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사랑의 가르침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천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천마의 무기질적인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강렬한 흥미가 숨겨져 있었다.
탁탁탁.
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틀린 부분부터 하나 정정하자면 저는 괴룡이 아닌 검룡입니다.”
“······.”
내 말을 들은 천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나는 검룡이다. 이 별호를 얻으려고 용봉지회 결승 나체 비무의 치욕을 감내하고 도황의 일도를 받아낸 나였다. 무림맹 공인 별호가 있는데 괴룡이라니?
이럴 수는 없다.
천마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내게 말했다.
“그래, 검룡. 마음의 쾌락이라는 것이 뭐지?”
“쾌락에도 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질의 차이?”
“그렇습니다. 단순한 육체의 쾌락은 저급한 쾌락에 불과합니다. 그런 저급한 양적 쾌락은 짐승의 쾌락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운우지락을 즐겨도 육체의 교접으로는 마음의 공허함을 메울 수 없는 것입니다. 천마 선배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을 들은 천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배고픈 돼지보다는 배부른 인간을, 불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는 소크라테스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질적인 쾌락.
인간이라면 질적인, 정신적인 쾌락을, 나아가 질적 쾌락의 충족을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서양 공리주의의 대종사 존 스튜어트 밀 선생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케겔 운동의 신공절학을 창시한 미국 산부인과의 대종사 아놀드 케겔 선생님과 비견될 만한 대종사의 가르침이었다. 내 말을
“확실히, 그렇지. 본좌는 운우지락을 탐닉했지만, 거기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천마가 내 말을 듣고 살짝 멈칫하다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천마의 부인은 일곱 명. 천애고아에 삼류 마인 출신인 백무량이 당대 천마의 자리에 오르자 칠대마종에서 천마에게 바친 일곱 미녀들이었다.
그렇다. 천마는 삼처사첩을 완성한, 내 롤모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쾌락을 배제한, 오로지 육체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운우지락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통하는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의 운우지락. 그런 운우지락이야말로 심신(心身) 양쪽을 모두 충족하는 궁극의 쾌락인 것입니다.”
심신(心身)을 모두 충족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색도였다. 실제로 섹스에 정신적 쾌락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현대 의학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했고 말이다. 서로 사랑할 때 분비되는 일명 러브 호르몬인 도파민이 바로 그 증거였다. 사랑하는 남녀의 섹스에서는 도파민이 평소의 배로 분비되면서 쾌락을 더욱 배가시켰다.
“육체만의 관계······. 그럼 본좌더러 본좌의 부인들을······. 사랑하기라도 하라는 말이더냐?”
천마가 내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애초에 혼인이랑 사랑의 결정체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내로서, 한 여인을 책임지기 위한 궁극의 의식, 그것이야말로 혼인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부인과 자녀를 방치하는 사내가 어찌 천하를 평정하고, 절대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천마는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하지만 난 수신제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더불어 어떻게, 사랑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도.”
천마가 내게 말했다.
나는 천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합니다. 사실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천마 선배도 저도,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는 고아이기 때문이겠죠.”
그렇다. 천마와 나는 고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현대 한국에서도,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나는 고아였다. 부모도 없었다. 일가친척이라는 자들은 나를 짐덩이처럼 생각했다. 차라리 없는 쪽이 나았다.
나는 홀로 자랐다.
황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자금성. 그곳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준 건 오직 황상뿐이었다.
나는 천마를 바라봤다. 천마의 이력에 대해서는 동창의 정보 기록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삶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천애고아. 부모의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천마의 비틀린 성격은 그런 성장 과정에서 유래된 거겠지.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배워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난 그들한테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천마 선배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공이죠?”
“그렇다.”
내 말을 들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가 가족에 관심이 없는 것도, 그의 자식들이나 부인들이 그가 생각하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대공녀 백천화. 훗날 소교주가 되는 그녀는 천마만큼은 아니지만, 현경에 오르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타고났다.
그녀를 망친 건 천마였다. 백천화는 누구보다 천마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천마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와 대등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가 관심을 가진 건 오로지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력의 보유자, 우리 사형뿐이었다.
만일 천마가 백천화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백천화의 천재성이 개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백천화는 나보다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나도 현경을 찍었는데, 그녀가 못 찍을 리가 없었다.
“그럼 대공녀한테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그녀의 재능은 천마 선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천화 말인가? 흠. 본좌가 보기에 천화의 재능은 범인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수준, 고작 오마(五魔)와 대등한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만. 물론 세인들이 보기에는 뛰어난 재능이라 할 수 있지만, 본좌의 핏줄을 이은 혈육의 기준으로는 한참 모자란 천치에 불과하지. 본좌는 거기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다. 물론 네 말대로 잠재력을 십 할 모두 개화한다면, 어쩌면 훗날에는 나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본좌는 그런 낮은 가능성에 별로 흥미가 없다.”
