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소녀의 풋풋함
대전을 나온 적사월은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한다.
그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고 난 뒤부터 뭔가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후후후후. 천마. 본녀를 깔보다가 역공을 맞다니 꼴 좋은 것이니라.’
거기에 천마에게 역공을 가하기까지.
보람찬 하루였다.
적사월은 천마전을 가로질러 숙소로 배정받은 별원에 도착했다.
잘 조성된 정원과 제법 화려한 전각 사이로 그녀의 시야에 흑사룡 위소련의 모습이 보였다.
“연 소저. 이제 왔구려.”
쭈뼛거리면서 그녀를 맞이하는 위소련.
그녀를 바라보면서 적사월은 웃었다. 찰싹. 적사월이 위소련에게 달라붙으면서 말했다.
“네. 위 언니. 소녀를 기다리셨어요?”
“그, 그건······. 딱히 아니지만······. 우리 앞으로 배첩이 왔소.”
위소련은 다짜고짜 달라붙는 연소월을 떼어내면서, 부스럭대면서 품에서 배첩을 꺼내 연소월에게 건넸다.
연소월, 아니 적사월은 배첩을 받아 꺼냈다.
“천마지연······. 이로군요!”
적사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런 연소월을 보던 위소련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서 말인데. 연 소저······. 부, 부탁이 하나 있소.”
덥석.
위소련이 연소월의 팔뚝을 잡았다. 위소련의 시야에 연소월의 모습이 담겼다. 사내처럼 자라와, 꾸밀 줄 모르는 선머슴에 불과한 그녀 본인과는 다르게 연소월은 누구보다 여인다운 미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녀 교육을 받는 하오문의 후기지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소월은 이철수를 당당히 연모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위소련의 입장에서는 연적이나 다름없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의 위소련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부탁이에요, 언니?”
적사월이 요염하게 웃으면서 위소련을 꽈악 끌어안았다.
코 끝으로 밀려드는 달콤한 향기에 위소련은 당황했다.
‘소, 소녀의 몸에서는 이런 향기가······!’
위소련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항상 사내들과 함께 땀내 나는 수행을 이어가는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맡아보는 싱그러운 향기였다.
‘나, 나는 땀 냄새밖에 안 나는데······.’
위소련의 입술이 살짝 삐죽였다. 새삼스럽게 꽃다운 소녀 같은 연소월의 모습과 선머슴인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흑룡방을 물려받기 위해서, 사내들 틈에서 사내처럼 자랐던 그녀였다.
어렸을 때도 가끔 또래 소녀들이 부럽기는 했다. 하지만 장차 흑룡방의 주인이 되려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철수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됐다.
정사지쟁의 그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반라(半裸)의 몸이 된 순간.
그녀를 책임질 사내는 이철수 말고는 없었다.
지금까지 사내보다 더 거친 사내 같은 여인이 되기 위해 인생을 갈아 넣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그녀가 소녀라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그녀의 수행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게다가 음란하다는 손가락질에 정사지쟁 패배의 원흉이라는 소리까지. 대외적으로는 쉬쉬하고 있지만 위소련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사파 내부에서 입지가 줄어들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그녀를 책임져줄 사람은 오직 이철수뿐이었다. 그가 전부 책임지면 안 된다.
‘그때 다른 소녀들처럼······. 여인의 도리를 배웠다면’
이철수와 재회한 이후 지금까지.
아니 훨씬 전부터 위소련은 신경 쓰였다.
이철수 곁에 있는 소녀들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그녀 본인의 모습이.
서문청하와 서하린, 그리고 검후 은설란까지. 전부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로 여인다운 매력을 뽐내는 소녀들이었다.
반면에 위소련 본인은 아니었다. 여인의 매력 따위는 하나도 없는 선머슴 같은 여자. 모든 사내들이 꺼리는 최악의 여인, 그것이 그녀였다.
그러니 아무리 이철수가 책임진다고 말했더라도, 다른 여인들이 그의 옆자리를 모두 선점한다면? 어쩌면 거기에 그녀의 자리는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흑룡방에는 오직 땀내 나는 사내들밖에 없었다. 아녀자의 도리를 가르쳐줄 만한 위인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인 방주는 아직 그녀의 훈육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건 그녀와는 모든 것이 반대인 연소월에게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하필 연회였다. 사석이면 모를까, 연회라는 공석에서 여인답지 않은 모습으로 다른 소녀들과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 나도······. 이, 이번 연회에는 소, 소녀다운 모습으로······. 나, 나가보고 싶다.”
위소련은 수치를 무릅쓰고, 얼굴을 붉히면서 자존심을 접으면서 부탁했다.
위소련의 말을 들은 연소월은 웃었다.
적사월은 62년의 연륜을 통해 위소련이 꺼낼 제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위소련은 이미 이철수를 사모하는 몸. 하지만 그녀에게는 소녀의 풋풋함이 부족했다.
물론 45년 경력 천하제일미로서 적사월은 위소련의 매력을 십 할 살려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공짜로는 안 되지.’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적사월은 웃었다.
“좋아요. 언니.”
적사월은 언니를 강조하면서 웃었다.
“저, 정말이냐!?”
“네! 물론······. 그냥 도와주지는 않을 거예요.”
