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손이 예쁘시네요
비동 내부는 전생과는 달리 어두웠다.
그 흔한 야명주 하나 박혀 있지 않은, 완벽한 어둠.이럴 때를 대비해서 챙긴 등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고 있기는 했지만, 동굴 바람에도 불씨가 흔들리는 미약한 등불로는 비동 전체를 밝히는 건 불가능했다.
기감이 없는 일반인이었다면 길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을 터. 하지만 나는 일반인이 아니라 회귀자였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1회차 시절 동창에서 분석한 검후비동의 모든 지리가 입력되어 있었다.
게다가 혈교에서 설치한 걸로 추정되는 각종 기관진식 함정이 있던 1회차 때의 검후비동과는 달리 지금의 검후비동에는 함정이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 비동을 공략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혈교의 고수가 함정과 기관장치를 전부 파괴한 탓이었다.
‘혈교 놈들이 도움이 될 때도 다 있군.’
물론 지금쯤 앞서가고 있을 혈교 고수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을 터이니, 뭔가 수작을 부려올 게 분명했다.
저벅, 저벅.
나와 검후는 어두운 동굴 안을 걸었다.
통로에는 인간의 손이 닿은 흔적이 있어 이곳이 검후비동임을 짐작하게 했다. 더불어 길을 나아갈수록 부서진 기관장치의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공. 시야가 어둡습니다. 혹여 은공께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되니······. 제 소, 손을 잡고 의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등불을 들고 얼마나 걸었을까.
옆에 있던 검후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손을 잡고 의지하라니. 하긴, 객관적인 내 경지는 일류따리에 불과하다.
화경의 고수인 검후가 보기에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이겠지.
게다가 사형 같은 남자도 아니고 미녀의 섬섬옥수를 잡는 것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검후 선배. 그럼 잠깐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검후가 겸양의 말을 내뱉었다.
스윽.
나는 자연스럽게, 최대한 남자답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검후의 손바닥은 여인답지 않게 굳은살이 많아 감촉이 거칠었다.
검후라는 별호에 오른 여고수, 여중제일검객답게 그동안 그녀가 수련해온 검로(劍路)가 고스란히 손바닥의 굳은살을 통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은공. 제 손이 많이 거칠어서······.”
옆에서 검후가 우물쭈물하면서 살짝 부끄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현대가 아닌 중세 무림 랜드.
이상적인 여인의 조건 중에 갸날프고 아름다운 손인 섬섬옥수(纖纖玉手)도 당연히 포함되는 시대다.
굳은살은 미인의 섬섬옥수와는 정 반대였다.
아무래도 검후도 여인이기 때문인지 이런 부분에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
흠.
여기서는 역시 여심 저격 멘트를 날리는 쪽이 좋겠지.
나는 그동안 동경을 보며 수없이 연습한 상남자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 앞장서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검후 선배의 이 손이야말로 그동안 여중제일검객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검후 선배가 그동안 닦아온 고행과 역경을 상징하는 손이니까요. 저 또한 한 명의 검객. 동경할 수밖에 없는 손입니다.”
“······.”
내 말에 검후가 침묵했다.
뭐지, 내 멘트에 반한 건 아니겠지?
“······가, 감사합니다. 은공······.”
뒤이어 검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워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선명하게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 이후 대화가 끊겼다.
하지만 검후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내 손을 구속이라도 하듯 꼭 옭아매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어둠 속을 걸었다.
탁.
곧이어 우리는 다시 멈춰섰다.
졸졸졸.
좁은 통로를 지나 나온 곳은 제법 거대한 공동.
그 가운데를 거대한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규모로 봤을 때는 작은 하천과 비슷할 정도.
지하수로 만들어진 강 위에 설치됐던 석조 다리는 이미 중간이 끊겨 있었다.
“······이 파괴 흔적······. 어쩐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본 파의 기록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혈강시의 흔적이군요.”
검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부서진 다리의 단면을 다른 손으로 만지면서 말했다.
“······혈강시가 나타났다는 건······.”
