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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TV女
127. 아메리카TV女 (1)
지왕은 PC방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왕따였던 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끄럽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담배 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어쩌다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약속 장소에 나와 버리게 되었다.
‘아 씨, 이 앞의 일정이 이렇게 일찍 끝날 줄 누가 알았냐고. 제길.’
그러다 PC방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냥 롤이나 좀 할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게 되었다.
요즘 PC방도 금연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역시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담배 냄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만큼 너구리 소굴은 아니었어도 피우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했다.
지왕은 나름 담배 연기가 적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PC화면을 켰다.
“응?”
그런데 화면엔 난데없이 ‘아메리카 TV’ 창이 띄워져 있었다.
아메리카TV. 일종의 개인인터넷방송 사이트로서 BJ들이 방송하는 것을 보면서 재밌으면 시청자들이 ‘별사탕’ 쿠폰을 쏘기도 하는데, BJ들은 그것을 현금화함으로써 수익이 되는 그런 서비스였다.
평소 지왕은 아메리카TV나 다른 개인인터넷방송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냥 얼굴 이쁜 애들 나와서 이야기하는 거, 엉뚱한 애들 나와서 엽기 행동하거나 먹방 하는 걸 보고 왜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그닥 공감이 안 가서였다.
주변에서 그런 걸 보는 것을 즐기는 애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았을 땐 내심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던 흥미가 새로 생rusk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애초엔 아무 생각 없이 그 창을 닫고 게임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방송 화면 안으로 한 여자애가 들어왔다. 방송이 끝난 건 줄 알았는데 사정이 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지왕은 예쁘장한 그 여자애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얼떨결에 그냥 계속 보고 있게 되었다.
그 방송의 BJ의 이름은 ‘순진녀’. 그러고 보니 지왕은 그 이름을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듯 했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해 보이는 외모와 몸짓으로 별사탕 수익으로만 월 천만원대의 수익을 벌고 있는,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여자 BJ중 한 명이었다.
방송 내용은 별거 없었다. 그냥 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청자와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 다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별거 아닌 거에도 별사탕을 마구 쏴주면서 방송 내용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지왕은 처음엔 여자의 외모에 끌려 보게 되었지만, 20분도 채 안 돼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닥 재미는 없네. 이런 걸 어떻게 매일 챙겨 보냐? 뭐 취양존중이긴 하지만 …….‘
그러면서 이제 막 창을 닫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순진녀가 난데없이 이벤트 당첨자 발표를 한다는 말에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멈칫했다.
‘응? 이벤트? 이런 곳에서도 그런 걸 하나?’
순진녀의 말은 이랬다.
“지난주에 신청한 분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이곳 스튜디오, 그러니까 저희 집으로 초대를 해서 같이 방송을 하게 될 분을 뽑는다고 했었죠? 그 발표일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주셨는데요, 그 중에서 뽑히신 분은 바로 …… 음, 닉네임이 좀 거시기 하신 분이라서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가 뭐한데, 그래도 발표는 해야 하니까 …… 그 분은 바로 ‘똘똘이왕’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축하드려요~! 당첨되신 똘똘이왕님은 방송 참여가 가능한지 확인해야 하니까 오늘 안으로 쪽지를 보내주세요. 만약 안 보내시면 어쩔 수 없이 내일 다른 분을 다시 추첨해야 하니까요. 아셨죠? 아~, 어떤 분일까? …….”
순진녀는 그러고서 계속 이런 저런 수다를 잘도 이어갔다. 그런데 지왕은 마우스에 얹고 있던 손이 막 떨리고 있었다.
‘으헉! 이, 이거 내가 가도 되는 건가?’
당연히 응모를 한 적이 없으니 자신이 당첨된 것도 아닌데도 지왕이 놀라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실은 앞에 PC를 이용한 사람이 자기 아이디로 이 방송 서비스에 로그인을 해놓고 그냥 나가버린 걸 지왕이 이어받아서 보고 있었던 것인데, 그 로그인 이용자의 닉네임이 바로 ‘똘똘이왕’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걘 방송 안 봤으니 당첨 된 걸 모를 거 아냐? 내가 지금 쪽지 주고받은 다음에 싹 지워버리면 되지 않겠어?’
그렇게 고민하던 지왕은 결국 자신이 ‘똘똘이왕’인 양 위장하여 순진녀에게 쪽지를 보냈다. 답장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고 방송 날짜는 이틀 뒤로 잡혔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지왕은 신이 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러댔다.
‘으흐흐! 이런 횡재가!’
그러다 불쑥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싹텄다.
‘응? 잠깐. 그런데 요즘 이런 데 나오는 여자애들도 조명빨, 화장빨, 화면빨로 위장한 경우가 많아서 실물은 별로인 경우가 많다던데. 얘도 혹시 그런 부류인 건 아니겠지?’
