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나는 검성(劍聖)이 될 거야!
백일도 천일창 만일검.
만병지왕이라고도 불리는 검(劍)은 강호 무림에서 가장 인기 많은 무기다. 사실 단순히 병기의 우위만 따지자면 베기도 되고 찌르기도 되는 폴암이야말로 냉병기의 제왕이다. 실제로 황군에서는 장병기를 다수 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창을 비롯한 장병기는 위력이 강력하고 리치를 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길고 무거워서 휴대가 불편하다.
반면에 검은 휴대가 편하고 언제 어디서나 즉시 뽑아서 휘두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더욱이 이세계 중세 명나라에서 장병기는 군사용 무기. 현대로 치자면 K2자동소총 같은 병기다.
민간인들이, 특히 무림 문파 같은 데서 단체로 창을 운용하다가는 너 혹시 역모 계획 중이니? 라고 꼬투리 잡히기 딱 좋았다.
아무리 관무불가침의 묵계가 있다지만, 역모를 봐줄 정도로 황실이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검이야말로 강호 무림의 만병지왕이다. 게다가 현실과는 달리 강호 무림에는 무공과 내공이 존재했다. 당연히 검이 자주 쓰이니, 무공도 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상승절학의 숫자만 따지면 검공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러니 검이 만병지왕이라는 건 적어도 이세계 중세 무림에 한정해서는 팩트였다.
그 만병지왕을 마스터한 남자라면?
‘당연히 강호 무림 제일의 인기남이겠지.’
천하제일검에게만 주어진다는 검성의 별호. 전생에 검섹남의 정점에 오른 사형에게 수많은 러브레터가 쏟아졌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검성(劍聖)이 될 것이다.’
전생에 사형이 달았던 별호를 이번에는 내가 달 것이다.
하지만 한 번에 검성의 별호를 달 수는 없다. 단계적으로 밟아서 올라가야 했다. 그 시작이 바로 검룡(劍龍)이다. 검룡에서부터 검절(劍絶), 검왕(劍王), 검존(劍尊), 검제(劍帝), 검성(劍聖)까지 별호를 레벨업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룡의 칭호를 달아야 했다. 그리고 정파제일검가 남궁세가의 대공자를 검으로 꺾는 것만큼 파급력이 강한 쇼는 없다.
검(劍)에 한해서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세가가 남궁세가다. 그런 남궁의 검을 꺾는다면 전 강호 무림의 여인들이 내 섹시한 검술에 열광하리라.
“흐흐흐흐······.”
스르릉.
검을 뽑았다. 창궁무애검의 압박이 피부를 짓눌렀다. 남궁청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무형지기가 공간을 장악했다.
남궁청은 풍류공자다. 하지만 그의 검재는 진짜다. 남궁청이 지금 도달한 경지는 절정.
보통 십 대의 나이에 절정을 돌파했을 때, 그 사람을 후기지수 수준을 뛰어넘었다 이른다.
남궁청은 미래 화경의 절대고수답게 현재 후기지수 수준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렇더라도 고작 절정이다.
‘초절정인 내 본신 전력을 드러내면 남궁청을 쉽게 제압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지금 내 전력을 전부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나는 혈마에게 찍힌 게 확실한 상황이다. 그런데 내 대외적인 성취가 초절정이라고 알려진다?
10대에 절정을 찍는 것만 해도 기재라고 불릴 만한 성취다. 하지만 초절정은 이야기가 다르다. 10대에 초절정을 돌파한다면, 그건 기재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성취.
하늘이 내린 무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심성 더럽게 많은 혈마가 날 더 경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 날 향한 혈마의 경계심이 올라가면 피곤한 일이 많이 발생할 터.
조용히 정파 무림의 비선실세가 되어 삼처사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전력을 숨겨야 한다. 절정 정도로.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검명과 함께 칼날이 진동하며 검은 검기가 검신을 뒤덮으며 피어올랐다.
타닥.
나는 바닥을 박차며 행운유수의 보신경을 밟으며 도약했다. 남궁청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무형지기의 압박감이 내 몸에 집중됐다.
무형지기가 거미줄처럼 나를 구속하며 움직임을 방해하려 했다.
“······.”
남궁청이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남궁의 검이 상징하는 속성은 창천(蒼天)과 제왕(帝王).
