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기싸움
진한 키스.
가가라는 호칭까지 들은 적사월의 적안이 흔들렸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 심장에 대못을 박은 것처럼 고통이 올라왔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시야에 눈물이 조금씩 차올랐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하제일미인 그녀를 두고 어떻게······.
이건 있어서는 안 됐다.
‘지금까지 본녀가 어떻게 했는데 감히······.’
입안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그녀의 들끓는 의념에 내력이 반응했다. 현경의 경지에 이른 심후한 공력이 염천제혼기(閻天制魂氣)의 구결을 타고 피어올랐다.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기세가 타올랐다.
적사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철수가 다른 여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철수가 일검유희와 함께 있으며, 그녀가 천하제일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정보 정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글줄로 정보를 접하는 것과 직접 그 현장을 목도하는 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안 갈 수도 없었다. 이철수가 분 호각이었으니까. 그가 혹여나 잘못되면 골치 아프니까. 신경 쓰이니까. 그러니까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꼴을 볼 줄 알았더라면······.’
원망스러웠다. 이철수도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의 원흉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일검유희 진소소.
쓸데없이 그녀와 같은 수준의 미모를 가졌으며, 쓸데없이 화경이라는 강력한 무위를 보유한 불여시.
그녀가 춘약을 먹고 폭주한 탓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일검유희가 초절정 이상의 신비고수라는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화경의 고수였을 줄은 몰랐다.
‘어린 년이 분수도 모르고······!!’
일검유희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최소 이립(而立)은 넘은 나이일 터. 삽십 세를, 어쩌면 불혹(不惑)을 넘은 주제에 젊은 얼굴로 가장하여 감히 십 년은 더 어린 이철수를 나신을 드러내며 유혹하려 하다니.
“이렇게 음란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어딜······.”
음란하다. 도저히 정숙한 여인이라 볼 수 없다.
염왕(閻王)이라는 별호처럼, 염부에서 올라온 듯한 끔찍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일어섰다.
사파제일인의 오만한 시선이 일검유희 진소소, 유진휘를 향한 그때.
유진휘의 입술에 서서히 이철수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은빛 실선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유진휘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완성되어가는 혼원일기공을 운용했다. 우웅. 음양이기가 일어나면서 춘약 기운을 조금씩 중화하여 탁기는 내보내고 춘기(春機)를 북돋는 이로은 기운은 체내로 갈무리했다.
스윽.
유진휘가 손을 뻗자 그녀의 옷이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나신 위에 안착하여 완벽한 비율을 지닌 자태를 가렸다.
사제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아무리 여인이라 하더라도.
흑의를 걸쳐 나신을 감춘 유진휘가 요염하게 웃었다.
“음란하고 천박하다니요. 설마 소녀를 보고 말씀하신 건가요? 염왕 선배.”
“······내 비록 사파에 몸담고 있으나, 정파의 섭리를 모르지는 않는다. 일검유희 진소소. 네년은 분명히 백도를 추종하는 무인일 터. 그런데 어찌해서 공맹(孔孟)이 정한 여인의 도리를 어기고 홍루(紅樓)의 창기(娼妓)들도 하지 않을 음란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사내를 잡아먹으려 드느냐?”
적사월의 적안이 반짝였다. 그녀의 몸에서 압도적인 염천제혼기(閻天制魂氣)의 기세가 유진휘를 향해 쏟아졌다.
그녀의 끈적하면서도 뜨거운 기세가 방 내부를 전부 장악했다. 팔열지옥(八熱地獄)이 현세로 구현된 듯한 끔찍한 광경 속에서도 유진휘는 태연했다.
현경의 절대고수, 염왕 적사월의 성명절학인 염부시왕공의 기파를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유진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체감 시간이 천천히 느려졌다. 온통 느리게 보이는 시야 속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염부시왕공의 기파가 유진휘의 오성을 통해 모조리 해체 분석되었다.
어차피 염왕 적사월의 목적은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진휘의 오성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외웠던 모든 무공 구결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미완성의 혼원일기공 구결이 떠올랐다.
거기에 기파를 통해 역산한 염부시왕공의 구결에서 적절한 부분을 혼원일기공에 더했다.
번쩍.
유진휘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혼원일기공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했다. 물론 그녀가 재현한 혼원일기공은 원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복원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사라진 부분을 과거와 똑같이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진휘가 지닌 대종사의 재능은 혼원일기공을 원본보다 더 뛰어난 절학으로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유진휘의 눈빛이 깊어졌다. 일순간 화경의 초입에서 원숙한 수준으로 도약한 유진휘가 혼원일기공을 운용했다. 혼원의 묘리로 염부시왕공의 기파를 흘려냈다.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츳!유진휘를 중심으로 기파가 사방팔방 발산하며 주루를 뒤흔들었다. 유진휘가 웃었다. 옷을 다시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적사월을 보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염왕 선배. 덕분에 한 조각 심득을 얻었습니다.”
유진휘가 웃었다. 입으로는 감사를 말했지만, 실상은 조롱이었다. 기싸움이었다.