이에 바로 ‘BJ 순진녀 실물’로 구글링을 해봤다. 그리하여 어렵지 않게 찾은 순진녀의 졸업 사진은 지금의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오오~! 자연산 맞네! 우와~! 이런 애가 연예인 안하고 왜 이런 걸 하고 있대? 뭐 하긴 이게 연예인보다 더 쉽고 돈도 억대로 버니까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긴 하겠네.’
그런데 그렇게 한 걱정이 해소되고 나니, 곧장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방송에 나오면 얼굴이 팔리는 거잖아? 그건 좀 그런데 ……. 가면이라도 써? 얘한테 방송에 가면 쓰고 나와도 되냐고 물어볼까? …… 아니야. 미리 물어보면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지도 몰라. 그러다 당첨 취소당할 수도 있고. 그러니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당일 날 가서 가면 쓰는 거 허락 안하면 출연 안하겠다고 뻐팅기자. 그럼 방송 시간 때문에라도 마지 못해 허락하지않겠어?’
그러고는 PC방 내의 천장과 벽 등을 샅샅이 살폈다.
‘흐음, CCTV도 없는 것 같군. 좋아, 완전 범죄다! 크크크, 캭캭캭!’
그리고 대망의 이틀 후가 되었다.
지왕은 순진녀가 일러준 대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열고 나온 순진녀는 방송에서 봤던 이미지와 똑같은 밝은 얼굴로 지왕에게 인사를 건넸다.
“똘똘이왕 님? 반가워요. 그런데 옆에 분은…… 혹시 여자 친구? 우와, 미인이세요!”
순진녀가 궁금해한 이는 바로 지왕 집 아래층에 사는 최면녀였다. 혹시나 진짜 ‘똘똘이왕’이 당첨 사실을 알고 올 것을 대비해, 만약 그럴 경우 그 녀석에게 최면을 걸어 돌려보낼 요량으로 최면녀도 함께 동행시켰던 것이었다.
집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원룸이었다.
“보통 인기 있는 BJ들은 매니저 등과 팀을 이루어서 방송을 한다고 들었는데, 순진녀님은 혼자 하시나봐요?”
“뭐 1인 방송인데 혼자 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죠. 게다가 제가 전공이 영상 쪽이어서 이런 거 다루는 거엔 익숙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저, 근데 기념사진 한번 같이 찍어도 될까요?”
“기념사진이요? 물론이죠. 폰으로 찍으실 거죠? 셀카봉으로 할까요? 폰 이리 줘 보세요. 제 셀카봉에다 달아 드릴게요.”
“아니요, 저하고 둘이서만 찍으면 되니까 셀카봉은 필요 없어요.”
지왕은 그러고는 자신의 폰을 최면녀에게 넘겨주고 자신과 순진녀의 기념사진을 찍게 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방송 시작 딱 10분 전, 지왕은 내내 망설이고 있던 것을 순진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
“네, 뭔데요?”
“그게 제가 방송에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좀 그래서요. 어떻게 얼굴이 안 나오게 방송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순진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네? 얼굴이 안 나오게 하는 방법이요?”
지왕은 내내 환하던 순진녀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하자 더 눈치가 보여 대번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네……. 이를테면 얼굴을 카메라 앵글 밖에다 위치시킨다던지, 아니면 가면 같은 걸 써서 …….”
그러면서 들고 온 쇼핑백에서 가면을 하나 주섬주섬 꺼내 보였다.
그러나 순진녀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아니 방금 전까지와는 180도 다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싸늘해졌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이벤트에 응모를 하지 말았어야죠? 안 그래요? 방송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금 인터넷 방송이라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지왕은 당혹스러웠다.
‘엇?’
아주 못마땅한 듯이 지왕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순진녀의 목소리엔 경멸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늦게 말한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건 없잖아?’
하지만 이렇게 될 것 까지 생각해서 최면녀를 데리고 온 지왕이었기에, 바로 최면녀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최면녀는 즉시 순진녀에게 다가갔다.
계속 열을 내고 있던 순진녀는 난데없는 최면녀의 접근에 당혹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뭐예요? 저, 저리 가요?”
그러나 그러면서 최면녀와 계속 눈을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면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최면 행위를 마친 최면녀가 도로 뒤로 물러나자, 순진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왕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뭐, 가면을 쓰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곧 방송 시작이니까 자리로 가죠.”
지왕은 좀 전의 일로 살짝 빈정이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 자기가 당첨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원인 제공도 자기가 한 것이기에 바로 기분을 풀고 방송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일로 순진녀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흥미는 반감돼 있었다.
‘흐음, 괜히 왔나? 따지고 보면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꾸역꾸역 할 만한 것도 아닌데 ……. 에라, 기왕 왔으니 대충 놀다가 가지 뭐.’
그리고 마침내 방송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