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갈(喝)! - 삽화
“제가 누군지 물어보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번쩍.
신승의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타올랐다.
천안통(天眼通).
신승이 현경의 경지에 오르고 상단전을 타통하며 얻은 영능(靈能).
불가(佛家)에서 해탈에 이르면 얻는다는 여섯 신통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삼라만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투시에 영안을 합친 것과 비슷한 능력.
지금 신승은 천안통으로 내 혼백을 보고 있으리라.
물론 현경의 고수라도 아무나 천안통을 얻는 건 아니다. 오직 불가 정종 무학을 통해 돈오(頓悟)하여 상단전을 타통한 고승(高僧)만이 천안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강호 무림에서 천안통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신승뿐이다.
안타깝군, 내게 천안통이 있었다면······. 후후.
“저는 혼원검제 선조님의 전인(傳人)입니다.”
“갈(喝)! 역천명의 기운을 달고 다니면서 감히 검제의 후인을 자처하다니, 지금 노납을 능멸하는가!!”
내 말을 들은 신승의 입에서 내력이 실린 사자후(獅子吼)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정순한 불가의 내력이 달마동을 휩쓸었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몸을 조여왔다.
“쿨럭!”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현경의 고수가 진심을 다해 해방한 기도다. 정신이라면 몰라도 아직 내 육체는 버티기 힘들다.
좋게좋게 말로 해결하려고 했더니.
신승이 화경의 고수였던 시절의 별호는 활염라. 염라라는 별호대로 성정이 불같고 다혈질인 사내였다.
현경이 되어서 신승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성질이 좀 죽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 상상 이상으로 꽉 막혔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다.
“어서 정체를 말하지 못할까! 혈교의 주구가 아니라면 역천명의 기운을 혼백에 품을 리 없을 터! 그래도 버틴다면, 내 오늘 네게 징벌을 내리리라!”
두둥실.
가부좌를 튼 신승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불상처럼 찬란한 황금빛 광채로 휩싸인 신승이 오른손은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취한 순간.
[무시무종(無始無終)]
의념의 진언이 세계에 새겨졌다. 그와 함께 황금빛 내력이 번쩍이며 세계가 뒤집혔다. 달마동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눈앞에 놓인 건 칠흑과도 같은 검은 어둠.
거기에 길이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외길의 끝에는 신승이 있었다.
가부좌를 취한 신승의 타오르는 눈길이 이쪽을 향했다.
무시무종.
신승이 소림칠십이종절예를 모두 대성하여 돈오(頓悟)한 끝에 도달한 끝에 깨달은 심상무도.
천지회의 수장답게 그 공능은 철저히 항마(降魔)에 특화되어 있었다.
마(魔)란 수행자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음에서 자라나는 악귀. 따라서 적을 정신세계로 끌여들이거나 현실에 항마의 심상을 진의 형태로 구현해 항마의 법력으로 마(魔)를 소멸시키는 심상무도가 무시무종이었다.
지금 신승이 펼친 건 현실에 진법의 형태가 아닌, 상대를 정신세계로 끌어들이는 형태로 펼친 심상무도.
하긴 무시무종을 현실에다 펼쳤다가는 달마동이 무너질 게 뻔한데, 평생을 소림에 몸담은 신승이 소림의 성지를 부술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신승의 패인이 될 것이다.
끝없는 칠흑 위로 무한한 우주가 떠올라 펼쳐졌다.
검푸른 공간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과 성운 은하수가 무량대수(無量大數)만큼 반짝였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의 중심에는 신승이 있었다.
“네 본모습을 보니 과연 역천의 힘을 받아들였구나.”
신승의 말이 세계에 울린 순간.
나는 무언가 아랫도리가 허전함을 느꼈다.
잠깐? 허전하다고.
반사적으로 손을 아랫도리로 넣었다.
묵직한 존재감이 없었다. 지금까지 애써서 키워온 대물이 사라졌다. 복장도 달라졌다. 공동파의 흑의 무복이 아닌 환관 복장이 몸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환관 복장 너머, 내 그림자에 끈적한 핏빛 사기(邪氣)가 달라붙어 있었다.
아마 저것이 신승과 혼원검제가 봤다던 역천의 기운이겠지.
신승의 천안통 때문에 혼백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 모양.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어떻게 되찾은 양물인데! 감히 날 강제 1회차 고자 내시 모습으로 돌려놓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호호호호, 제게 이런 모습을 취하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군요.”
입에서 가느다란 사극 내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끔찍했다.
규화보전을 운용했다. 극성에 이른 규화보전의 내력이 의념에 반응해서 전신을 휘돌았다.
온몸에 하남자스러운 극음진기가 차올랐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 새하얀 강기가 별빛처럼 맺혀 뾰족한 손톱 형상을 갖춘다.
구화음백조의 강기가 심상세계에 현현했다.