천마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선배. 처음부터 완성된 재능과 미완의 재능을 선배의 손으로 완성하는 쪽. 어느 쪽이 더 흥미로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공녀가 가장 바라는 건, 아버지인 천마 선배의 사랑과 관심, 칭찬인 것입니다. 그것만 충족된다면, 대공녀의 재능은 눈부시게 개화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천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설마 마교의 지존이자, 천마(天魔)의 재능을 타고 태어난 천마 선배가, 고작 딸의 재능 하나 개화 못 시킨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천마 선배의 재능은 그 정도 수준에 불과한 겁니다.”
나는 천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리는 도발을 내뱉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백천화는 아버지인 천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수행을 거듭해 화경의 경지에 올라 소교주의 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천마는 그런 백천화를 끝내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백천화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결국 최악의 형태로 폭발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뒤에 소교주가 된 백천화가 오마의 세 명을 포섭해 천마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마교 내전의 승리자는 천마였다. 천마는 직접 소교주의 목을 치고 내전을 끝냈다. 하지만 내전의 결과 마교는 상당한 내상을 입고 대외적으로 사실상 봉문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 내전에 대한 동창 정보는, 아무리 마교가 새외라는 점을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없었다.
뭐, 어차피 마교도 제국의 적. 그런 적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명제국에서는 어부지리였다. 그렇기에 동창에서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아마 혈교가 개입한 거겠지.’
십수 년 뒤에 일어나는 마교 내전. 그 배후에는 혈교가 있었던 것이다. 혈교의 마교 장악 시도가 내전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거겠지.
그러니 마교 내전을, 분열을, 나아가 혈교의 수작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천마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천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흐흐흐흐, 후후후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말을 들은 천마가 탁자를 탕하고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몸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피어올랐다.
“괴룡. 아주 재미있는 말이로군. 본좌 앞에서 감히 본좌의 재능을 당당히 논하다니.”
“저는 당연한 말을 한 겁니다. 마교의 지존이라면, 우내삼존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고수의 위상을 결정하는 건 단순한 무공뿐만이 아닙니다. 독문절학을 이어받을 제자, 자식의 성취도 중요합니다. 천마 선배가 신승, 염왕을 뛰어넘고 진정한 천하제일이 되려면 우선, 자식 농사부터 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기세를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면서 말했다. 천마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탁.
천마가 탁자를 두드리자 기세가 사라졌다.
“괴룡. 너는 볼수록 흥미롭군. 백도 무림에서 너 같은 별종이 나와서 정파제일 후기지수의 자리를 차지할 줄은 신승 그 빡빡머리 노친네의 잘난 육신통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승 선배는 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절 검룡이라고 인정하셨으니까요.”
그래.
도황이랑 신승은 날 꼬박꼬박 검룡이라고 불러준다고.
“그래. 확실히 네가 제시한 건 새로운 관점이군. 그럼 묻지. 본좌가 대공녀한테 어떻게 대해야, 대공녀의 성취를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녀의 성취를 칭찬하십시오. 그리고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대공녀가 원하는 건 천마 선배의 관심과 인정입니다. 그걸 준다면, 동기를 부여받은 대공녀의 재능은 개화할 것입니다. 칭찬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
동기부여.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비법이었다.
당근과 채찍 중에서 지금까지 천마는 채찍만 내린 것이다.
내 과학적인 말을 들은 천마는 후루룩하고 다시 차를 마셨다.
“그렇게 대공녀의 무공 성취가 높아진다면, 자연스럽게 천마 선배는 대공녀를······. 아버지로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의 쾌락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쾌락이 아닌 인간의 쾌락이 말이죠.”
“······재미있군.”
탁.
천마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네 말은 잘 들었다. 세 치 혀로 본좌를 이렇게 농락한 건 네놈이 처음이로군. 괴룡. 오늘 너와 나눈 대화는 제법 재미있었다.”
천마가 옅게 웃었다. 그의 시선에 나를 향항 강렬한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남자에게 저런 뜨거운 눈빛을 받다니.
나는 살짝 몸을 빼면서 말했다.
“저 또한 천마 선배와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천마무제가 끝나고 또 이렇게 사석에서 만나도록 하지. 괴룡. 그때도······.”
천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부디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오늘처럼.”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은 필요 없다.”
천마의 한 마디와 함께 섬광이 번쩍이며 기파가 응접실을 헤집었다.
곧이어 나는 창살 너머로 천마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능공허도를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응접실에 홀로 남은 나는 비어버린 천마의 찻잔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제 곧 천마지연이다.
대공녀 백천화,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