“혈교 아니면 마교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검후의 말에 맞받아쳤다.
강시를 다루는 문파는 천하에 단둘밖에 없었다.
신강 천산의 천마신교.
그리고 혈교다.
중원 무림에서 강시술은 황실에서 정한 금칙 사항. 이를 어기면 무림공적으로 지정된다. 국법을 밥 먹듯 어기는 사파도 강시 연구만큼은 하지 않는다.
마교는 강시를 다루기는 하지만, 강자존을 숭앙하는 마교에서도 강시술은 본신의 무력을 수행하는 게 아닌 타인의 무력을 빌리는 사술이라 여겨져 배척받는다.
그렇기에 강시를 대규모로 운용하는 세력은 오직 하나.
“······혈교······. 정말 그들이 나타난 것일까요?”
혈교뿐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흉수의 정체는 혈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말, 혈교가 난을 일으켰을 때 전대 검후님께서 베어 넘긴 혈교도 놈들의 시체가 시산혈해를 이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전대 검후님의 무덤을 도굴하여 안식을 방해하여 본 파에 모욕을 주리라 획책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이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검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이 강을 건너야겠습니다. 흉수가 우리의 진입을 눈치채고 길을 끊은 것이 분명합니다. 흔적을 보니 다리가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곧 흉수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은공. 하지만 다리가 끊긴 부분의 폭이 넓고, 강의 물살이 제법 거칠고 빠릅니다. 그, 그러니······.”
그녀가 내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검후가 양 팔을 벌렸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살짝 흔들렸다.
“······조, 조금 망측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게 안기십시오. 제가 은공을 안고 끊긴 다리를 건너겠습니다.”
또 안기라고?
나도 모르게 아까 그녀의 품에 안겼던 감촉이, 부드러운 살결의 향기가 떠올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싫은 건 아닌데. 또 양물이 날뛸까 걱정이었다.
아니, 여기서 거부하면 사내도 아니다. 양물 따위는 컨트롤하면 된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색도의 수행을 해온 게 아니었던가?
진정한 색도의 일대종사라면 세워야 할 때는 세우고, 세우지 말아야 할 때는 세우지 않아야 했다.
욕망의 주인이 되려면 우선 양물부터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색마가 아닌 색도의 일대종사. 충분히 내 몸을 컨트롤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심호흡하면서, 양물에 몰리는 혈류를 제어해서 발기를 억제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선배.”
“감사합니다. 은공. 다,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하면 안 됩니다.”
스윽.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나를 다시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그녀의 푹신한 살결과 풍만한 가슴의 감촉이 몸에 느껴졌다.
다리 아래로 모이는 혈류를 필사적으로 제어하면서, 나는 그녀의 몸에 밀착했다.
흐흐흐.
역시 이거지.
시야를 아래로 돌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범인은 물론 웬만한 무림인도 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된 다리 아래, 거친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검후의 말과 함께 귓가에 파공성이 들렸다.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친 순간.
타닥.
찰나의 시간 끝에 검후의 발걸음이 지하수 강 너머에 도달했다.
“도착했습니다. 은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가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어두운 동굴 안에서 그녀의 고월검이 투명한 은빛을 뿌리며 발광했다.
“······아무래도 불청객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녀의 고월검에 은빛 검강이 별빛처럼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타올랐다.
검후의 표정이 굳었다.
일류따리인 내 기감이랑 다르게 화경의 고수인 검후의 넓은 기감에 무언가 걸린 모양.
그녀가 나를 보호하듯 앞장섰다.
곧이어 내 기감에도 무언가 걸리더니, 검은 어둠 너머에 붉은 혈광이 반짝이며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시였다.
[······.]
혈강시 다섯 구가 어둠 속에서 우리를 발견하더니 빠르게 이쪽을 향해 돌격했다.
휘이이이이익!
파공성과 함께 달려드는 강시.
몸이 단단해서 검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줄 수 없다는 혈강시 다섯이 검후를 향해 달려든 순간.