현실이라면 몰라도 정신세계로 날 끌어들인 건 신승의 실수다. 하지만 신승은 전생의 나보다 한 수 높은, 현경의 끝자락에 이르러 생사경의 벽을 마주한 절대고수.
봐주는 건 없다. 일수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의념이 일어났다. 규화보전이 반응했다. 심상무도가 펼쳐졌다.
[일편빙심]
의념의 진언이 세계에 새겨지며 새하얀 눈꽃으로 이루어진 거목이 등 뒤에서 자라났다. 음한지기로 이루어진 꽃이 피어올랐다.
1회차의 내가 쌓은 무학과 심득의 총체가 한 그루 거목으로 이 자리에 현현했다.
눈꽃이 흩날리며 무시무종의 우주를 얼렸다. 나는 손을 들어 그대로 공간을 잡아 찢었다.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스파크와 함께 공간이 깨지면서 무섭게 얼어붙은 우주의 파편이 그대로 신승의 코앞에 도달한다.
“역시 혈교의 주구답게 숨겨둔 비열한 한 수가 있었구나.”
하지만 신승은 여유로웠다.
“허나 이 정도 잔재주로는 빈승을 막을 수 없으니.”
신승이 검지를 치켜든다. 황금빛으로 물든 그의 손가락이 튕긴 순간.
번쩍!
빛이 일어나며 일편빙심이 만들어낸 우주의 빙산이 순식간에 녹아 가루로 승화해 사라졌다.
탄지신통(彈指神通).
손가락을 튕겨 지풍으로 바위를 꿰뚫는다는 소림사의 상승 지법이 이 자리에 현현하며 일편빙심의 음한지기를 파괴했다. 번쩍! 다시 황금빛 섬광이 빛났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가공할 내력이 회오리치며 신승의 오른쪽과 왼쪽 옆에 각각 네 개, 총합 여덟 개의 황금빛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승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다리 밑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연꽃 대좌가 솟아올랐다.
연대구품(蓮臺九品).
소림 무학, 아니 불가 정종 무학의 정점에 이른 최상승 절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극락정토에 있는 아홉 가지 연화대의 형상을 구현한, 몸을 아홉 분신으로 나누어 아홉 무학을 동시에 펼치는 소림 비전 최상승 절학이 신승의 몸에서 펼쳐졌다.
아홉으로 분열한 신승이 제각기 다른 아홉가지 초식을 뿌렸다. 항마법력이 깃든 황금빛 강기가 유성처럼 무시무종의 우주를 가르며 내게 쏘아졌다.
“갈!”
신승의 사자후와 함께 쇄도하는 아홉 줄기의 강환을 보면서 나는 강기의 손톱이 자라난 양 손을 치켜들었다. 얼음의 거목에서 피어오른 눈꽃이 다시 공간을 얼렸다.
음빙잔멸(蔭氷殘滅)
열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하얀 강기가 서리와 함께 공간을 얼리며 끝없이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보이지 않는 손톱처럼 끝없이 분열한 조강이 강철의 비처럼 연대구품의 강기를 향해 쏟아졌다.
구화음백조의 최후절초, 음빙잔멸의 강기가 연대구품의 강기와 만난 순간.
콰-과-과-과-광!
힘의 충돌과 함께 기파가 무시무종의 우주를 뒤흔들었다.
“커헉!”
입에서 핏덩이가 흘렀다. 서로가 전력을 다한 일수의 교환에서 패배한 건 나였다. 연대구품의 항마법력이 깃든 황금빛 강기가 규화보전의 음한지기를 모조리 파괴하며 내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쇄도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신승은 전생의 나보다 더 강한, 생사경의 벽을 마주한 절대고수.
현경의 경지에 이르러도 양물이 자라나지 않아 무공 수행을 포기해버린 나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닌 노괴다.
“호호호호, 이런 씨발······.”
황금빛 강기의 파도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대로면 죽는다. 정확히는 혼백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정신세계의 대결에서 패배한 자들의 말로는 결국 실혼인이 되는 것뿐이니까.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막아야만 했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아직······.
“아직 섹스도 못 해봤는데······!! 이 빌어먹을 다혈질 동안 땡중이······!”
양물을 되찾고 케겔 운동, 젤크 운동, 행인 운동으로 단련한 내 아름다운 대물을 아직 사용도 못 해봤는데!
삼처사첩은커녕 한 명의 처도 못 만들었는데!이대로 죽기는 너무 억울하다!
내가 뭐라도 해보려고 팔을 치켜올린 순간.
번쩍.
섬광과 함께 눈앞에 환영이 떠올랐다.
[이것이 혼원무극도. 음양전도의 묘리를 대우주에 펼치는 공동파 무공의 극의일세.]
그건.
혼원비동에서 혼원검제가 내게 보여준 혼원무극도의 모습.
그와 함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구결이 떠올랐다.
이합신공의 구결은 이미 외우고 있다. 하지만 이건······.
