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하늘이 된 고자
나와 검후는 아무 말 없이 통로를 계속 걸었다.
혈강시 다섯 구 이후로 추가 위험 요소는 없었다. 하지만 검후는 그 점이 더 불안한 듯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경의 고수인 검후가 있는 이상 뭐가 와도 별로 위험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나와 검후 모두 잔뜩 긴장한 채로, 손을 꼬옥 맞잡고 얼마나 통로를 걸었을까.
[은공. 앞에서 적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내 귓가에 검후의 전음이 울렸다.
마침내 혈교 고수의 꼬리를 붙잡은 것이다.
스르릉.
검후가 검을 뽑아들었다. 검후의 고월검이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말은 없었다.
나는 기감과 내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로, 검후와 함께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이제 내 기감에도 적의 기척이 감지됐다.
내가 한껏 긴장한 채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그때.
“흐윽?!”
검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와 손을 잡고 있던 검후의 감촉과 체온이 멀리 사라졌다. 두통이 일어났다.
의식의 끈이 끊어졌다 다시 연결됐다. 눈을 뜨자 주변은 암흑천지였다.
“이건······.”
낯선 감각. 기감을 펼쳐봤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 공간의 정체를 나는 순식간에 파악했다.
“진법이로군.”
기문진이다.
그것도 정신에 간섭하는 고등한 환술이 포함된 환영진.
혼원비동에 펼쳐진 것과 같은 종류다.
차이점이라면······.
혼원비동의 환영진이 시험 용도로 만들어져서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면, 지금 이 환영진의 어둠은 끝모를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범인, 아니 일류의 고수라면 환영진을 접한 순간 정신이 그대로 파괴되어 실혼인이 되어버릴 정도의 위력이다.
세계를 집어삼킬 악의가 무한한 어둠 너머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날 상대로 환영진을 펼치다니.”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검후마저 순간 붙들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고등한 술법의 기예가 가미된 환영진이었지만, 나를 붙잡아둘 수는 없다.
이미 현경의 경지에 올라 소우주를 완성하고 심상무도를 구현한 내 정신은 고작 환영진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문제라면, 혼원비동 때처럼 빌어먹을 ‘그 게이 무공’을 다시 펼쳐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다시는 쓰기 싫었는데.
“엿 같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화경의 고수인 검후가 환영진을 파훼하지 못할 리 없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화경은 분명 대단한 경지지만, 현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처럼 아직 소우주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
환술에는 취약했다. 물론 같은 경지의 고수가 펼치는 환술이 아니라면 걸려들 가능성이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빌어먹을 환술의 수준이 화경의 고수가 펼친 환술과 대등해보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검후는 내 여자다.
그러니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킨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알파 메일의 자세니까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규화보전의 구결을 외웠다.
고고고고고고고고!
단전에서 현실에서는 있을 리 없는 음한지기가 폭주하며 온몸을 내달렸다. 익숙하지만 끔찍한 한기가 전신을 지배했다.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휘몰아치는 하얀색 냉기가 밤하늘의 별빛이 되어 오른손 다섯 손가락 끝에 눈꽃처럼 피어올랐다.
조기성강(爪氣成罡).
조법의 절대고수가 발현하는 강기가 악의를 품은 어둠을 환한 빛으로 밝히며 현현했다.
“조강(爪罡)이 뭐야, 조강이. 폼도 안 나게.”
무슨 제사상 위의 조기도 아니고.
환영진 안이라 다행이다. 이 빌어먹을 게이 무공을 쓰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일 일이 없으니.
이런 쓰레기 무공을 쓰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하남자라고 구주팔황에 소문이 나서 나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색협 이미지가 고정되는 건 물론이요, 흑심추귀 같은 쓰레기 별호도 따라붙겠지.
역시 무공은 검이다. 검섹남이야말로 강호 무림의 인기남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나는 속으로 게이 무공을 욕하면서 그대로 심상무도를 현실에 구현했다.
인지가 무한히 확장된다. 내 완성된 절대 정신, 소우주가 의념을 통해 현실화된다.
심상무도.
소우주를 완성한 무인이 현경의 경지에 오른 의념을 통해 본인이 도달한 심득의 궁극을 무도로 펼치는 기예.
