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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女
114. 직소女 (1)
‘건축의 역사’ 교양 과목 강의실. 지왕은 노트와 책을 펴놓고 거기에 적힌 내용들을 정신없이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악! 급하다 급해! 왜 하필 그때 잠들어가지고 …….’
지왕이 이렇게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은 바로 5분 후에 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는 내내 중간시험 기간이었는데, 지왕은 어제까지 제법 시험을 잘 치뤄왔었다. 그로인해 마음이 놓여버려서인지, 어제는 괜히 여유를 부렸고 급기야 ‘시험 공부를 할 때 절대 해서는 안 될 짓’, 그러니까 ‘침대에서 딱 10분만 눈 감았다가 일어나자’를 시전했다가 죽 끝까지 자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피곤이 쌓인 탓에 심지어 늦잠까지 자버리는 바람에 시험장까지 눈썹 휘날리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숨을 헐떡거리면서 벼락치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시험 감독관인 강사가 들어왔다. 강사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성질 급한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교탁 앞으로 채 오기도 전에 애들을 닦달해댔다.
“자, 자. 바로 시험 시작할 테니까 모두들 책하고 노트 집어넣으세요.”
그러고는 바로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거듭 다그쳐댔다.
“거기, 얼른 안 넣어요? 말 안 들으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고 쫓아낼 겁니다.”
이에 노트와 강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바심을 내던 지왕은 어쩔 수 없이 책을 책상 밑에 내려놨다.
“에이씨!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이윽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1학년들이 주로 듣는 교양 과목이라 시험은 객관식이었고, 몇 개 있는 주관식 문항도 단답형이 거의 다였다.
그러나 지왕은 시간에 쫓겨 벼락치기를 한 탓에, 매 문항마다 객관식 문제의 답이 항상 2개에서 헷갈리는 상황에 직면했다.
‘아이씨, 또 2개가 남냐? …… 이럴 땐 답을 고치면 안 돼. 처음 골랐던 게 답이라고.’
그러나 그게 말처럼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처음 문제를 봤을 때 둘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답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도무지 갈피가 안 잡혔던 것이다.
‘내가 이걸 먼저 골랐었나? 아니, 이거였나? …… 으악, 씨팔!’
한편 강사는 아까부터 지왕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흥. 저 녀석 당황하는 꼴을 보아하니 공부를 하나도 안 했나 보군. 보면 꼭 저런 놈들이 컨닝을 한다니까? 어디, 딴 생각 못하게 슬쩍 눈치를 줘볼까?’
그리 마음을 먹은 강사는 시험 감독을 하는 척 하면서 지왕의 책상 주변을 왔다갔다 맴돌기 시작했다.
지왕은 안 그래도 심란한데 강사가 계속 자기를 쳐다보며 주위를 맴돌자 부쩍 더 신경이 쓰였다.
‘아 짜증! 왜 이러는 거야? 나하고 무슨 웬수 진 일 있어?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
그런데 그때 옆을 힐끔 쳐다보다 불쑥 강사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응? …….’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전신에서 도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스타일의 강사는 평소엔 무슨 치마하고 원수를 졌는지, 아니면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인지 주구 장창 바지만 입고 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만은 꽤나 쌔끈한 정장 치마 차림을 하고 있었다.
‘와아~, 미끈한 다리 ……. 그나저나 오늘 웬일이냐? 안 입던 치마를 다 입고. 데이트라도 있는 건가?’
지왕은 시험을 망친 현실에서 도피라도 하고 싶었던 듯 저도 모르게 강사의 다리만 계속 흘끔거렸다. 하지만 음흉한 눈초리로 대놓고 강사의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다 그만 강사와 눈이 딱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앗!’
지왕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팍 숙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강사의 비위를 거스른 후였다.
‘뭐야, 이 자식! 지금 내 다릴 훔쳐본 거야? 그것도 그런 음흉한 눈으로? 이게 감히 …….’
여자는 모욕감과 수치심,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어깨가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물론 지왕도 지왕대로 죽을 맛이었다.