설마.
‘혼원검제 이 양반이 내 머릿속에 쑤셔 박았던 건가?’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혼원검제가 남긴 비급이 고작 이합신공일 리가 없었다. 이합신공이 공동파의 최상승 무공이자 혼원검제의 독문무공이기는 했지만, 공동혈사 전의 공동파에는 멀쩡히 이합신공의 비급서가 남아 있었으니까.
공동혈사가 아니었더라면 이합신공의 맥이 끊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동파가 멀쩡했다면 이합신공은 계속 장문인과 장문제자에게만 전승되는 최상승 절학으로 남았으리라.
그러니 이합신공의 비급서는 분명 귀중한 물건이었지만, 그의 전인에게 남기는 물건은 아니었다.
진짜 혼원검제의 절학은 따로 있었고, 그는 본인의 독문절기인 혼원무극도의 구결을 내 무의식의 영역에 쑤셔 박았던 것이다.
‘단순히 이합신공을 대성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혈교의 위협에서 본인의 독문절기를, 나아가 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혼원검제는 본인의 진짜 진전을 숨겼다. 전인인 내 머릿속에.
내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이제 깨달았느냐? 한숨이 나오는구나. 어쩌다 이런 놈이 내 전인이 되었을꼬.]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원검제였다.
스으으윽.
곧이어 내 옆에 흑의 무복을 입은, 근육이 탄탄한 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혼원검제의 잔류사념이었다.
그래.
이제 이해가 간다. 혼원검제의 잔류사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진법에 설치된 술법을 통해 전인인 내 무의식 세계에 깃들었던 것이다.
“혼원검제님?!”
혼원검제의 모습을 본 신승이 당황했다. 그의 의념이 흐트러지자 황금빛 물결도 함께 흐트려졌다.
[못난 전인 놈 같으니. 잘 보고 똑똑히 기억해두거라.]
혼원검제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내 몸과 합쳐졌다. 혼원무극도의 구결이 머릿속을 울리자, 자연스럽게 소양심법의 양기와 규화보전의 음기가 함께 치솟았다.
폭발적인 음양이기가 몸안을 휘도는 순간, 혼원공이 일어나며 음양이기를 통제했다.
[이것이 네가 이번 생에 나아가야 할 길이니라.]
혼원검제의 말이 마지막으로 울린 순간.
오른손에는 하얀 양기가, 왼손에는 검은 음기가 맺혔다. 오른손이 하늘을, 왼손이 땅을 가리키다 그대로 뒤집혀 역태극을 그린다.
그와 함께.
천지가 뒤집혔다. 힘의 방향이 역전됐다. 황금빛 강기의 통제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당황한 신승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눈을 감았다. 내 의념이 무시무종의 우주를 장악한 순간.
나는 내 통제 아래 들어온 항마법력의 강기를 공간 전체로 퍼뜨려 신승의 심상무도가 구축한 이 우주를 깨뜨렸다.
소우주의 심상이 대우주의 섭리를 바꾸고 뒤흔든다. 삼라만상의 법칙이 어긋난다. 세계가 무너진 그때.
번쩍.
섬광과 함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달마동 속 흔들리는 촛불과 달마대사의 석상이 보였다.
내가 마신 맛없는 녹차가 담긴 찻주전자도, 빈 찻잔도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신승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뺨을 꼬집었다.
고통이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바지춤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물은 그 자리에 잘 붙어 있었다.
대물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확실히 현실로 돌아온 게 맞다.
내가 혼원무극도의 힘으로 심상무도를 깨뜨린 것이다.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순간.
“쿨럭!”
눈을 감고 있던 신승이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냈다.
심상무도가 강제로 깨진 반작용이었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떠졌다.
신승의 눈에 감돌던 황금빛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후우······.”
신승이 심호흡했다. 내상을 수습하는 모양.
나는 몸을 관조했다. 내상은 없었다. 혼원검제 덕분인 모양. 무의식의 영역에 숨어있던 혼원검제의 잔류사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펼쳤던 혼원무극도의 감각도 꿈처럼 가물가물했다.
현경에 이른 내 정신으로도 그때의 감각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도.
그가 내게 보여준 건 생사경의 경지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혼원검제가 남긴 혼원무극도의 구결은 머리에 또렷히,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똑똑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혼원무극도는 혼원무극도고.
“이보쇼.”
탁.
나는 다탁을 쳤다. 신승이 나를 바라봤다.
“아미타불.”
그가 반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당신도 아까 봤지? 우리 선조님. 내가 혼원검제 그분이랑 말이야, 밥도 먹고! 목욕도 하고! 다 한 사이야! 그러니까 엄한 사람 혈교 따까리로 몰아갔으면 보상을 해야지. 신승 양반.”
그러니까.
좋게 말로 해결하면 얼마나 좋아.
우선 소소하게 일단 대환단부터 좀 뜯어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