드넓은 하늘처럼 높고 무한하면서도, 제왕의 기세처럼 서 있는 것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남궁세가의 검에 담긴 철학이었다.
이 검에 담긴 철학을 알겠어요?
그런데 제왕이라니.
역적으로 몰리기 딱 좋은 절학들이다. 어디 지방 호족 나부랭이들이 제왕을 자칭해? 뒤질라고.
우리 황상의 꽃길을 위해서라도 제왕을 자칭하는 역적놈의 무리를 여기서 꺾어야 했다.
남궁청의 무형지기가 몸을 옭아맨 순간, 나는 혼원공을 운용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음양이기가 혼원공의 통제 아래 들어온다. 공동파 특유의 역혈의 경로로 내력이 순환하며 폭발적인 힘이 피어올랐다.
창궁무애검의 속박을 순식간에 풀어낸 나는 그대로 검은 검기로 휘감긴 철검을 들어 남궁청을 공격했다.
“!?”
남궁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속박을 풀어내니 당황한 모양. 하지만 남궁세가의 대공자답게 놈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놈이 빠르게 검을 들어서 내 공격을 막아냈다.
파츠츠츠츠츳!
하늘색 검기가 피어오른 남궁청의 검과 검은 검기에 뒤덮인 내 검이 충돌하며 스파크가 튀었다. 무형의 기파가 피어올라 주변을 휩쓸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금속음이 주변을 울렸다.
“흐흐.”
나는 상남자의 웃음을 지으며 남궁청과 합을 나누며 최대한 섹시하게 움직였다.
비무보다는 검무(劍舞)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공격하는 나를 보던 남궁청의 얼굴이 굳었다.
*
챙!
이철수의 검이 허공에 검은 선을 어지러이 그리면서 궤이막측한 구도로 움직였다.
파츠츠츳!남궁청은 이철수의 칼날을 창궁무애검으로 막아내면서 얼굴을 굳혔다.
‘공동의 복마가 이 정도였던가?’
남궁청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가 이철수에게 비무를 신청한 건,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 이철수가 소검후와의 비무에서 승리한 사실 정도는 남궁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검후의 경지는 고작 일류. 물론 그 나이에 일류의 성취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절정의 고수에 이른 남궁청 본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소검후를 이긴 이철수의 성취도 일류 정도일 터. 그러니 이철수는 그의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소검후는 이철수를 연모한다. 그렇다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철수를 꺾어 소검후에게 자신의 마음을 인정받겠다.
그것이 남궁청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철수와 검을 맞댄 순간 산산 조각나버렸다.
챙!
남궁청이 검기가 타오르는 검을 들고 이철수의 공격을 막아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피어오른 기파가 남궁청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궁청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소협의 성취는······. 내 이상이다!’
이 비무를 보는 중인들에게는 남궁청과 이철수가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대등한 공방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남궁청은 알았다.
‘이 소협은 실력을 숨긴 채로 나를······. 봐주고 있어······!’
지금의 이철수는 제 실력을 다 발휘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다. 겉보기에 대등해보이는 공방을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와 검을 나눌수록 남궁청은 점점 수세로 몰려가고 있었다.
“흐흐흐흐.”
이철수의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런 사이한 웃음이라니, 본 공자를 농락하는 것인가?’
남궁청의 미간에 서린 내 천(川)자가 더욱 깊어졌다.
이대로 이철수의 수중에서 놀아나다가 패배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지.’
남궁청이 이를 악물었다.
대남궁세가의 대공자이자, 장차 남궁세가를 물려받을 소가주로서. 남궁의 검은 패하더라도 꺾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인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우웅.
남궁청의 단전에서 높고 푸른 하늘을 닮은 진기가 치솟았다.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의 묘리를 따라 피어오른 내력이 사지백해를 내달렸다. 이철수의 검을 쳐낸 남궁청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와 함께 남궁청의 전신에서 주변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무형지기가 피어올라 폭발했다.
제왕검형(帝王劍形).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최상승 절학.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되면서 전승받은, 남궁세가 검법의 극한이 남궁청의 검에서 현현했다.
타오르는 하늘색 검기가 사방을 뒤덮고 무형지기가 비무장을 짓눌렀다.
“이 압도적인 기세는······.”
“제왕검형이 틀림없소!”
