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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107화 (107/171)

107화 강호 독보행

“끄응.”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눈이 떠졌다.

가물가물한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오래 누워있었는데도 몸이 뻐근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쾌한 기분.

“사제! 일어났구나!”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사형이었다.

그가 침대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코 끝에 들꽃 향기가 스쳤다.

일어나자마자 본 얼굴이 사형이라니.

요즘 왠지 운수가 좋더라니.

“······정말 많이 걱정했어······. 사제······.”

사형이 훌쩍였다.

그의 눈물이 또 내 가슴팍을 적셨다.

사내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형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네, 일어났습니다. 사형. 그런데 제 옷은······.”

그러고 보니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 있었다. 물론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서 임독양맥이 뚫려서 노폐물이 새어 나와 옷을 갈아입힐 필요가 있기는 했을 테지만.

대체 누가 옷을 갈아입혔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형을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래, 이 정도면 남자 치고는 오래 안고 있었다.

사형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사제 옷 말이야? 내가 새 옷으로 갈아입혔어. 나는 사제의 사형이니까!”

그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을 들었다.

“······저는 얼마나 쓰러져 있었습니까?”

끔찍한 기억을 잊고 싶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내 말에 사형이 말했다.

“오늘로 딱 사흘째야. 사제. 몸은 좀 어때?”

나는 사형의 말에 눈을 감고 체내를 관조했다.

쓰러지기 전에는 제법 심각했던 내상은 이미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다 나았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야. 사제. 아프면 안 돼.”

사형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사문에 별 일은 없었습니까?”

“그거 말이지······. 우선······.”

내 말에 사형은 호구답게 친절하게 내가 쓰러진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건 검후비동.

나와 검후가 찾아낸 검후비동의 존재는 곧바로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검후비동에서 발견된 검각의 절학과 심향검은 엄중한 보안 속에서 항산파 본산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혼원검제의 후인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검후와 서문청하를 제외한 공동파 식구들 이외에는 함구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세간에는 내가 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검후비동을 발견한 뒤, 검후에게 보고한 이후 단둘이서 비동을 공략했다고 되어 있었다.

“······사제가 검후비동을 찾아낸 덕분에 항산파는 사제를 은인의 예로 대하기로 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혈교 관련 정보는 대외에 알리지 않고 검후가 직접 은밀하게 무림맹 직속 첩보기관인 천안각에 전달하기로 했다.

하긴, 혈교의 스파이가 언제 어디에 숨어 있을지는 회귀자인 나도 모르는 정보.

이럴 때는 공개적으로 혈교가 돌아왔다고 선포하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다.

스파이들이 숨거나, 꼬리 자르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무협소설식 표현으로 하자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비공개로, 은밀하게 꼬리를 찾아 몸통까지 한 번에 삭초제근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검후가 그 정도 판단력은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오늘 전대 검후님의 다비식을 거행하기로 했어.”

마지막으로

다비(茶毘). 불교 승려의 화장식을 뜻하는 말이다. 원칙적으로는 승려의 장례만 다비라고 부르지만, 이후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신자들도 다비장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항산파는 원래 불교 재가 문파.

게다가 구대문파의 일원에다 전대 검후는 혈교와 맞서싸운 영웅이기도 하니 다비로 예를 치러 장례를 해주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사제. 절정의 경지, 돌파했지? 대공을 이룬 걸 축하해.”

사형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대공이라고 할 만한 성취는 아니지만 뭐, 칭찬받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

“아닙니다. 아직 사형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성취일 뿐입니다.”

“아니야. 나도······. 아직······. 부족해. 사제를 지키려면······.”

내 겸양의 말을 들은 사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이 본인의 바지를 꽈악하고 잡았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왜 분위기 잡고 그래.

“그러니까. 사제. 나는······. 결정했어. 홀로 강호행을 떠나서 무림에서 실전 수행하기로. 용봉지회가 열릴 때까지.”

사형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살짝 감도는 게 보였다.

홀로 떠난다고?

“이미 사부님께 말씀은 드렸어. 사제가 일어나면······. 전하려고 했어. 이번 강호 독보행에서 사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좀 더 강해질 거야. 그래서 사제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형이 될 거야.”

사형이 눈물을 살짝 훔치면서 말했다.

갑자기 혼자 1년 동안 중원을 떠돌겠다니. 뜬금없다.

걱정되는데. 잠깐, 걱정?

‘내가 미쳤, 아니야. 사형이 얼마나 호구 같고 순진한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사형의 성격은 호구 그 자체. 그런 사형의 강호 독보행을 내버려둔다?

어디서 코라도 안 베이면 다행이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기분이 이런 걸까.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했다. 사형이 공동파에서 무사히 자라서 검성이 되어야 나도 천하제일인 코인 대박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사형. 괜찮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사형은 제게 자랑스러운 사형입니다. 강호 독보행은 위험합니다. 최소한 저라도 함께······.”

내 말에 유진휘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아냐. 나도 이제 이팔청춘이니, 홀로서기를 할 나이야. 마음은 고, 고맙지만······. 혼자 다닐래.”

