내줄 수 없느니라······.”

그래.

지금의 이 흔들림도, 가슴의 고동도, 마음의 떨림도 전부.

능월향의 마음일 뿐이다.

적사월의 진심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는 61세 천하제일미 적사월의 마음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산서성 항산.

중원 오악 중 북악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구름 위에 우뚝 선 봉우리, 천봉령 위에는 구파일방의 일좌로 꼽히는 명문대파인 항산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항산파 본산.

장문인이 기거하는 전각인 월은각에는 검후가 있었다.

“이제 곧 경연이 시작된다. 항산파의 체면에 손색이 없도록 손님맞이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라.”

신비로운 은발과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20대로 보이는 새하얀 피부의 미녀.

검후 은설란의 지시에 그녀의 제자인 소검후 천소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사부님! 제자만 믿고 맡겨 주세요!”

소검후 천소빈이 호호호호하고 웃었다.

흑발과 은발이 뒤섞인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철수, 각오하세요. 이번 기회에 천하가 넓다는 사실을 당신한테 알려드리죠!’

감히 사부님을 노리는 이철수.

그를 공개적으로 망신줄 수 있는 경연날이 드디어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히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사부님께서도 분명 이번 경연을 기회 삼아 그 망나니 같은 색마 이철수에게 망신을 줄 생각인 거예요! 후후후후후! 소녀, 사부님의 지시를 따르겠어요!’

소검후뿐만이 아니었다.

항산파 전체가 감히 검후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철수를 향한 분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번 경연에서 그 타오르는 분노가 이철수를 향해 쏟아지리라.

소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를 취한 뒤에 전각을 나갔다.

전각을 나간 소검후는 항산파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구름이 자욱하게 낀 운해(雲海)와 항산을 이루는 절벽이 어우러진 항산파 대연무장에는 항산파의 장로와 일대제자, 이대제자, 삼대제자가 모두 운집해 있었다.

웅성웅성 떠들던 항산파 제자들이 소검후를 목격하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운집한 제자들 앞에 선 소검후의 발걸음이 탁하고 멈췄다.

“사부님의 지시를 받아왔어요!”

소검후의 말에 항산파 제자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소검후가 웃었다.

“사부님께서······. 경연 준비를 철저히 하라 명하셨어요! 이 말의 뜻이 무엇이겠어요! 바로 이철수와 그 공동파 일당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라는 의미겠지요! 일 년 전, 정사지쟁에서 중인환시리에 감히 검후 님께 건방지게 도전장을 던진 이철수······. 우리는 항산파의 제자로서! 사부님의 자매로서! 그들을 응징할 의무가 있어요! 이번 경연을 통해서 말이죠!”

소검후의 말에 항산파 제자들의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여기에 있는 항산파 제자, 아니 항산파의 모든 문도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전부 검후를 열렬히 동경하고 지지하는 여인들이었다.

본인을 이기는 사내만 지아비로 모시겠다. 본인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

아녀자답지 않게 당당한 포부를 내뱉은 검후를 동경하는 여인은 강호에 구름처럼 많았다.

그리고 그 많은 여고수 중에서 검후에 대한 동경과 지지가 투철하여 항산파에 입문까지 한 자들이 바로 항산파 문도였다.

“산서 무림, 아니 산서를 넘어 강호 무림 전체에 이번 경연을 널리 알리세요! 천하가 보는 앞에서 망나니 이철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자가 두 번 다시 사부님을 모욕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소검후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의 말을 듣는 항산파 여제자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를 제외한 항산파 문도 전원은 소검후의 말에 동의했다.

누구보다 검후를 동경하는 그녀들이었다.

이철수 같은 색마에게, 더군다나 다른 문파도 아닌 공동파 소속인 그가 감히 검후에게 도전을 신청한 건 검후의 체면은 물론 항산파 전체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소검후의 일장연설이 지나간 다음 날.

