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가면 놀이 (5)
보험 같은 건 핑계였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족의 죽음을.
성녀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새하얀 액체가 쏟아져 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루스칼이 있어야 할 바닥에는 미라처럼 말라버린 시체가 있었다. 성녀의 깨끗한 발로 그의 쪼그라든 방망이를 툭 건드리자 으스러졌다.
“으어억…….”
아니… 시체가 아니었다. 거의 강제로 생명이 붙어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성녀는 공포에 찬 눈빛을 띠고 있는 루스칼의 얼굴을 가차 없이 밟아 부숴버렸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루스칼이 어떤 느낌을 받으며 죽었는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계속했으면 당신도 이렇게 됐을 거예요.”
“아, 아… 네.”
다행이다.
그러니까 제발, 그냥 보내줘.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까딱하면 눈물까지 나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성녀는 천천히 다시 옷을 입고 내 앞에 섰다. 다입은 건 아니었다. 옷들을 대충 걸치고 가랑이는 여전히 드러낸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팔이 결국 내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밀려, 나는 벽에 기댄 상태가 되었다.
“아아….”
나는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뱉어버렸다.
“겁먹지 마세요. 나는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성녀. 알고 있잖아요. 지금의 당신은 마족이아니니까 괜찮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내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천천히 내 몸을 쓸어내리며 불룩 튀어나온 둔덕 위에서 손을 멈추고, 그 아래 감춰진 것을 꺼냈다.
이 사람은 정체가 뭐야…. 나는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을 잠시 똑바로 보았다. 내가 그렇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도 나를 마주 보았다.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림피아르와 너무나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손을 멍청하게 두었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절대 세우면 안 되는데, 성녀의냄새와 몸에 붙은 말랑말랑한 가슴과 다리의 촉감이 미칠 것 같다.
성녀는 내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죽을 것같이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해보세요.”
시험이라도 보는 것처럼 요구하는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녀는 다리를 살짝 들어서내 다리를 감싸며 미소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냥 성녀를 한 번 범한 것뿐인 거예요.”
“아흑…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 보았다.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손길에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리를 주춤 움직이다가, 마음먹고 그녀를 안은 채로 움직여 그대로 테이블 위에 눕혀버렸다.
“못 참겠죠?”
성녀는 내 돌발적인 행동에도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녀를 놓고 물러났다.
“하아….”
작게 신음을 뱉자, 성녀는 일어나 내 뺨을 만졌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죠?”
“그, 그만둬 주십시오.”
내 자지는 쿠퍼액을 흘리며 움찔거리고 있었지만, 결국 참아냈다.
“좋아요.”
성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성녀님!”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아이셀이 들어왔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옷을 반쯤 벗은 채 테이블 위에 앉아있는 성녀와 움찔거리고 있는 물건을 꺼내 놓은 내 모습은 아이셀이 아닌 누가 봐도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아이셀은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 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지… 일단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이상한 괴물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아이셀은 간신히 침착하게 말했다. 나도 황급히 옷을 입고, 성녀도 다시 옷을 입었다.
“괴물이라면….”
“오면서 만났던 그 이상한여자 있지 않습니까. 몸이 부서졌다가도 다시 생기는…….”
성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게 새삼 놀랄 일인가 싶었다.
아이셀은 앞장서 나가면서 검을 뽑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창문으로 리티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있었네에. 흐흐흥….”
“뭐, 뭐야!”
창문에 얼굴이 가득 들어찬다. 나는 앞장 서 있던 아이셀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바로 리티는 얼굴로 창문을 깨버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유리 파편을 다 맞아버렸을 것이다.
“저, 저 녀석이야.”
“이런… 어쩐지 쉽게 끝난다 싶었어요.”
다행히 성녀는 웃고 있었다. 그래, 크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겠지.
“밖으로 나가죠.”
성녀가 앞장서 움직였다. 리티가 다른 행동을 하기 전에 나와 아이셀도 그녀를 따라 재빨리 움직였다.
저택밖으로 나오자 길레슈와 황자, 그리고 뮤시스가 있었다. 물론 꽤 많은 수의 제국군과 기사단도 있었다.
“길레슈, 황자님을 데리고 도망가계세요.”
“알겠습니다.”
길레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황자를 데리고 움직이려 했다.
“누님….”
“방해 말고 가세요.”
황자의 다소 찌질한 목소리에 성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어서 가시죠. 황자님을 안전한 곳에 모셔놓고 병사들을 더 모아놓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성녀의 손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굳이 일반 병사들의 도움까지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일반 병사였긴 했지만, 지금은 이 검이 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검에서 희미한 빛이 났다.
“저, 저건 내 검이잖아! 이 자식….”
검의 원주인이었던 녀석도 나타났다. 이름이… 베오타르였지. 이번에도 내게 기세 좋게 말하다가 내 옆에 있는 성녀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흐헤헤, 재밌네. 다들 나 죽이려고 모인 거야?”