유진휘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지내서 알았다. 저런 표정을 한 유진휘는 막지 못한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저렇게 옹고집인 건지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위험하면 언제건 하오문을 통해 제게 연락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사형이 배시시 웃었다.

뭐. 재능이 재능이니까,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거다.

그래. 사형 말이 맞다. 언제까지고 내가 뒤치닥꺼리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홀로서기도 할 만하다.

미운 정이 들어서 그런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괜찮겠지? 천무지체니까?

사형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여간, 누가 미남 아니랄까 봐 더럽게 잘생겼다. 이거 강호행 하다가 나보다 먼처 삼처사첩을 이루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사촌이 미래 신도시 개발 예정지를 헐값에 사들인 기분이 들어 배가 살살 아파지던 그때.

드르륵.

“사형. 괜찮으십니까?”

문이 열리면서 백금발 미소녀가 들어왔다.

서하린이었다.

“공자님. 흥. 괜찮은 거 맞죠? 따, 딱히 걱정한 건 아니고 그, 그냥 그런 식으로 누워있으면 쓸데없이 신경 쓰이니까요!”

서하린의 뒤에서 서문청하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일어나셨군요. 공자님.”

마지막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검후 천소빈이었다.

그녀의 흑발-은발 투톤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녀가 내 손목을 자연스럽게 붙잡으면서 말했다.

“아니, 은공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본 파의 숙원을 은공께서 해결해주셨다고요. 하해와 같은 대은을 입었습니다. 본 파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천소빈이 내게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녀의 뺨이 살짝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내가 항산파의 은인이 된 이상, 이제 더 견제하지 못하겠지.

소검후뿐만이 아니다.

검후 팬클럽인 항산파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도전을 반대할 수도 자격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사문의 숙원을 이뤄준 은인이다. 검후의 배필로는 차고 넘친다 이거다.

후후후.

이래서 회귀자가 사기인 거다.

내가 속으로 상남자의 웃음을 짓고 있던 그때.

덥석.

천소빈이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소녀, 은공한테 또 한 번 반하고 말았어요. 소녀가 마음에 품은 사내가 사문의 은인이라니, 이 무슨 하늘이 내린 운명일까요? 소녀. 사문의 은인인 은공께 반드시 시집가고야 말 거예요.”

천소빈이 애절한 목소리로 내 손을 잡고 연기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짜 믿을 정도로 절절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범인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북경 조정의 문무백관을 기만한 연기 천재.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뛰어넘은 전설의 명배우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내게 천소빈의 연기는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처럼 어설프게만 보였다.

따악.

나는 천소빈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 아얏!”

“연기 연습 좀 더 해라. 그게 뭐냐.”

“······으, 은공. 너무해요······. 소녀는 그저······.”

내 말에 천소빈이 이마를 문지르면서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그때.

드르륵.

문이 다시 열렸다.

“흠흠.”

곧이어 익숙한 헛기침이 들려왔다.

공동파 장문인. 전영이었다.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어났느냐?”

“예, 사부님.”

“몸 상태는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구나.”

“사부님과 사형, 사매가 신경 써준 덕분입니다.”

“검후 님께서 너를 불렀다. 월은각으로 가보거라.”

전영이 짧게 내게 전언을 남겼다.

검후가 나를?

“만나면 검후 님께 감사 인사를 하도록 하거라. 검후 님께서 네게 공청석유를 먹이셨으니······.”

전영이 뒤이어 말했다.

설마 그 영기가 공청석유의 영기였단 말인가?

공청석유.

천지간의 영기가 물에 녹아 만들어지는 영약으로 한 방울에 십 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절세의 영약이다.

무협에서는 인형설삼 같은 설삼 종류와 천년하수오 같은 하수오 종류와 함께 뻔질나게 나오는 보급형 영약이기도 하다. 극음의 기운만 모인 미타성수와는 다르게 음양의 밸런스가 잘 맞는 평범한 영역이기도 하고.

검후비동의 영약이 공청석유인데, 그걸 나에게 먹였다니.

덕분에 내상도 치료하고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기는 했지만, 검후로서는 내게 제법 큰 지출을 한 셈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부에게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 영약을 먹여줬다면 고마워하는 게 맞다.

물론 전생에서는 공청석유를 물처럼 마셨지만, 이번 생은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처소에서 나와서 곧바로 월은각으로 향했다.

아까 유진휘에게 들었던 경연이 중단되었다는 말은 사실인지, 항산파 본산 분위기는 내가 깨어났을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다비식 준비 중이라 그런지 엄격 진지 근엄한 분위기.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본산을 가로질러 마침내 월은각에 도착했다.

“이 소협이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월은각 입구에는 미리 기별을 받은 것인지, 항산파 제자 한 명이 서 있다 나를 맞이하며 검후 집무실까지 나를 안내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은빛 눈동자의 묘령처럼 보이는 미녀.

검후였다.

“어서 오십시오. 은공.”

검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 순간.

번쩍.

뇌리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심상이 떠올랐다. 검후와 내가 키스를 하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것도 그냥 키스가 아닌, 서로 혀를 뒤섞는 딥키스 장면이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기억이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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