그녀의 은빛 검강이 번쩍이며 어둠 속에 찬란한 은빛 궤적을 그렸다.
검후의 은빛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간악한 흉물 주제에 은공을 해치려 들다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검후가 진지하게 말하며 검을 휘두른 순간.
번쩍.
은빛 섬광이 일순간 검은 동굴을 환하게 섬광탄처럼 밝혔다.
가공할 기파가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섬광이 걷힌 순간, 눈앞에 갈기갈기 찢긴 혈강시였던 토막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검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낼 수 없는 혈강시 다섯 구. 절정 이상의 고수도 고전할 만한 전력을 한 번에 처리한 검후가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그녀의 검에 깃든 검강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검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내게 다가와 손을 꽈악 쥐면서 말했다.
“은공. 제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십시오.”
걱정이 깃든 은빛 눈동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시각.
검후비동의 심처.
“크윽?!”
털썩.
혈강시를 앞세워 함정을 뚫고 있던 주교가 입에서 피를 흘렸다.
그와 심령으로 이어진 혈강시 다섯 구가 단 일검에 처단당한 반동이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주륵.
주교의 한쪽 눈에 피가 흘렀다.
혈강시 다섯 구가 처치당한 순간, 그들이 보내온 적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검후······. 설마 검후가 직접 왔을 줄이야.”
상대는 검후였다.
무림에서 단 열일곱뿐인 화경의 절대고수. 초절정의 고수인 주교였지만, 화경의 고수를 상대로는 이 전력으로는 필패였다.
“빌어먹을······.”
주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항산파에 항마절학과 심향검이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게다가 비동에 있는 영약 역시 지존의 재림을 위해 필요한 귀물이었다.
이번 계획은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말로 바치겠느냐?]
그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혈마지존이었다.
혈마지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주교가 그 자리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행했다.
“혈마재림! 혈교천하! 만세! 만세! 만만세! 혈마지존을 뵙습니다!”
[네 목숨과 원기(元氣)를 전부 바친다면······. 본좌의 전력 일부를 네게 빌려줄 수 있겠구나. 혈령강신대법(血靈降神大法)으로 본좌의 힘을 빌려 미심유혼진(迷心幽魂陣)을 설치한다면 네 비천한 실력으로도 검후를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주륵.
주교의 양쪽 눈과 귓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고위 간부부터 말단 교도까지.
혈교의 모든 구성원은 혈교주와 심령으로 이어져 그에게 종속된 노예였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세간에서 우내삼존이라 치켜세우는 현경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무위가 입신(入神)의 경지, 생사경(生死境)에 이른 혈교주의 힘이 그를 가능케 했다.
혈교주는 교도에게 광천혈인대법(狂天血印大法)을 통해 힘을 빌려주고, 혈교도는 교주의 힘을 받아들여 본래 무위보다 한 수 더 높은 무공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대가를 바친다면.
혈교주의 전력 일부를 순간이나마 지상에 구현할 수 있었다.
혈교주는 지금 주교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혈교의 노예가 된 주교는 혈교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너한테 본좌의 재림에 일조할 수 있는 영광을 내리겠도다. 네 생명을 내게 바쳐라.”
부글부글 끓는 피의 연못 속.
혈교주의 눈이 핏빛으로 빛났다.
그가 심령을 통해 주교에게 말을 걸었다.
상처 때문에 동남동녀의 정혈로 만들어진 혈소(血沼)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혈교주에게 있어서 이번 계획은 중요했다.
[지존께 제 전부를 바치겠습니다.]
“좋다. 그럼 본좌가 힘을 빌려주겠노라.”
상황을 수습한 혈교주가 눈을 감았다.
“······본좌가 읽었던 천기가 흐트러지고 있군······. 누군가 자꾸 천기를 어지럽히고 있어······. 태평공주 말고도 본좌가 놓친······. 다른 변수가 있었던가······.”
혈교주의 낮은 목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부글부글.
동남동녀의 정혈과 영약이 뒤섞여 만들어진 추악한 혈소의 핏물이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