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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157화 (157/171)

157화 철벽

적사월의 돌발 선언에 접객실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 오직 연소월, 아니 적사월만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후후후후후. 후기지수로 위장하길 잘했구나.’

무려 천하제일미인 그녀 앞에서도 비현실적으로 냉정 침착을 유지하던 이철수가 보기 드물게 살짝 당황하고 동요하는 모습이 적사월은 마음에 들었다.

‘역시 사내들은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진실이었어.’

그녀가 보유한 위장신분 연소월의 나이는 열다섯.

지금의 이철수보다 두 살 어린 나이다.

‘연하가 정답이었어.’

적사월의 적안이 반짝였다. 그녀의 손이 이철수의 손을 구속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동안 상처받았던 천하제일미, 사파제일인의 자존감이 다시 차올랐다.

그래.

열다섯의 연소월이라면 이철수의 마음을 가져가는 것이 가능하다.

처음에는 살짝 수치스러웠다. 진갑(進甲)의 나이에 이른 그녀다. 이제 열다섯인 과년(瓜年)의 소녀를 연기하는 건 아무리 그녀가 위장과 연기의 달인이라더라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던 이철수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그것만으로도 연소월로의 위장은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62세 사파제일인 적사월이 아닌, 15세의 꽃다운 후기지수 미소녀 연소월이 아니던가?

열다섯 살의 소녀가 할 만한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적사월은 그렇게 철면피를 깔면서 이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후후.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는 모습, 소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사와요. 하지만 소녀의 뜻을, 마음을 꺾을 수는 없사와요. 소녀는 반드시 이 소협의 여인이 될 것이와요.”

당황한 이철수를 향해 다시 한번 속삭이는 적사월.

‘소검후 천소빈, 괴의 당영령. 그 어린 년들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후후후.’

적사월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가 연기하는 연소월의 인격은 다짜고짜 고백을 내뱉은 소검후 연소빈과 지천명의 나이 주제에 과년(瓜年)의 소녀를 자처하는 괴의 당영령의 모습을 반반 섞은 상태였다.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간다면, 이철수 역시 당황할 터.

‘당연히 그래야지. 천하제일미인 본녀가, 위장 신분이기는 하지만 먼저 고백한 것이다. 본녀의 연심을 받지 않으면 사내도 아니지.’

적사월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우쭐대던 그때.

스윽.

이철수가 그녀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

이철수가 말했다.

“연 소저.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오? 연 소저와 나는 오늘 분명 첫 만남일 터인데, 다짜고짜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소.”

이철수의 말을 들은 적사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없던 일로 한다니? 이게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적사월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첫만남이 뭐가 중요해요? 이 공자. 소녀는 정사지쟁 때부터 공자를 흠모하기 시작하였고, 오늘 공자를 보면서 공자한테 첫눈에 반했답니다. 후후.”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의 그녀는 적사월이 아닌 연소월이다. 사랑에 빠진 15세 소녀답게 저돌적이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그래.

어차피 적사월의 진심이 아닌, 연소월의 진심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적사월은 스스로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와는 달리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다.

연소월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눈을 반짝이는 연소월의 모습을 본 흑사룡 위소련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는 괜히 본인의 흑색 단발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그녀의 시선이 연소월에게 고정되었다.

‘······여, 여인다워······.’

어려서부터 거친 흑도 방파 흑룡방의 후계자로 낙점받아,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흑룡방의 주인이 되기 위해 사내처럼 평생을 살아온 위소련이었다.

정사지쟁 전까지, 위소련은 본인의 그런 인생을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거친 흑룡방 사내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녀부터 앞장서서 사내답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러니 불가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머리도 짧게 자르고, 옷도 사내처럼 입은 그녀였다. 싸움에 거추장스러운 가슴은 붕대로 동여맸다.

하지만 정사지쟁에서 패하고, 이철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그가 책임진다는 소리까지 들은 이후.

지금까지 당연하다 여겨온 그녀의 삶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와 방도들 몰래 아녀자의 취미인 자수와 얼굴을 단장하는 화장품 등에 대해서 몰래 알아본 건.

그리고 오늘.

하오문주의 이제자인 휘봉 연소월을 직접 마주한 순간. 그녀는 동요했다. 휘봉 연소월. 그녀와 같은 사파의 후기지수이자 이철수, 유진휘와 함께 마교에 동행하게 될 소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흑사룡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파에도 후기지수 교류회는 있지만, 휘봉 연소월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파 내부에도 휘봉 연소월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사조(師祖)인 사도련주 염왕 적사월의 뒤를 이을 미인일 것이다 같은 소문 말이다. 그녀를 만난 후기지수가 극히 일부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얼마 전.

연소월의 실물을 본 흑사룡 위소련은 충격을 받았다. 연소월은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누구보다 여인답게 아름다운, 몸가짐이 단정한 미소녀였기 때문이다.