현경의 고수이자 사도련주인 적사월이 유진휘의 노골적인 도발을 몰라볼 리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경악했다.
‘이 미친년이······.’
진심은 아니지만 제압할 생각으로 날려보낸 기파다. 그런데 상대는 그걸 정면에서 격파하는 것도 모자라, 그 사이에 심득까지 얻은 것이다.
위연구어(爲淵驅魚)가 따로 없었다.
화경은 일대기재가 평생을 수련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절대고수의 경지. 하지만 그런 화경의 고수 중에서도 눈앞의 일검유희는 독보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그녀와 같은 현경의 경지에 오를지도 몰랐다. 신승의 뒤를 이어 정파제일인의 자리에 등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네게 가르침을 주려던 것이 아니다. 너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네가 화경의 고수라면 나이는 최소 이립(而立)은 넘겼을 터. 그런데 어찌하여 홍안의 소년인 이 공자를 그런 천박한 모습으로······.”
“소녀의 나이는 이립이 아닙니다.”
적사월의 말을 유진휘는 잘라냈다.
그녀의 시선이 적사월을 향했다. 일검유희의 신분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정체불명의 신비고수이자 여협. 나이도 출신도 불명이다. 현경의 고수이니만큼 그녀의 경지가 화경이라는 사실은 단번에 눈치챘을 터.
하지만 나이를 착각하고 있었다.
“소녀는 아직 방령(芳齡)에 불과합니다. 이립(李苙)이 되려면 아직 몇 년 남았지요.”
방령.
스무 살 안팎의 나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적사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방령이라니. 어떻게 화경의 고수면서 나이가 그렇게 적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방금 저 여자가 보여준 천고의 재능이라면 방령의 나이에 화경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성으로는 납득해도 감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립도, 불혹도 아닌 방령이라니.
“마, 말도 안 되느니라. 어떻게 화경의 고수면서 묘령의 소녀일 수가 있단 말이더냐? 본녀 앞에서 감히 나이를 속이다니!”
적사월은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방령이라면, 그렇다면 적사월 본인은 대체 뭐가 되느냐는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유진휘는 청순하게 웃었다. 아까의 요염한 기세를 전부 벗어던진, 청순한 미녀로 변한 그녀가 적사월 옆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당영령을 향했다.
“소녀의 나이는 방령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 선배.”
화살이 본인에게 돌아오자 당영령의 어두운 초록 머리가 움찔했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가 떨렸다.
적사월과 유진휘.
두 소녀가 이철수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당영령도 알고 있었다.
한 소녀는 현 사파제일인이요, 다른 소녀는 미래의 정파제일인.
이 싸움에 자칫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경전하사(鯨戰鰕死)의 꼴이 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최대한 모른 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진휘의 질문이 돌아온 이상 당영령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말이지······.”
“그래. 당 의원. 너는 일검유희와 친분이 있다 들었다. 저년의 말이 사실인가?”
적사월까지 화살을 돌리자 당영령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사파인 적사월보다는 친분도 있으며 정파인인 유진휘의 편을 드는 것이 맞다. 당영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진 후배의 말이 맞아······. 요······. 진 후배는 방년(芳年)의 소녀예요······.”
당영령의 말을 들은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정말 방년의 처녀라니······!’
당영령이 아무리 괴의라지만, 이런 부분에서까지 거짓을 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적사월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저 맹랑하고 음란한 여자는 방년의 처녀가 맞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순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던, 강렬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천하제일미인, 아니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비교해서 고금제일을 논할 정도의 미모를 타고난 적사월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미녀도, 아니 남자를 포함해도 그녀의 미모를 따라잡을 미인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적사월은 언제나 최고였다. 62년 일생을 천하제일미로 살았다. 단 한 번도 천하제일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와 수준이 같은 미모를 지닌 미녀를 마주한 것이다. 게다가 그 미녀, 일검유희 진소소는 심지어 그녀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여인으로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방년(芳年)의 처녀, 무공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그녀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경쟁자가 지금.
이철수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실에 적사월의 마음이 동요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겉잡을 수 없는 검고 끈적끈적한 감정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본녀가 열등감을 느낀다고? 천하제일미이자 사파제일인이며 사도련주이자 하오문의 태상문주인 본녀가?’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린 적사월은 스스로를 부정했다. 열등감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천한 창기의 딸로 태어났다. 밑바닥에서부터 무수한 위협을 물리치고 마침내 사파의 정상에 올라 권력과 무력, 재력까지 모든 걸 손에 쥐었다.
그녀를 흠모하는 사내는 사해(四海)를 모두 메울 정도로 많았고, 그녀의 말 한마디면 존명을 외치며 죽음을 자청할 수하도 넘쳐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고작······.
고작 나이만 어린······. 아니 나이만 어리고 미모만 비슷한 정파의 처녀 따위에게······. 따위에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염왕 선배.”
적사월의 귓가에 유진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휘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 공자한테 이 공자의 배필을 권유받은, 공동파의 식객 일검유희 진소소라고 합니다.”
유진휘의 말을 들은 순간, 적사월의 눈에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