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직속상관의 상태가 이상하다 (10)
천천히 막사로 돌아갔다. 세른이 걷는 속도에 맞춰서 가다보니 저녁때가 다 돼서 도착하게 되었다.
“알프렌은말 두고 와. 얘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아이셀은 말에서내려 내게 묶여 끌려오고 있던 세른을 데리고 막사로 먼저 들어갔다.
나는 다시 마구간으로 갔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마구간 하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열려있는 마구간 문을 열고 말들의 자리를 찾아 놓았다.
“고생했어.”
말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밖에나와 있는 아스틴을 발견했다.
혼자 심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아스틴 씨.”
“아… 이름이 뭐였더라.”
“알프렌입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제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기억도 못 하는 거 같은데.
“맞다. 알프렌이었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계십니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머리가 아파.”
이 사람 전투지역에 있다가 왔다고 했었지.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붕대가 감기지 않은 곳에도 드문드문 상처의 흔적들이 보였다.
“잠들면 자꾸 꿈을 꿔서….”
“꿈 말입니까?”
아이셀의 말에 따르면 꽤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이런 사람에게도 전쟁은 무서운 모양이다.
더구나 그곳에서 이렇게 심하게 다치기도 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난 뭘 하고있는 거지?
바로 일어서자 아스틴은 반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가 놓았다.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아니다 참, 아이셀 씨가 찾던데. 가 봐.”
“알겠습니다. 그…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십시오. 춥습니다.”
“알겠어.”
아스틴은 웃음 지었다. 처음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 친한 척이 이번에는 잘 먹혔던 것 같다.
막사로 들어서자 파르안과 아이셀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셀은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부단장님에게 보고하고 그 애는 일단 지하에 감금해놨어. 그런데 역시 별 정보는 못 얻을 것 같더라고.”
세른이 보였던 태도로 봐서는 벌써 아는 것은 다 토해냈을 확률이 높았다.
“파르안은 그 문양에 대해 더 조사해 봐. 본 적 있는 사람도 찾아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셀은내 팔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었기에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긴장하며 기다렸다. 설마…….
“밖에 좀 나가자. 살 게 있어.”
“네? 뭘….”
“아스틴이 너무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선물 좀 사주려고.”
그런데 나는 왜…?
“둘이서 또 어디 나가세요?”
“아, 응. 잠깐 볼 일이 좀 있어서… 추운데 왜 나왔어.”
“답답해서요.”
아스틴은 싱긋 미소 짓고 우리를 지나쳐갔다. 문득 아스틴과 아이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보기에도 좀 어색하지?”
“음…. 네.”
아이셀이 아스틴을 대하는 목소리나 말투는 확실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억지로착한 척 연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누굴 위로해줘 본 적이 있어야지.”
음… 매번 가학적 위로만 당하는 입장이니까.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네 의견이라도 듣고 싶어서. 괜찮지?”
내 의견이라….
어쨌든 어설픈 머리 둘이라도 모이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거다.
“가시죠.”
“고마워 알프렌. 쓸모없는 놈이라고 했던 건 취소야.”
그건 진작 취소된 거 아니었어?
그렇게 아이셀과 함께 마을로 나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긴장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는지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가게를 찾고있었다.
나도 천천히 가게들을 보았다.
“인형 같은 건 어떨까요?”
“인형?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말씀하실 거면 전 왜 데려오셨어요?”
그제야 아이셀은 멋쩍게 웃었다.
“미안. 아스틴이 그런 걸 좋아할까 모르겠네.”
“외로울 땐 그만한 게 없죠.”
인형 이야기를꺼내고 보니 그것에 꽂혔다. 아스틴은 인형을좋아할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상태와 제법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형을 팔 만한 곳이라면 인형을 만들어 파는 가게나 잡화점정도일 텐데.
“저기로 가보죠.”
나는 마침 보인 곳을 가리키며 아이셀의 팔을 끌어당겼다.
가게 앞에 진열된 봉제인형과 목제인형들이 보였다.
“이런 걸…?”
“그럼요.”
아이셀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본인은 막상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는건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따라 들어왔다.
가게 안에는 인형이 많았다. 사람처럼 만든 인형, 동물 모양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장식품들이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곰 인형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몬스터 도감에 나오는 곰 종류들은 다 있었다.
나는 그 중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큼지막한 곰 인형을 집었다. 세워두면 아이셀의 허리까지 오는 크기다.
“이걸로 하죠.”
“이거?”
아이셀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잘생긴 가게 주인이 나와 가격을 말해주었다.
“40실링 입니다.”
“무, 무슨 인형 하나가 검 두 자루 값이야?”
40실링이라는 값에 아이셀은 먼저 경악했다.
처음 들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셀은 내가 같이 놀라주지 않자 이내 자신이 촌스러운티를 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지갑을 꺼냈다.
“저기, 알프렌… 돈 있니?”
“아… 네.”
“미안해. 지금 돈이 10실링밖에 없어.”
그 돈으로 대체 뭘 사러 나온 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40실링을 계산하고 인형을 업어 나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 네.”
부하 걱정은 하는데 돈은 10실링 밖에 안 들고 왔구나.
“그 돈으로 뭐 사려고 하셨는데요?”
“도, 돈 써 본 적이 제대로 없어서 그랬어.”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럴 수 있지, 이해는 한다. 아이셀같은 기사라면 다른 곳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바빴을 테니까.