‘아이씨, 오늘 무슨 날이야? 자꾸 왜 이래? …… 그나저나 왜 안 지나가고 옆에 계속 있지? 정말로 화났나?’
그러면서 강사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던 지왕은 대번에 다시 눈을 팟 내리깔았다. 강사가 마치 장승처럼 눈을 부라리며 지왕을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헉! 씨팔, 좃댔다.’
그러나 강사는 분을 참기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왕에게 ‘너 지금 내 다리 훔쳐봤지! 이 변태 새끼야!’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떠벌리는 것 또한 창피한 일이기도 했고, 만약 지왕이 작정하고 잡아뗀다면 자기만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문득 ‘지왕의 책상 면에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이 강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다!’
강사는 다짜고짜 지왕에게 소리쳤다.
“학생! 학생 지금 컨닝했지?”
지왕은 어안이 벙벙했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나 강사는 계속 쏘아붙였다.
“책상 위에 이거 뭐야? 이거 커닝하려고 몰래 적어둔 거잖아! 이러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지왕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거 제가 한 거 아녜요!”
“아니긴 뭐가 아냐? 이거 학생 책상 맞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
“그럼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남의 책상에다가 대신 컨닝할 거 적어주는 놈이 있을 리도 만무하잖아!”
“아무튼 저는 아니라니까요! (욱! …….)”
지왕은 울컥했다. ‘방금 내가 다리 훔쳐본 것 때문에 이러는 거죠?’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랬다간 누명을 벗기는커녕 오히려 ‘파렴치범’으로까지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내뱉지 못하고 그냥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그런데 가만 보니 책상 면에 적혀 있던 내용들이 이 시험 과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이었다. ‘미술, 디자인’ 같은 문구들이 보이는 걸 보니 다른 교양 과목 시험 때 누군가 커닝을 하기 위해 적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지왕은 반색하며 강사에게 반박했다.
“이거 자세히 좀 보세요. 이 과목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잖아요!”
그러자 지왕의 예상대로 강사는 대번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뭐? 그, 그건 …….”
그러나 이대로 밀렸다가는 강사도 끝장이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막 우겨댔다.
“상관없긴 뭐가 상관없어? 학생은 지금 내가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이 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그러더니 바로 지왕의 시험지를 뺏어서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소리쳤다.
“아무튼 학생은 이번 시험 0점 처리니까 당장 나가!”
지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에?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러고는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애들보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리들 와서 이것 좀 봐 봐요. 여기 적힌 내용이 이 과목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러자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학생 몇몇이 지왕의 책상 위에 적힌 것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에 다급해진 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예요? 모두 부정행위로 쫓겨나고 싶어요?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아 시험이나 보세요!”
지왕은 정신이 멍해졌다.
‘씨발, 이거 아주 작정을 했구만……. 그래, 나가자. 어쨌든 내가 다리를 훔쳐본 건 맞긴 맞으니까.’
그러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터덜터덜 나갔다.
지왕이 교실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강사는 그제야 득의양양해하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훗! 별것도 아닌 주제에 까불고 있어.’
그러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무튼 큰일 날 뻔 했어. 하마터면 쟤한테 덮어씌운 걸 들킬 뻔 했으니.’
그런데 지왕은 마음을 비웠음에도 막상 복도로 쫓겨나고 나니 새삼 굉장히 억울했다.
‘그래.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어디 골탕 좀 먹어봐라!’
그러고는 뒷문 쪽에 숨어 문에 나 있는 유리창 너머로 교실안을 훔쳐보며 기회를 노렸다.
다행히 마침 강사가 손에 든 시험지를 떨어트린 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기 때문에, 허리를 숙인 강사의 엉덩이를 아주 좋은 각도에서 폰카로 찍는 데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됐다! 어디 그럼 …….’
지왕은 폰 화면에 강사의 엉덩이 사진을 불러내 사타구니 쪽에다 원격 애무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돌연 다시 마음을 접어버렸다.
‘에이, 관두자. 내 과실도 있는데, 그 책임을 무조건 다 강사 탓으로 돌려서 복수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 으휴, 그냥 애들하고 술이나 마셔서 풀자.’
그러고는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쿨하게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