세간에서는 심검이라 불리는 기예가 내 몸을 매개체로 지금 어둠 속에 현현했다.
쩌-저-저-정!
손가락의 조강을 중심으로 허공에 은백색의 강기가 균열처럼 뻗어나갔다. 내 몸 위에서 음한지기로 만들어진 거목이 자라났다.
[일편빙심]
이것이 내가 전생에서 도달한 무도의 궁극.
오직 환골탈태와 양물을 되찾기 위한 일념을 정련한 심득의 극의가 지금 손에 맺혔다.
나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어둠을 붙잡았다.
파-츠-츠-츠-츠-츠-츠!!!!
굉음과 함께 악의가 실린 어둠에 그대로 하얀 균열이 간다. 암흑이 얼어버린 순간, 나는 그대로 공간을 잡아 뜯었다.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공간이 찢어졌다. 그와 함께 무너지는 악의가 기감으로 느껴졌다.
좋아. 이 정도면 끝이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규화보전을 거두려던 그때.
[호오?]
저 멀리서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끔찍한 요력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그와 함께 머리가 지잉하고 울렸다.
두통이 올라왔다. 시야가 흔들렸다. 목소리만으로 내 정신을 뒤흔들 정도의 요력을 지닌 고수라고?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같은 현경의 고수라도 불가능하다.
설마.
[규화보전이라, 설마 태평공주의 끄나풀인가? 그 여자의 손이 여기까지 닿아 있었나.]
정체불명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이 변화했다.
[뭐 상관없지. 네가 누구건, 여기서 본좌의 손에 너는 죽는다. 변수는 제거해야 하니까.]
깨져가던 공간이 다시 재생됐다. 무너지던 어둠이 복구됐다.
그와 함께, 세계에 진언이 새겨졌다.
[흑뢰무한(黑雷無限)]
그건 들어본 적 없는 심상무도의 진언.
그와 함께 악의가 넘치는 어둠이 우레가 되어 내리쳤다.
번쩍.
흑광과 함께 굉음이 울렸다.
우르르르르르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온 세상을 흑뢰가 메웠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 상태로는 막을 수 없다. 나보다 높은 반열의 고수.
믿을 수 없지만.
생사경의 고수. 그 편린이 저 심상무도에 깃들어 있었다. 소우주를 넘어 의념으로 대우주의 섭리를 뒤흔드는 기파가 이 자리에 현현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버틸 수 없다. 검후도 버텨내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황상에게까지 흉수의 손이 닿아있을지도 몰랐다. 생사경의 절대고수가 황상을 위협한다.
‘황상······.’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따라 과거로 회귀한 황상이.
내 전부를 공유했던,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따랐던 황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여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귀한 뒤, 새로 인연을 맺은 유진휘를 포함한 공동파 식구들도 떠올랐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했다.
여기서 나서지 않는다면, 상남자라고 알파메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전부를 지킨다.
“이런 씨발, 이것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1회차의 나를, 말단 환관에서 3황녀의 보좌관으로, 동창 요원에서 동창 장인태감으로.
중원 역사에서 측천무후 이후 두 번째로 여인을 황제로 올린 환관.
조고, 십상시, 위충현을 무릎 꿇리고, 망탁조의와 호형호제하는 간신배.
황제로 추존된 조조의 할아버지 환관 조등과 맞먹는 업적을 쌓은 전설의 환관.
고금제일고자 사마천을 형님으로 모시는 내시.
환관 조직 스물네 아문을 총괄하는 사례감의 태감이자 양국공의 작위를 받은, 구천구백구십구세 삼창을 듣는 절대 권력자.
구석과 단서철권을 하사받고 황제 위에 군림했던, 왜국과 조선마저 천조에 망조가 들었다며 욕하고 문무백관부터 화전민까지 중원 만백성이 암탉이 울자 집안이 망하고, 고자가 진짜 황제라며 매일같이 손가락질하며 한탄했던 망국의 권신.
억조창생을 다스리는 천하의 중심, 대명제국을 사유화한 반역자. 하늘이 되어버린 고자.
황궁제일고수.
사례태감 이철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손이 순식간에 보들보들하게 변했다. 신체가 호리호리하게 변했다. 얼굴도 갸름하게 변했다.