“흥. 나 또한 네가 그냥 도와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뭘 원하지?”
연소월의 말에 위소련이 답했다.
사파 무림에서는 이해득실의 정확한 계산이 중요하다. 대가를 요구하는 연소월의 태도는 사파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했다.
적사월은 그녀의 질문을 받고 웃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그야, 저와 함께 있을 때 언니는 무조건 제 편을 들어주는 거죠.”
“무조건?”
“물론 무리한 요구는 거부하셔도 괜찮아요. 어때요. 언니?”
적사월의 시선이 위소련을 향했다.
‘이렇게 된 이상 본녀는 반드시······. 가가의 정실부인이 되겠다. 후후. 정실의 첫 번째 의무는 바로 내조와 집안 관리, 첩 관리지······. 가가의 첩 후보는 전부 본녀의 통제 아래 들어와야 하는 것이야.’
적사월의 적안이 빛났다.
적사월은 연심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도 계획했다.
62년 일생에서 이철수 같은 사내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는 사내는 오직 이철수뿐이다.
그러니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의 여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단순한 부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미인 그녀였다. 기왕 사내의 여인이 된다면, 최고의 자리.
정실부인을 노려야 했다.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위소련을 바라봤다.
“으, 응. 그 정도라면 괜찮다.”
위소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한 요구만 안 한다면, 그 정도 대가는 얼마든지 치를 수 있었다.
위소련의 승낙에 적사월이 요염하게 웃었다.
“좋아요! 언니, 그럼 제 방으로 가요.”
그렇게 연소월에게 손목을 잡힌 위소련은 그녀의 방까지 끌려갔다.
*
적사월과의 대담이 끝난 후.
천마는 적사월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마음이라.’
인간의 모습을 한 괴력난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초월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마였다. 천애고아로 자랐고, 부모의 얼굴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그의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부분이었다.
부모의 부재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리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는 독존했다.
신교를 지배하는 강자존의 철혈율 아래에서 평생을 자랐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이 내린 무공 재능이 그를 천마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공이 인간의 전부라 생각했다. 신교에서는 무공 말고 다른 가치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으니까.
인간성도 쓸모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지의 고수, 적사월은 아니라 했다. 무공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성이 필요하다, 그리 말했다.
‘인간성이라.’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던 거였다. 게다가 적사월은 사랑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를 가엾다고 말했다. 전부 생소했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가 언급한 이야기였다. 같은 경지의 절세고수이자 사파제일인이 한 말을 천마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면······.’
신교에서 사랑, 감정을 가장 잘 아는 인물.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색마.’
색마.
인간의 욕망, 오욕칠정에 통달한 그라면 사랑과 감정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모든 판단을 끝낸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환희궁.
이철수와 의형제를 맺고, 그를 돌려보낸 이후 색마는 술 연못 근처에서 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마음의 쾌락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관점.
인간의 오욕칠정에 통달했다 생각한 색마였지만, 마음의 쾌락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환희궁의 절학은 모조리 육체의 쾌락만을 다루는 절학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섭혼술처럼 마음을 다루는 절학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의동생 이철수가 언급한 진정한 마음의 쾌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색마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진정한 마음의 쾌락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육체의 쾌락은 이미 누릴 대로 누려봤다.
색마는 이제 육체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쾌락, 마음의 쾌락, 이철수가 던진 화두야말로 지금 색마가 추구하는 길이었다.
색마가 그렇게 한참 고민하고 있던 그때.
색마의 기감에 압도적인 존재감이 드리워졌다. 환희궁의 색기를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폭력적인 기감을 지닌 인물은 단 한 명.
신교의 지존, 천마뿐이었다.
색마는 곧바로 기감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오체투지했다.
“지존을 뵙습니다!”
색마의 목소리가 주지육림에 울려 퍼진 그때.
허공에서 유유히 검은 장포를 입은 인영 하나가 정자에 내려앉았다.
천마였다.
천마의 시선이 색마를 향했다.
“일어나 앉아라.”
“알겠습니다. 지존이시여.”
명을 들은 색마는 곧바로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색마의 명을 받은 시종이 정자에 놓인 술상을 새로운 술상으로 교체했다.
시종이 물러나고, 둘만 남은 상황에서 색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존이시여, 이리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왕림하셨나이까.”
색마는 오마(五魔) 중에서도 가장 무위가 낮은 고수.
게다가 당대 천마는 여색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색마와의 연은 거의 없었다. 개인적으로 대면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사전 통보도 없이 천마가 찾아온 것이다.
색마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마의 시선을 받은 천마가 말했다.
“······색마. 너는 인간의 오욕칠정에 대해 통달하였다지?”
“미천한 잔재주일 뿐입니다.”
“사랑, 감정,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혹시 본좌한테 알려줄 수 있나?”
천마의 말을 들은 색마는 멈칫했다.
원래라면 당연히 알려줄 수 있다고 자신 넘치게 대답할 수 있던 색마였다.
하지만 이철수와 만난 지금은 아니었다.
이철수는 그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쾌락은 반쪽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건······. 소인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본좌한테 고하라.”
천마의 말에 색마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의 의동생인 괴룡 이철수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천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마가 반문했다.
“의동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