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줌마
적사월과 사형.
현경과 화경의 고수씩이나 되는 여자들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중인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강호 무림의 미래가 걱정된다.
나는 어깨에 잔뜩 새겨진 키스 마크를 손으로 만지면서 사형이 반쯤 벗긴 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었다.
“배, 배배배필이라니! 네가 뭔데 이 공자의 배필을 자처하는 것이더냐!”
적사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형이 요염하게 웃으려고 할 때.
“그만.”
나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면서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을 끝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현장 정리부터 합시다. 당 선배.”
나는 적사월과 사형 사이에 끼여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당영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에 당영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오빠 말이 맞아! 이 약들을 증좌로 확보해서 무림맹에 놈들을 고발해야 해!”
내 말에 말문이 트인 것처럼 말하는 당영령.
[고마워! 오빠!]
그녀가 내 귓가에 전음까지 보낸 걸 보니, 아까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같던 형국이 어지간히도 불편했던 모양.
당영령도 천지회 회원일 줄은 몰랐다.
당영령이 돌팔이이기는 하지만, 그 경지는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다.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신승과 적사월이라는 두 현경의 고수까지 천지회에 소속되어 있으니.
아무리 혈교가 등장했을 때만 소집되는 임시 조직의 성격이 강하고 혈교 토벌 이외의 일에는 협력하지 않는다지만, 천지회가 이 정도 전력에 정보력까지 보유하고 있다면······.
제법 쓸 만한 장기 말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그 알 수 없는 말은 다음에 반드시 해명해야 할 것이니라.”
스윽.
적사월이 한 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사형이 살짝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사형이 이렇게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아직 배필은 아니지만, 공동파의 식객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염왕 선배. 유 공자의 주선으로 앞으로 공동파에 머무르기로 했죠.”
사형이 내 곁에 서서 적사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유진휘도 진소소도 전부 본인이잖아? 우리 사형이 이상한 부캐 놀이에 이렇게 집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사형이 저렇게 내뱉은 이상 수습해야 했다. 뭐, 일검유희 진소소와 공동신협 유진휘가 동일인물이며, 용봉지연에서 신비고수인 진소소의 신상이 일부 공개된 이상, 차라리 진소소에게 공동파의 식객 신분을 부여하는 쪽이 사형이 운신하기에 더 편할지도 몰랐다.
“······배필 이야기는 저도 금시초문입니다만, 사형의 추천으로 진 소저께서 본 파의 식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우선 이 자리에서 사형, 아니 일검유희의 신분을 보증했다. 내 말을 들은 적사월의 면사가 떨렸다. 면사 너머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 알겠다. 네 말대로 지금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끌 때는 아니지. 당 의원. 구 부인을 구속하고······. 여기 있는 약물을 전부 채취해 증좌로 활용하도록.”“알겠습니다. 지령주님.”
고개를 숙인 당영령이 현장에 있는 춘약과 미혼향 등 각종 약물을 수집한 뒤 구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춘약에 미혼향까지, 아주 골고루 해 먹었네. 그치 구 언니?”
구 부인의 눈이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한 그녀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당영령이 혈도를 짚었다. 아혈을 해혈하자 구 부인의 입이 열렸다.
“어, 언니라니. 무,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당 선배야말로 소녀보다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시끄러! 흥. 구 언니는 영령이보다 늙어 보이니까, 언니 칭호도 박탈할 거야. 아줌마야. 구 아줌마.”
당영령이 웃었다.
사실 당영령도 적사월도 구옥련보다 나이가 많기는 했다. 둘 다 화경 이상의 경지에 올라 신체나이가 전성기 때로 고정되어서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에 겉보기 나이는 구 부인이 훨씬 많아 보였지만 말이다.
이거 스트레스 해소하는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됐고. 영령이는 오늘 아줌마한테 실망했어. 구 아줌마가 모용세가의 비선실세가 된 건 알고 있었지만, 혈교의 주구일 줄은 몰랐거든.”
당영령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보기 드물게 저 돌팔이가 진지해진 모습.
“혀. 혈교의 주구라니요! 당치도 않습······. 흐윽?!”
구 부인이 변명을 내뱉으려던 순간. 당영령이 침통에서 침을 꺼내 구 부인의 혈자리를 찔렀다.
구 부인의 얼굴에서 요사스러운 사기(邪氣)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혈교도들이 익힌다는 혈공의 화후가 구 부인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두껍게 발라진 분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그나마 젊어 보이는 얼굴이 순식간에 세월을 직격타로 맞은 듯 확 늙어버렸다. 출렁이는 뱃살이 드러났다.
“구 언니의 노안을 가리던 주안술도 풀렸고, 혈공을 연성한 징후도 드러났어. 구 아줌마가 혈교의 끄나풀이라는 증거지. 이래도 계속 부정할 거야? 영령이는 뭐든 다 알고 있다고.”
훗.
당영령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구 부인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당영령이 품 안에서 거울을 꺼내 당영령의 얼굴을 비춰줬다.
“자 봐, 이게 바로 구 아줌마의 진짜 얼굴······.”“으으으으으으······. 그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만인(萬人)에게 쾌락을 전파한 것이 죄란 말이더냐!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쾌락을 선사해줬을 뿐이다! 이 연회에 참여한 자들은 내가 강요해서가 아닌, 스스로 택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야! 하하하하하! 이게 백도를 추종한다는 너희 정파 위선자 무리의 실체인 것이다! 나는 그저, 그들의 욕망을 살짝 부추겨서 밀어준 것일 뿐. 저들의 음란 행위는 저들의 선택······.”