“리티 저 망할 년… 언젠가는 저럴 줄 알았다.”
베오타르는 내 쪽으로 다가와 딱 내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싼 검이지만… 어쨌든 내가 졌으니 이제 네 검이라는 건 인정 하지.”
“고마운데, 어쩌라는 거야?”
“크윽… 손잡이를 강하게 쥐라고. 세게 쥘수록 검으로 발현되는 힘이강해지니까.”
그런 거였군.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강하게 잡아야 한다는 건가.
손에 힘을 더 많이 주자, 빛이 더 강해졌지만, 그곳에 빨려 들어가는 내 체력이 배로 늘어난다. 힘도 더 많이 줘야 하다 보니, 유지하고 있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성녀는 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풍선처럼 커진 리티에게 다가갔다. 리티는 아군 적군 없이 가까이 오는 이들을 모두 공격하고,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무섭게 사방을 파괴했다.
그녀의 몸에서 피가 엄청나게 튀어나온다. 저택이 피바다가 될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진다.
“으하아아아… 좋아, 재밌어.”
다들 잠시 물러나자, 리티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성녀를 보았다.
“어?”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기괴한 이빨이 드러난다. 성녀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흐에, 데이지… 여기까지 왔어? 역시 내가 좋은 거지?”
“다, 닥쳐! 내가 너 같은걸….”
미치지 않고서야 좋아할 수 있겠냐?
리티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온몸에 빛이나, 결국 빛 그 자체가 되어버린 성녀의 몸에 용감하게도 손을 댄다.
“흐이익!”
“멍청함도 더 커진 건가요?”
리티의 손이 지난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그 고통에 즐거워하고 있다.
“아아, 역시… 성녀님이 최고야. 날 더 엉망진창으로만들어 줘. 우리 데이지한테도 똑같이 해줘야 하니까.”
웃기지 말라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쥐었다. 검에서 진한 주황빛이 나왔다.
거대해지고 여기저기 찢겨 나간 리티의 몸에는 그만큼 내가 노릴만한 빈틈이 많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머금어져 있는 힘들이 방출될 것 같다. 나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동시에 성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곳으로 움직였다.
내가 빠르게 움직이자, 리티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정확히 붉은 빛이 나는 곳을노릴 수 있게 움직였다. 목표는 손이 날아가 버린 팔. 빠르게 움직여 위치를 잡고, 바로 검을 휘둘렀다.
주황색의 빛이 내가 노린 곳을 향해 날아갔다.
“흐악!”
리티의 몸에 명중하며 작은 폭발과 함께 그녀를 넘어트렸다. 내 공격으로 리티의 그쪽 팔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몸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쓸모없는 좀비 같으니라고.”
이건….
“흐음, 역시 살아있었군요. 마족.”
루스칼은 리티의 배를 찢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멀쩡해진 모습이었고, 리티는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건가….
“너무 허술해서 지루하던 참이었어요. 다음 계획은 뭔가요?”
“다음? 다음 같은 건 없어.”
루스칼은 씩 웃었다.
“나는 이미 할 일을 충분히 해냈으니까.”
그의 이마에 푸른빛의 문양 하나가 나타났다.
“그건 에르테렌의…. 그렇군요. 여기저기서 마족의 군단장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니 어지간히도 만만히 보였네요.”
성녀는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다음 계획은 탈출이겠네요?”
“그래,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네년이라도 어쩔 방법이 없을 거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저 녀석을 잡으려고 약 같은 걸 쓴 거였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어쩌면 그마저도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성녀의 얼굴은 그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
루스칼은 바로 뛰어올랐다. 그의 발아래 있던, 쓰러진 리티의 몸은 점점 작아져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를 쫓으려 움직였다.
놈은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연막을 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보이지 않아 당황한 사이, 내 귀 옆으로 빛줄기 하나가 지나갔다.
“크악!”
나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서서히 눈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주황색이 섞인 빛을 따라 전력 질주했다.
눈에 보이자마자 찔러버린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연막을 뚫고 지나갔다.
“받아라!”
피를 흘리고 있는 루스칼이 보이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찔렀다. 그의 몸에 검이 들어가자, 피가 흘러내리며 검이 검게 빛났다.
‘뭐지?’
“으, 으… 이건….”
루스칼은 당황하며 나를 밀쳐 몸에서 검을 뽑아냈다.
“젠장, 만만하게 보지 마!”
그의 손끝에서 검은 광선이 나와 내 몸통을 뚫었다. 그 순간 전신에 통증이 퍼지며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녀석들도 따라오고 있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가는 것 같은데, 설마 놓쳐버리는 건가? 아냐, 그래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하늘만 보고 있었다. 곧 시야가 하얀빛으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