“빚도 엄청 생겨서 그거 갚느라고 돈도 얼마 없었는데….”
“빚이요?”
“그… 전에 만났던 거기 있잖아. 거기서 손님으로 갔다가 거기서 일하는 남자한테 잘못 걸려서 돈이 엄청나게 청구됐었단 말이야. 추가금 받는 건 줄도 모르고 막 요구하다가….”
이런, 거기서는 빚 때문에 일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됐어요. 뭐… 어차피 저도 걱정은 됐었으니까. 아이셀 씨는 마음만 얹은 걸로 해요.”
“돈은 꼭 줄게. 다음 달에.”
“안 주셔도 되는데.”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마음 때문인지 마음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다.
아이셀은 가는 동안 여기저기 살피더니 과일가게 쪽으로 뛰어갔다. 마침 장사를 마치려던 가게 주인은 과일들을 들여놓던 잠시 멈추었다.
“저기, 자두랑 사과 주세요. 다섯 개씩요.”
과일들은 출하시기가 맞물려 있는 것들이라 가격이 저렴했다.
아이셀은전 재산인 10실링을 과일값으로 내놓고,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사과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건 너 먹어.”
“네, 감사합니다.”
빨갛게 익은 사과다. 모양도 예쁜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저기 아이셀 씨.”
“응.”
“아스틴 씨랑 같이 갔던 남은 한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사과를 깨물며 특별히 할 말이 없었던 돌아가는 길 위에 화두를 던졌다.
“참… 오스카라고 조금 무뚝뚝한 녀석이야. 걔도 곧 돌아오겠네.”
무뚝뚝한 성격이라…. 어려운 사람 하나가 추가되겠군.
“그 녀석… 아스틴이 다쳤을 때 뭐라도 했을라나. 성격상 가만히 있었을 것 같기는 한데. 후우….”
“설마 그랬겠어요.”
“으음, 하긴 그렇겠지? 오스카가 아스틴을 잘 따르기는 했는데. 내색은 안 했지만, 은근 둘이 잘 붙어 다녔었거든. 그래서 둘이 같이 보냈던 건데.”
그러나 아이셀은 무언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아스틴한테?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어떻게 물어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기는 하겠지. 실언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막사에 도착했다. 정말 이 선물을 좋아해 줄지 긴장이 조금 됐다.
적막한 의무실의 문을 열자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이 열려있었고, 그 옆에 아스틴이 앉아 있었다.
“아스틴, 뭐하고 있어?”
“졸려서요.”
“졸리면 자면 되지.”
아이셀은 고개를 갸웃하고서 가지고 온 것을 내려놓았다.
“이것 좀 먹어 봐.”
그녀는 자신 있게 자두 하나를 내밀었지만, 아스틴의 시선은 내게로 향해있었다.
“곰….”
이라고 거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아,맞다. 아스틴 알프렌이 너 주려고 이것도 사 왔어.”
아이셀은 내게 곰을 빼앗아 아스틴에게 내밀며 손으로 곰 인형의 팔을 움직여 아스틴의 몸을 톡톡 건드렸다.
“아, 아니… 그… 갑자기웬 인형이에요?”
“몰라, 네가 좋아할 것 같다고 샀는데.”
아이셀은 아스틴의 옆에 곰을 놓아주었다. 그러자아스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역시 내 감각은 적중했다.
아스틴은 관심 없는 척 계속 곰 인형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셀은 자두 하나를 먹으며 그런 아스틴을 보았다. 이제야 아스틴의 관심사에 조금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됐을 것이다.
“맛있다. 사과 좀 닦아 올게.”
아이셀은 돈이 없어제대로 된 선물을 못 해줬던 것 때문인지 내게 시키지도 않고 사과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아스틴은 커다란 곰 인형을 꽉 끌어안고 미소 지었다.
“저기… 어떻게 알았어?”
“그게, 음… 우연입니다. 우연.”
맞추기는 했네.
“내가 가지고 있던 건 폭격을 맞아서 잃어버렸거든.”
“아… 그때 다치신 겁니까?”
“응, 그렇게 됐어.”
아스틴은 조금 밝아진 미소로 웃으며 인형의 팔을 들어 보였다.
“아이셀 씨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 신기하네. 나한테 이런 거 줄 생각을 다 하고.”
“하하….”
나 역시 신기하게 느끼고 있다는 의미를 담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될 때쯤, 아이셀이 사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작은 과도를 함께 가지고 와 아스틴의 옆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멍하니 서 있던 내게 나가라고 눈치를 주었다.
커튼을 쳐 놓고 나가는 척 문만 열었다 닫고, 숨죽인 채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스틴, 조금 오래 걸릴 거라는얘기는 들었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런 말 들으려던 게 아니고. …부담 갖지 말라는 얘기하고 싶었어. 나도 내 밑에 있는 기사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을 겪어 본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미안해.”
아이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처음 마주쳤던 그때처럼 진지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파르안도 제법 믿음직해졌고, 새로 온 알프렌도 스톤베어를 한 방에 잡아버리는 녀석이니까.”
“네? 하급 기사가요?”
“응, 나도 엄청 놀랐어.”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이 의무실 문이 열리고, 의무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하냐?”
“아, 아닙니다. 가보겠습니다.”
들키지 않도록 작게 말하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