구 부인이 삼류 악당처럼 발악하며 웃었다.
하긴, 색욕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 중 하나.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다. 더군다나 정파 후기지수들은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닌가? 예로부터 용봉지회는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구 부인이 아니었더라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술먹다가 이렇고저런짓을 했겠지.
물론 나는 관심 없는 일이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색도. 나는 색욕의 노예가 아닌 색욕의 주인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패장 주제에 말이 많네. 아줌마.”
“닥쳐라! 너도! 거기 사파제일인도! 전부 본녀보다 나이가 많지 않으냐! 본녀도 너희들처럼 젊게 살고 싶었다! 그게 죄란 말이더냐······.”
구 부인의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흐응. 영령이가 구 아줌마보다 나이가 많다고? 무슨 소리야! 영령이는 영원한 과년(瓜年)이라고!”
과년.
열여섯 살을 이르는 말이다.
본인이 영원한 16세라니, 돌팔이라서 머리가 역시 어떻게 된 건가?
한숨만 나온다.
“그래! 본녀의 나이도 영원한 방년(芳年)이다! 혈교의 주구인 네년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란 말이다!”
뒤이어 적사월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과년에 이어 방년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나이를 밝혀도 나는 상관없는데······.
왜들 저러는지 모르겠다.
“흥.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는 꼴이 가관이구나······. 아무튼 본녀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스스로 색욕을 선택한 너희 정파 위선자들······.”
구 부인의 눈동자에서 혈광이 반짝였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구 부인을 바라보며 한 발짝 나아갔다.
“구 부인의 말은 틀렸소. 색욕은 누구나 갖고 있고, 청춘남녀라면 눈이 맞아 사통할 수도 있는 건 맞소이다. 한창때의 선남선녀가 모이는 청춘의 연회가 용봉지회요. 남녀가 눈이 맞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과정과 결과라고 할 수 있소이다. 하지만.”
나는 구 부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 춘약과 미혼향 같은 수단이 끼어드니 문제가 되는 거요. 사람과 사람의 자연스러운 만남이라 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한 수단으로 증폭시켜, 이성으로 억누를 수 없는 색욕의 괴물로 만들어놓고 위선을 논하다니, 모순이 따로 없구려.”
아직도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철수······. 아직도 시답잖은 정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더냐?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서로 통해야 진정한 쾌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육체적 쾌락은 질과는 상관없이 오직 양만을 추구하는 싸구려 쾌락이요. 마음이 동반되지 않은 운우지락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소이다. 뭐 내가 찾아낸 진리를 인정하지 않아도 좋소. 어차피 그쪽이 뭐라 말해봤자 내가 세운 도(道)에 변함은 없으니.”
나는 구 부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이이익······!”
구 부인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아혈을 짚었다. 더 이상 그녀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 낭비다.
“앞으로 뒷수습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당 선배.”“그거? 흠······. 일단 천지회가 나서 증좌를 수집하고 무림맹에 고발한 후에 모용세가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야겠지? 자연스럽게 구 부인과 그 주동자들은 뇌옥에 갇힐 테고······. 도중에 혈교 관련 정보가 나온다면 무림맹에서 우리 천지회로 정보 공유를 해줄 거야. 청담회 연회에 참가한 후기지수들은······.”
그녀의 말대로라면 청담회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고 봐도 좋았다.
미래 정파 무림을 암중에서 지배하던 흑막 조직이 태동 단계에서 모조리 박살 난 거다.
그래, 경쟁자는 이렇게 일어서기 전에 미리 짓밟아줘야 했다.
이게 삭초제근이지.
당영령이 말을 이었다.
“가장 먼저 용봉지회 참가 자격을 박탈당하겠지.”
당영령의 말을 들은 나는 웃었다.
모용세가의 이름을 걸고 개최한 청담회 연회이니만큼, 여기 참여한 후기지수들은 거의 전부가 명문대파 출신. 이들이 모조리 용봉지회 참가 자격을 박탈당한다면······.
“흐흐흐흐······.”
입가에서 상남자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승리는 떼 놓은 당상 그 자체다.
검룡(劍龍)이라는 별호가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괴협의 별호를 버릴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
완전히 어둠에 잠긴 암실(暗室).
오직 어둠뿐인 그곳에 한 쌍의 붉은 혈광이 떠올랐다.
“구 부인이 실패했다라.”
스윽.
암실 탁자 위에 놓인 암호 문건을 본 흑의인의 혈광이 흔들렸다.
구 부인.
그녀는 오래전부터 혈교가 정파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모용세가로 잠입시킨 세작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모용세가주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은 구 부인이 마침내 청담회를 발족하여 후기지수를 포섭하여, 그들이 자라 정파 무림의 요직에 앉을 때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조금씩 정파 무림을 타락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계획이 완료되었을 때, 정파 무림 전체를 혈교의 수중에 떨어뜨린다.
그 기나긴 대계가 오늘, 막 주춧돌을 놓는 시점에서 전부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본 교의 사도로서······. 지존을 뵐 면이 서지 않는군······.”
그리고 흑의인은 이 계획의 총책임자이자 혈교에 단 열셋만 존재한다는 최고위 간부인 사도였다.
2인자인 부교주를 제외하면 사실상 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리. 그런 위치에 오른 흑의인이었기에 실패의 부담도 더욱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정파 무림을 자극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지회, 그 지긋지긋한 놈들이 이 사태를 주도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도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눈에 요사한 혈광이 계속 반짝였다.
“······정파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니 십만대산의 계획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흑의인의 혈광이 일렁이는 시선 끝에는 지도 위의 십만대산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