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여복(女福)
용봉지연이 열리는 연회장을 빠져나온 소검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후원이었다.
후기지수 전부가 연회장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맥을 쌓고 있는 탓에, 잘 꾸며진 후원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오직 소검후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소검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남궁청.
남궁세가의 대공자. 뛰어난 검재만큼이나 풍류를 사랑하는 망나니. 미남자이기는 하지만 소검후는 그런 문란하고 느끼한 사내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싫었다.
그래서 이철수를 이용했다. 이철수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녀가 이철수를 연모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이용해 남궁청을 쫓아내고자 했다.
사부가 아닌 순전히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는 이기적인 이유로 이철수를 이용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철수는 순순히 그녀의 요청에 응했고, 남궁청이 그녀의 마음 운운할 때도 아무런 반박도 안 했다. 비무도 훌륭히 승리했다.
‘······대체 왜······.’
일 년 전.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던 경연 때와는 다른 모습. 순전히 그녀의 사리사욕을 위한 일인데도 군말 없이 어울려준 이철수의 모습은······.
그녀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안하무인 망나니 이철수와는 완전히 달랐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사리사욕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했다는 가책이.
그래서 소검후는 비무가 끝난 이철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왜 날 위해서 나선 거냐고. 널 이용하려는 여자를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한 거냐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죠······.”
그는 말했다.
사부와 그가 맺어지기 싫어서 달라붙은 그녀의 의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사내대장부로서 네가 곤경에 처해 있어서 네 감정과는 별개로 너를 도왔다고.
이철수는 그렇게 말했다.
‘진짜 바보 아닌가요?’
바보다. 싫어하는 자라도 곤경에 처했으면 돕는다니, 이야기 속 협객들이나 할 법한 현실성 없는 일이다. 은원을 무시하고 돕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바보라면······. 싫지 않다.
소검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의 심장 박동수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아까도 그랬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래서 그만 연회장에서 나와버렸다. 더 있다가는 이 꼴사나운 얼굴을 그가 볼지도 몰랐으니까.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으으으으······. 그, 그렇게 말하면 저, 저는 어떡하라고요······.”
이철수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생오라비처럼, 사내답지 못하게 생겼다 생각한 얼굴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사부님을 위해서 그와 혼인하기로 결심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연기를 그만두라고 하기도 했고. 그러니 그에게······.
거기까지 생각한 소검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그럴 리 없다. 아직 이철수는 신뢰할 수는 없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내어주면 안 된다.
“······보, 보는 눈은 있어서······. 안 봐도 뻔해요. 사부님도 이런 식으로 유혹한 거겠죠······. 나, 나쁜 사내 같으니······.”
그래, 이건 기만이다. 이런 기만으로 그녀의 사부, 검후의 마음도 사로잡았을 터.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소검후는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과는 달리 심장은 계속해서 고장 난 것처럼 뛰고 있었다.
*
사형의 돌발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사형을 향했다.
여장한 사형은 천하제일미 적사월에 비견될 정도로 압도적인, 권능에 가까운 초월적 미모를 보유한 미녀의 모습이다.
사실 원래 남자 모습도 천하제일미남이라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미남자이긴 했다. 물론 내 워너비인, 선이 굵직하고 상남자 스타일인 슈퍼맨 헨리 카빌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형은 여리여리하고 중성적인 스타일의 예쁜 남자, 꽃미남 스타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스타일을 초월할 정도로 초월적인 잘생김이 사형에게 있었다.
송옥, 반안, 알랭 들롱과 함께 고금제일을 논할 정도의 미남자, 그런 사내가 사형이다.
절세미남인 사형이 여장한 것이다. 적사월과 버금가는 건 당연하다. 인세에 드문 미녀다. 그래서 용봉지연에 입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중인들의 시선은 모조리 사형에게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 물건을 논하다니.
“방금 진 소저가 뭐라 말한 건가?”
“······공동괴협의 양물이 천하제일이라고 말한 것 같소만.”
“세상에······. 양물을 봤다는 건······. 두 사람이 남몰래 밤마다 정을 통하고 있다는 뜻인가?”
“이 사람아. 그럼 그것 말고 아녀자가 사내의 양물을 논할 수 있는 경우가 뭐가 있겠는가?”
“일검유희 소저가 연회장에 들어올 때부터 공동괴협의 옆에 딱 붙어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정말일 줄이야······.”
“일검유희 소저 같은 절세미녀가 어째서 공동괴협 같은 기생오라비한테······.”
“하여간 계집들이란! 저런 사내답지 못한 기생오라비가 뭐가 좋다고······.”
“······물건 하나는 정말 대단한 모양이군요!”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대에서도 여자가 남자의 거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논하면 뒤에서 쑥덕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진짜 유교가 지배하는 이세계 중세 명나라에서면 더 말해봤자 입 아프다.
실제로 주변 후기지수들은 이미 나와 사형이 이미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뭐?
기생오라비라고? 이렇게 어깨도 떡 벌어지고, 근육도 키운 상남자인 내가?!
저 기생오라비라는 말을 들으니 전생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더러 예쁘니 하룻밤을 함께 보내자고 헛소리를 지껄이던 금의위 게이 무사 놈 말이다.
나중에 동창의 장인태감이 된 뒤 놈을 지옥으로 보내줬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빌어먹을.