산서 무림에서 구주팔황으로 소문 하나가 발 없는 말과 같이 달려 빠르게 퍼졌다.

항산파에서 공동파와 항산파의 경연이 열린다.

이번 경연에서 이철수의 도전자 자격을 항산파에서 검증할 것이다는 소문이.

소검후가 퍼뜨리라 지시한 소문이었다.

거기에 소문이 계속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살이 계속 붙어나갔다.

“글쎄, 이번에 공동색협 이철수를 항산파의 여협들이 아주 벼르고 있다고 하네!”

“색협은 무슨, 쌍발색검이 아닌가? 도전자 자격 검증이라, 이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이네! 하긴. 검후 같은 여협께서 쌍발색검 따위에게 마음을 줄 리 없지!”

“그럼! 검후 님께서는 정파 무림의 명숙이자 모든 여협의 우상이 아닌가? 공동색협이 꾀를 내어 성년까지 도전을 미뤘지만, 결과는 같을 걸세. 이번에도 검후 님께서 쌍발색검과의 비무에서 가볍게 승리할 걸세!”

어느새 이번 경연은 세간에서 항산대전이라 불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후와 이철수가 들으면 뒷목을 잡을 만한 소문이었다.

*

탁.

소검후가 물러나서 문이 닫히고, 기감을 통해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검후가 은밀히 보관하고 있던 궤짝을 꺼내 열쇠로 열었다.

딸칵.

궤짝 안에는 일기장이 있었다.

검후가 일기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거기에는 상공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세필을 들어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채워 넣었다.

‘상공. 드디어 상공과 만날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어요. 상공······. 소첩은 요즘 상공이 오기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일 년보다 더 길게 느껴져요. 상공만 생각하면 소첩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져요. 소첩을 보러 빨리 오셔야 해요.’

일기를 쓴 검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일기장을 소중하게 풍만한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이 일기장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보물이자 상공과의 사랑의 증표였다.

‘소첩, 기다릴게요. 상공.’

빨리 보고 싶다.

연모하는, 단 하나뿐인 지아비인 그분을.

‘상공께서 내일 오신다면 소첩은 일 년 전부터 설렐 거예요.’

검후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날.

이철수와 공동산에서 헤어진 다음 날부터 검후는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며 상공을 생각했다.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그분을 생각했다.

보고 싶다.

그분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의 체취를 맡고 싶다. 그분을 저번처럼 품에 안고 싶다.

‘상공, 나의 상공. 얼마나 더 듬직하고 멋지게 자라셨을지, 소첩은 상공의 모습만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려요.’

성장기의 소년소녀는 해가 갈수록 놀랍도록 모습이 바뀐다.

그녀의 제자인 소검후도 올해 이팔청춘, 16세로 접어들면서 소녀보다는 여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상공 역시 올해로 15세에 접어들었으니 1년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으리라.

왜냐하면 검후의 상공도 성장기였으니 말이다.

더 멋지고 더 늠름한 모습으로.

‘소첩은 상공의 모든 모습을 사랑해요.’

물론 그렇다고 열네 살 소년이었던 상공의 모습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그분의 모든 모습을 검후는 사랑했다.

수행 도중 대물을 꼿꼿이 세우는 모습마저 검후의 눈에는 사랑스러웠다.

그분을 만나지 못한 지난 1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세간의 속설과는 달리 47세가 된 검후의 마음은, 그녀의 사랑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었다.

검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상공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철수 일행이 공동파를 출발하기 하루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

적사월에게 야명주 대금을 전표로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공동파 식구 전원은 공동산을 출발했다.

물론 공동파 식구라고 해봤자 사부와 사매, 사형, 그리고 서문청하와 나까지 다섯 명뿐이었기에 전원이라고 해봤자 규모는 작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공동파를 출발한 우리는 감숙을 지나 섬서를 거쳐 마침내 산서성 항산에 도착했다.

경연 시작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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