입고 있던 의복이 환관의 관복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졌다. 지금까지 묵직한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던 대물이 사라졌다.
이곳은 정신세계. 그리고 나는 절대정신을 보유한 남자.
당연히 1회차의 나를 불러오는 것도 가능했다. 정신세계이기에 가능한 기적.
그리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다.
주륵.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이 개새끼가······. 생사경이고 뭐고 너는 뒤졌어. 씨발! 나는 반드시 너를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서 죽일 거야! 이 씹새끼가!!”
상남자다운 험한 입담.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입에서는 하남자처럼 가늘어진 사극 내시 모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끔찍했다.
다시는 고자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세계라도, 이 모습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아니라면 전력을 낼 수 없다. 익숙한 휑한 아랫도리의 감각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규화보전의 내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의념을 따라 한기가 깃든 은백색의 강기가 손가락 끝에 맺혔다.
[일편빙심]
심상무도가 현현한다. 음한지기로 이루어진 은백색 거목이 자라난다. 강기로 만들어진 나뭇잎이 맺히고 얼음으로 된 꽃잎이 피어난다.
솟아오른 거목이 그대로 흑뢰를 막아낸다.
콰-과-과-광!
얼음의 거목이 자라나 검은 하늘을 뒤덮었다.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도 본인이 직접 오지 않은 이상 원거리에서 술법을 통해서 사용하는 힘에는 제한이 있다.
그러니 전성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적의 힘이 한정된 상황인 지금에서는 내가 이길 수 있다.
비유하자면 아무리 강적이라도 손가락 하나로는 전력을 다하는 나를 막아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역으로 하자면 놈의 손가락 하나를 막기 위해 현경의 고수였던 내 전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나는 그대로 조강이 맺힌, 새하얀 섬섬옥수를 들어 흑뢰를 잡아 찢어발겼다.
쩌-저-저-저-정!
천하가 얼어붙는다.
곧이어.
콰-과-과-과-광!
폭음과 함께 의식세계가 무너진다. 저 멀리 어둠에 간 균열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보인 순간, 나는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
어두운 동굴 속 핏물이 끓는 연못.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오는 핏물 속에 잠긴 사내가 핏덩이를 토해냈다.
“쿨럭.”
혈교주였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혈교주의 눈에 핏빛 안광이 맺혔다.
그의 옆구리 한쪽 구석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동상이었다. 술법 실패의 반작용이 돌아왔다.
혈교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실패했다.
완벽하게.
이건 굴욕이고, 치욕이었다. 그 빌어먹을 어린 년에게 당한 것만 해도 수치인데, 이제는 정체불명의 신비고수라니.
“하늘의 뜻은 이미 본좌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생각했건만······.”
검후비동의 영약은 필요했다.
하늘에 올라 구주팔황을 지배하려면 영약이 필요했다.
영약과 동남동녀의 정혈을 통해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해서 이 비좁은 동굴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안 그래도 요 1년 사이에 자금성의 그 어린 여자가 동창을 동원해서 천하의 영약을 긁어모으는 짓을 해서 영약이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그런데 검후비동의 작전까지 실패하다니.
직접 나섰다면 촌각에 사지를 찢을 수 있는 상대였건만, 술법을 통한 불완전한 심상무도의 구현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황궁에 본좌가 모르는 고수가 있었던가······.”
혈교주, 아니 혈마는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이미 실패한 작전이다.
패배는 병가지상사.
모든 일에 일일이 분노해봤자 의미는 없다.
기다림은 익숙했다. 몇 번이고 계속 기다린다. 그렇다면 승리는 그의 것이다.
세월은 그의 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영약을, 더 많은 동남동녀의 정혈을, 더 많은 내단을 끌어모으면 될 일이다.
혈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혈소에 몸을 담그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고자 새끼가 감히 본좌의 대업을 방해하다니······.”
그래도 생각해보니.
멀쩡한 사내도 아닌 규화보전을 쓰는 고자 따위에게 당한 사실은 하늘에 닿은 혈마의 인내심으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철수를 욕하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비좁은 동굴을 웅웅 울렸다.
혈교의 검후비동 탈취 작전이 이철수의 눈물 어린 활약으로 최종 실패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