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압도(壓倒)
“사, 사제······. 아, 안 돼······. 이러면······.”
유진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제를 범하기 직전 간신히 되찾은 한 줄기 이성이었다.
그녀의 몸은 지금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본능은 지금도 속삭이고 있었다. 사제보다 네가 더 강하다. 어차피 여인이라는 사실이 들키지 않았느냐? 춘약을 핑계로 지금이라도 덮쳐서 범하라고. 그럼 사제가 사내로서 그녀의 순결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녀를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그럴 수는 없어.’
유진휘는 되찾은 이성으로 욕망을 억눌렀다.
‘사, 사제는 검후 선배를 좋아하니까······.’
그렇다.
이철수는 검후를 마음에 품었다. 그렇게 본인이 계속 말했다. 정사의 명사(名士)가 모두 모인 정사지쟁 자리에서 검후에게 공개 청혼할 정도로 이철수는 검후에 대해 진심이었다.
반면에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제에게 그저 사형일뿐이었다. 사제가 얼마나 순수한지 유진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제를 강제로 범해서 순정(純情)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사제의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평생 그녀 본인보다는 사제를 우선시하기로 결심한 유진휘였다. 이제 와서 그녀의 욕망을 내세워 사제의 몸을 더럽힐 수는 없다.
그 욕망이 춘약 때문에 증폭된 거짓된 욕망이라면 더더욱.
유진휘는 초인적인 인내력과 이성으로 차오르는 색욕을 계속 억눌렀다.
하지만 춘약의 효과로 증강된 색욕에 더해 성별이 들켰다는 사실이 그녀의 이성을 자꾸만 괴롭혔다.
‘들켜 버렸어······.’
유진휘가 고개를 떨궜다.
사문을 재건하고 천하제일인이 되기 전까지 사제에게 여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늘에 올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사죄를 청하며 사제의 여인이 되고자 했다.
그전까지는 사내로서, 듬직한 사형이 되어 그를 지키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춘약 때문에. 아니다,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사제에게 모든 걸 드러내고 싶다. 솔직히 털어놓고 싶다.
수많은 욕망이 그녀의 마음에서 소용돌이쳤다. 사제의 체온을 느끼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사제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몸도 마음도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성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래서 떨어지고자 했다.
하지만 떨어질 수 없었다.
계속 붙어있고 싶다. 그를 덮치고 싶다······. 욕망을 간신히 이겨낸 유진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 아, 안 돼······. 날 붙잡으면······.”
억눌러야 했다. 구 부인은 음양합일을 안 하면 기혈이 터져 죽는다고 했지만, 유진휘는 천무지체. 범인과는 체질과 근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기혈이 터져 죽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최악이라도 일주일 정도 정양하면 낫는 수준의 내상이 끝일 것이다. 유진휘는 본능적으로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욕을 증폭시키는 지금의 상황은 위험했다.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자극받으면 지금의 이성마저 끊겨버릴지도 몰랐다.
유진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철수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걸었다.
“붙잡으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사형. 저는 사형이 여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덥석.
하지만 이철수가 또다시 손목을 잡은 순간. 유진휘의 희미한 이성이 그대로 사라졌다.
*
사형이 여자다.
그 사실에 처음은 당황스러웠던 나였다. 남자인 줄 알았던 상대가 알고 보니 여자, 그것도 천하제일미인이라면 안 당황하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당황은 잠깐뿐, 나는 평정을 찾았다. 사형이 여자면 뭐 어떤가?
착한 사형은 지금까지 나에게 진짜 성별을 숨겨왔다는 사실이 들켜서 죄책감을 느끼는 중인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사형이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뢰하더라도,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두 개쯤은 있는 법이었다. 나만 해도 황상에게 아직 내가 현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사형에게 성별도 그런 거겠지.
그러니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정도로 내 속은 좁지 않았다. 진정한 알파 메일, 상남자라면 모름지기 넓은 마음으로 여인을 포용해야 하는 법.
지금은 대장부로서 혼란스러워하는 사형을 보살펴줄 때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형의 손목을 잡고, 여인이라도 괜찮다고 말한 그때.
“사제······. 이건 사제가······. 나쁜······. 거야······.”
사형이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쁘다니?
“사형, 진정하십시오. 우제한테 춘약을 해독할 수 있는······.”
뭐 당연히 감성만 믿고 사형을 붙잡은 건 아니었다.
나는 동창 엘리트 요원 출신. 당연히 춘약을 해독할 수 있는 비술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사형은 천무지체 아닌가? 만독불침은 아니더라도 약물 내성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사형이었다. 그래서 춘약을 먹고도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사형에게 비술을 쓴다면······.
내가 거기까지 생각한 그때.
“으읍?!”
내 입술 위에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뒤덮였다. 눈앞에 사형의 얼굴이 보였다.
사형이었다.
그녀가 내게 키스해온 것이다.
잠깐, 키스라고?!
“으읍!?”
사형이 내력이 깃든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한 상태로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혔다. 그녀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찌걱찌걱.
사형의 혀가 내 혀와 입 안을 마음껏 희롱했다. 처음에는 서툴게만 느껴졌던 사형의 혀놀림이 빠르게 능숙해졌다. 서로의 타액과 혀가 뒤엉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키스라니.