나는 떠오르는 트라우마를 다시 기억 저편으로 밀어넣으면서 사형에게 전음을 날렸다.
[사형 갑자기 왜······. 그것보다 제 물건은 언제 보신 겁니까?]
설마.
공동파에 입문하고 얼마 안 지났던 날. 아침에 밥할 때 물건을 세운 적 있었는데,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가?
[······비밀이야.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사제 무시하는 거, 싫어.]
사형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전음을 보냈다.
사내 주제에 쓸데없이 귀여운 표정이다. 아니 무시하는 게 싫다고 해도 그걸 그렇게······. 본인이 지금 여장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가?
내가 사형에게 다시 전음하려던 그때.
“······어떻게 아냐고요? 그야······. 이 공자님과 소녀는······.”
스윽.
사형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사형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서로 미래를 약속한 사이니까요.”
사형이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미래를 약속? 사형의 말에 나는 어이가 하늘로 날아가는 걸 느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은, 그게 엄밀히 말해서 거짓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사형은 미래의 검성이자 공동파 장문인이고, 나는 공동파의 제자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약속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스윽. 사형이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형의 가슴이 팔뚝에 뭉개졌다. 싱그러운 들꽃 향기가 코 끝을 스쳤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진짜 남자 맞아?
슬슬 마음 한쪽 구석에 있던 의심이 크기를 키워가던 그때.
“그, 그렇구려······. 흐음······. 그렇다면 알겠소. 이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겠소.”
남궁청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발짝 물러섰다. 사형의 진짜 광기에 당황한 모양. 그가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검후 선배에 천 소저도 모자라 절세미녀 진 소저의 마음까지 훔치다니······. 역시 이 형이시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체 뭘 착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형의 마음 같은 걸 훔쳐서 뭘 한다고.
남궁청의 말에 황당함을 내가 느끼고 있을 때.
“흐, 흥! 누, 누구 맘대로 미래를 약속했다는 거예요! 이만 떨어져요!”
서문청하가 내 팔뚝을 휘감고 있는 사형의 팔뚝을 떼어내면서 말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사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 소저! 아, 아녀자가 그,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이 공자님이 진 소저와 미래를 약속했다는 말은 단언컨대, 이 공자님과 항상 같이 다닌 전속 시비인 저도 처음 듣는 소리예요! 애당초 진 소저와 이 공자님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잖아요!”
얼굴을 붉힌 서문청하가 그녀답지 않게 논리적인 말투로 사형을 몰아붙였다.
서문청하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녀 말대로 사형이라면 모를까 나와 일검유희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허점을 지적당한 사형이 얼굴을 붉혔다. 사형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서문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문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저와······. 이 공자님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하지만······.”
사형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사형의 압도적인 미모가 용봉지연을 환하게 밝혔다. 사형이 청순하면서도 요염한 목소리로 서문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 공자님께서는······. 소녀를 이 공자님의 배필로 점찍으셨습니다.”
아니.
여기서 본인이 본인 이름을 판다고?
사형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유 공자는 본인이잖아? 사형이 적사월이야? 그걸 알 리 없는 서문청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 뭐라고요?! 유, 유 소협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금일 청담회 연회도 이 공자님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스윽.
사형이 다시 내 팔짱을 끼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아니, 이 사람. 내가 아는 사형이 맞나?
신분을 바꿨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본 적 없던 모습이라 당황스럽다.
천하의 이 이철수를 당황하게 만들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사형이······.
“어떤가요? 이 정도라면······. 이 공자님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겠죠?”
사형이 눈웃음을 흘렸다. 도저히 본모습이 사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여인의 모습이 사형의 몸짓에서 흘러나왔다.
남자 맞아?
“······누, 누구 마음대로요! 전속 시비인 전 아직 인정 안 했다고요! 아니 못 해요! 이 공자님! 설마 오, 오늘 처음 만난 여자인데 다, 단순히 얼굴 좀 예쁘다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죠?”
서문청하가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얼굴 좀 예쁘다고, 좀이라기에는 너무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형의 공식 성별은 남자. 남자에게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사형과 팔짱을 해제하면서 말했다.
“진 소저와 저는 금일 만난 사이입니다. 아무리 사형의 추천이라도 혼인은 중대사이니 벌써 결정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형이 남자라고 여기서 밝힐 수는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돌려서 말했다.
내 말에 사형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반면에 서문청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 공자님께서 그리 말해도, 소녀는 이 공자님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형이 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연기 맞아? 연기 아닌 거 같은데······.
사형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그래. 연기일 거다. 그냥 내 멘탈 건강을 위해서 연기하는 걸로 일단은 생각하자.
“하하하하. 이 형은 여복(女福)이 참 많으시구려! 역시 이 남궁 모의 형님답소!”
옆에서 남궁청이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여복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술 대신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입에 한 모금 머금은 그때.
“비무 결과 잘 봤습니다. 이 소협.”
스윽.
내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사형의 원래 모습처럼 여자보다 더 예쁜 미소년의 모습을 한 명문가의 미공자.
모용위였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그가 인사하면서 내게 전음을 보냈다.
[오늘 청담회 연회, 안 잊으셨죠? 후후. 본가의 구 부인께서도 이 공자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모용 공자의 전음을 들은 나는 웃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