사내처럼 선머슴으로 자란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이자 상극인 연소월을 본 위소련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열등감을 느꼈다.

그녀보다 심지어 나이도 어린 소녀였다. 그런데 그녀보다 훨씬 여인답고,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연소월은 소문대로, 차기 천하제일미에 가까운 화려하고도 신비로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꾸미는 법을 몰라서 수수하기 짝이 없는, 선머슴인 그녀와는 반대였다. 오히려 연소월의 곁에 설수록 위소련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뼈를 깎는 수행으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위소련이었지만, 절정의 무위도 그녀를 선머슴에서 미소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 그 자식이 연소월한테 반하면 어쩌지?’

내심 그런 고민까지 진지하게 할 정도로, 위소련은 구석에 몰려 있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걸 위소련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철수에게 연소월이 고백한 순간. 위소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마음속에서 검은 감정이 솟구쳤다. 그건 질투였다. 위소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와 이철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적대 관계였다. 그러니 연소월과 이철수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럴 명분이 없었다.

명분?

‘사파가 언제부터 명분을 신경 썼지?’

위소련은 속으로 웃었다.

명분 따위를 신경 쓰는 위선자 정파와 사파는 다르다. 사(邪)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추구한다. 대명제국 초기, 황실 주도로 무림맹이 설립되었을 때 사파가 무림맹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자유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사파에서 명분은 허울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위소련이 탁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오라버니.”

위소련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연소월과 이철수,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위소련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 지금 연 소저의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 그러니 어서 마교행에 대한 말씀을······.”

“후후후. 중요하지 않다니요. 위 언니. 왜 언니 마음대로 판단하시는 거예요? 소녀의 인생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이에요. 게다가 오라버니라뇨. 그럼 소녀도 이 소협을 오라버니라고 부를······.”

옆에서 연소월이 호호호 웃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고 있었다.

‘이 건방진 어린 년이······! 본녀한테 언니라고 조금 불러줬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감히······. 본녀가 보는 앞에서 가가를 넘보다니······!’

적사월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보다 무려 40년도 더 어린 위소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감히 그녀 앞에서 대놓고 질투심을 보이는 것이다. 건방졌다.

연소월의 말을 들은 위소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녀는 본인의 감정을 아직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연소월에게 이철수가 넘어가는 건 볼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연소월의 고백은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연 소저.”

위소련이 말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연소월을 향했다.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오직 저뿐입니다.”

위소련이 얼굴을 붉히면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렇다.

그것이 내기의 결과더라도.

천하에서 이철수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가받은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위소련 그녀뿐이다.

게다가 오늘 이철수와 처음 만난 연소월과는 달리, 그녀는 정사지쟁 때부터 이철수와 연이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본녀가 불쌍히 여겨 동행을 허락했건만, 머리 끝까지 기어오르려 들어?!’

기가 찬 연소월, 아니 적사월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뭐라 말하려던 순간.

“그만.”

접객실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철수의 목소리였다.

*

대체 지금 뭐 하는 꼴인지.

머리가 아프다.

특히 연소월, 아니 적사월. 이 할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후기지수로 위장해서 마교로 잠입하는 건 뭐, 그럴 수도 있었다.

혈교의 발호가 포착된 지금 상황에서 가장 수상한 문파는 마교였으니까. 마교의 총본산에 직접 잠입해서 정보를 뽑아내는 건 객관적으로 봐도 제법 괜찮은 첩보 작전이었다.

하지만 대체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진심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나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위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마교행 관련 이야기입니다.”

나는 위소련의 편을 들어주었다. 오라버니를 본인만 부를 수 있다느니, 하는 사족은 뭐.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서 그냥 넘어갔다.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흑색 단발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여, 연 소저. 들었습니까? 사적인 감정은 잠깐 접어두시길 바랍니다.”

“흥. 알았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는 사실, 두 분 모두 기억해두셨으면 좋겠어요!”

한 발짝 물러서는 적사월.

대체 왜 저런 집착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못다한 말을 풀어놓았다.

“우선 일주일간 공동파 본산에서 휴식한 뒤, 공동산을 출발하여 돈황을 경유, 천산남로를 통해 마교의 영역인 신강으로 향할 생각이오.”

신강.

현대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신장 위구르를 점령한 현대 중국과는 다르게 무림의 신강은 이세계 중세 명나라의 영토가 아니다. 중원 영역 밖의 대지. 그래서 새외(塞外)이다.

마교는 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천산 산맥에 자리잡고 있었다.

“먼 여행길이 될 터이니, 두 분 모두 여행 준비를 제대로 하시길 바라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흑백양도의 후기지수가 모두 공동산에 모였으니.

이제 마교로 가서 후기제일고수(後起第一高手)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게다가 여유가 남으면 마교의 아리따운 소저들에게 내 매력도 전파하고 말이다.

흐흐흐흐.

천마도 나의 색도를 방해할 수는 없다.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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