물론 사형이 여자, 거기에다 천하제일미녀라 싫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좋았다. 하지만 내 첫 키스가 이렇게 이성을 잃은 상대에게 넘어가는 건 싫었다.
키스란 섹스의 전초전. 섹스와 마찬가지로 심(心)이 통하는 상대와 나눠야 했다. 지금의 사형은 단순히 육욕에 미친 상태에 불과했다. 이성을 잃고 들끓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내게 키스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키스는 올바른 색도를 따르는 키스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화경의 고수인 사형이 내력을 전부 사용해서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여기에서 동정을 잃게 되고 마는 것인가?
내가 절망감과 묘한 기대감이 뒤섞인 알 수 없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던 그때.
기감에 누군가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고수가.
천지회의 고수였다.
나는 간신히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와 나 사이에 은빛 실선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사형의 입술이 유난히 붉게 물들어 보였다.
“사, 사형 지금······.”
“······사제가······. 나빴어······. 이렇게 준수한 용모와 관옥 같은 얼굴로······. 나를 계속 유혹하고······. 나를······. 나쁘게 만들고······. 나는······. 나는 참으려고 했는데······.”
사형이 풀린 눈으로 나를 구속한 채로,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쪼옥. 그녀가 입술로 내 쇄골 살결을 빨아들였다.
몇 년 전, 공동산에서 살무사에게 물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사형이 이렇게 내 어깨에 입을 맞춰 독을 빨아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뱀에 물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건 사형의 순수한 색욕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사형······. 흐윽······.”
쇄골을 계속 쪽쪽 빨면서 혀로 자극하는 사형 때문에 내 몸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됐다. 이대로는······. 나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콰-왕!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를 굴려 부서진 문쪽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얼굴은 면사로 가렸지만, 누가 봐도 절색의 미녀임을 짐작하게 하는 적의를 입은 여인.
염왕 적사월.
그녀가 나와 사형을 보고 있었다.
*
마음이 심란해 능월향의 모습으로 등봉현으로 내려온 적사월이 이철수의 호출 호각 소리를 들은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기녀 출신인 만큼 음공(音功)에도 능한 적사월이었다. 범인이라면 몰라도 그녀가 호각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혹시 이철수가 호각을 분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능월향 분장을 벗어던지고 여기까지 달려온 적사월이었다.
물론 도중에 귀찮은 여자를 한 명 만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달려온 적사월의 시야에 보이는 건.
혈도를 제압당해 뻣뻣하게 굳은 구 부인과 방안에 가득한 색혼향과 춘약의 향기.
그리고 방 한가운데, 알 수 없는 여인에게 깔린 이철수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냥 여인도 아닌, 전라에 가까운 반라(半裸)의 여인이었다.
“무슨······.”
적사월은 헛바람을 삼켰다.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사월은 알았다.
이철수를 깔아뭉갠 여인의 뒷모습, 자태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에 버금갔다.완벽한 비율의 신체였다. 물방울 같은, 적당한 크기의 큰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 탐스러운 허벅지에 흑단 같은 머리까지.
전부 완벽했다.
같은 천하제일미였기에, 누구보다 심미안이 뛰어난 적사월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의 상대야말로 그녀와 버금가는 천하제일미인이라는 사실을.
그런 천하제일미인이, 알몸으로 이철수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
적사월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홱.
유진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적사월이 들어왔다. 그녀의 고절한 내력이 적사월의 면사를 뚫었다. 적사월의 본래 얼굴이 유진휘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
유진휘가 짧고도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저 여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방해받지 않았을 텐데.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녀를 보고 동요하는 적사월의 표정과 감정 변화, 이철수를 향하는 시선까지.
전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적사월은······. 어쩌면 사제를 연모할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유진휘의 감정이 동요했다.
다른 여인이라면 몰라도 적사월이라니? 환갑이 넘은 나이에, 사파의 수장인 천하제일요녀가 감히 사제를? 사파의 수장이었다. 정파의 동량지재인 사제에게 좋은 의도로 접근했을 리 없었다. 저 요물이 사제의 마음을 농락할지도 몰랐다.
감히 사제에게 상처를 주려 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하제일미라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여자가 감히.
‘감히 사파의 요녀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사제를 탐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유진휘는 느꼈다.
그녀의 눈가가 요염하게 휘어졌다. 유진휘의 입가에 우월감이 깃든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석녀(石女)인 그녀라지만, 그래도 나이가 갑자 단위인 적사월보다는 한참 어렸다. 청춘이었다. 미모도 부족하지 않았다. 석녀 주제에 감히 사제의 부인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부(情婦)라면, 불륜 상대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과시해야 했다.
자신과 사제 사이의 인연은 고작 요녀 따위가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굳건하다는 사실을.
게다가 왠지 얄미운 능월향과 닮아 보여서 더더욱 적사월이 꺼려졌다.
유진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이철수를 향해 돌아왔다.
나의 사제. 나만의 사제. 저런 요녀, 아니 일 갑자 넘게 묵은 요괴 따위에게 사제를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가. 소녀를 봐주시어요.”
유진휘의 입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빛이 도발적으로 변했다. 처음 듣는 호칭에 이철수가 놀라 그녀를 바라본 순간.
츄우.
유진휘의 입술이 다시 이철수의 입술을 덮었다.
그 광경을 본 적사월의 면사 너머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