“무량수불.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을 견식하게 될 줄은 몰랐구려.”
“옥기린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소.”
“이 소협의 실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한 것일지도······.”
둘의 결투를 보던 후기지수들이 제왕검형을 보며 수군댔다.
사지백해에서 차오르는 전율, 전신을 뒤덮는 전능감에 몸을 떨면서 남궁청이 이철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시오. 이 소협.”
남궁의 격에 맞는, 후회 없는 승부를 보여줄 터이니.
시작은 천소빈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궁청의 마음속에 소검후 천소빈의 모습은 없었다. 그의 눈빛은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 이철수를 향한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뭐지? 미친 건가?’
나는 제왕검형을 꺼낸 남궁청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서로 적당히 하는 게 국룰인 친선 경기에서 상대가 갑자기 전력승부 급발진 풀악셀을 밟으면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바라보는 남궁청의 저 뜨거운 눈빛! 사형과는 달리 완벽한 사내놈 주제에 날 왜 저렇게 빌어먹을 눈빛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기분이 나쁘다.
‘빌어먹을.’
놈이 제왕검형을 꺼낸 이상, ‘적당히’ 상대해서 멋지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내가 이기는 시나리오는 물 건너갔다.
제왕검형.
무당의 태극혜검과 함께 천하제일의 검법을 논한다는 절학이다. 어중간하게 상대해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남궁의 검을 꺾겠다고 호언장담한 나였다. 상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 깍두기라도 만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화려한 승리가 아닌, 스마트한 승리를 선택할 수밖에.
결심한 나는 다시 행운유수의 보신경을 밟아 땅을 박찼다. 제왕검형의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무형지기가 내 전신을 짓눌렀다. 역라순혈공을 운용하자 체내에 순환하던 내력이 빠르게 증폭되었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취하며 증강된 내력이 또다시 증폭되자 몸에서 압도적인 무형지기가 피어올라 제왕검형의 구속을 깨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이 형이라면 그리 나올 줄 알았소!”
그 모습을 본 남궁청이 웃었다. 이 형이라니? 누가 네 형이야?
소름이 돋았다. 놈은 웃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남궁청의 검에 맺힌 하늘색 검기가 일순간 시야 전체를 뒤덮었다.
제왕검형. 억조창생을 굴복시켜 다스리는 제왕의 기운이 깃든 검이 세상을 뒤엎었다.
“이 형, 잘 들으시오! 남궁의 검은 패할지언정 절대 부러지지 않소이다!”
제왕검형을 펼치던 남궁청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면서 검기를 칼에 압축, 또 압축했다.
귓가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형이 말해준 무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사제, 혼원일기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복마검법의 초식을 조금 변형해봤어. 본 파의 복마검법은 직선적이고 변화가 부족하니까, 내가 만든 변초를 사용하면······.]
사형은 변초라고 했지만, 그건 변초의 수준이 아니었다.
복마검법에서 파생된, 화경의 고수가 된 사형이 창안한 새로운 무공이었다.
전생에서도 보여준 적 없던, 이번 생의 사형이 새롭게 만들어낸 복마검법의 파생 검공. 대종사의 자질을 지닌, 천고의 기재가 창안한 공동파의 새로운 절학.
나는 그 검법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복마구소검(伏魔九霄劍)
검은 검기에 휩싸인 칼날이 순식간에 아홉 개로 분열했다.
아홉 갈래로 분열한 흑색 검영에서 아홉 개의 서로 다른 검초가 흑색 검기를 동반하며 흩뿌려졌다.
생전 처음 보는 검법을 발견한 남궁청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른 순간.
콰-과-과-광!놈의 제왕검형과 내 복마구소검이 부딪히며 기파가 폭발했다. 제왕검형의 방어에 일곱 개의 검영이 가로막히고, 여덟 번째 검영이 남궁청의 검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하나.
일검이면 충분했다. 번쩍.
검은 섬광과 함께 내 검이 그대로 남궁청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다.
좋아. 내 승리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비무 승리 세리머니로 상남자의 웃음을 지으려던 그때.
빠악!
어디선가 가죽 북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주르르륵.
남궁청이 입고 있던 바지의 허리 부근이 터지면서, 놈의 바지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남궁청의 패션이 하의 실종으로 변한 순간, 죽음과 같은 정적이 비무대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