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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력왕 후보 소년과 고구려
고강덕은 내심 웃음이 일었으나 꾹 참고 자리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무슨 연유로 소생을 불렀소?”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전혀 못 알아본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삿갓괴인은 한 손으로 삿갓을 더욱 깊숙이 눌러썼다.
“어험, 보아하니 산중에서 도를 닦고 지금 하산하는 것 같은데······?”
고강덕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그렇소만 그걸 어찌 아셨소?”
“척 보면 아느니라.”
고강덕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척 보면 알다니······. 선생이야말로 도사시구려.”
삿갓괴인은 헛기침을 했다.
“어험! 실은 어젯밤 꿈에 산신령께서 나타나 한 젊은이가 도를 닦고 하산하는데 마음속에 맺힌 게 있으니 그걸 풀어주라고 하더군.”
고강덕은 탄성을 발했다.
“아니, 그럴 수가······!”
“산신령 말씀에 그 젊은이는 사부의 심보가 고약해서 자신의 출생내력을 말해주지 않는 걸로 안다는군. 맞는가?”
고강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 사부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마 과거의 일이라 까먹었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삿갓괴인은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것이다. 젊은이에게는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니다. 그 때문에 그 사부가 잠시 까먹은 것이다. 산신령께선 그걸 대신 말해주라고 했다.”
고강덕은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일부러 변장하고 달려오셨군요.’
그는 속으로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겉으로는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조금은 궁금하군요.”
삿갓괴인의 신형이 살짝 경직되었다.
“조금 궁금하다고······?”
고강덕은 실언을 했음을 느꼈으나 급히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을 정도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큰 호기심이 일지는 않았습니다. 중요한 일이면 당연히 가르쳐 주셨겠지요.”
“맞다.”
삿갓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듣거라. 젊은이는 백운봉(白雲峯)에서 북서쪽으로 오십 여 리 떨어진 부석촌(浮石村) 출생이다. 칠백여 년 전 고구려라는 나라가 망했을 때 한 왕족이 부석촌으로 흘러들었다. 고구려 왕족은 성이 고씨인데 그 왕족이 남긴 씨 중 유일하게 남은 자가 바로 젊은이다.”
고강덕은 급히 물었다.
“고구려라고요?”
삿갓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과거에는 장백산 일대뿐 아니라 요동과 요서까지 고구려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중원대륙까지 삼키려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삿갓괴인은 처음의 변성했던 목소리를 잃고 나안서 특유의 음성을 내고 있었다.
하나 고강덕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입안이 쩍쩍 마르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 그래서요?”
“그때 당나라는 고구려의 왕족 및 지배층 수만 명을 모조리 잡아가서 중원대륙 곳곳에 흩어 살게 했다. 아마 그때 잡혀가지 않은 왕족 한 명이 장백산 줄기로 숨어들어 젊은이의 조상이 된 모양이다.”
“······.”
“젊은이의 사부는 먼 옛일이지만 그래도 조상이 왕족이라니 그 성씨를 이어받는 게 좋겠다 싶어 고씨 성을 준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다. 알겠느냐?”
고강덕은 눈 아래가 약간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부석촌으로 가서 왼뺨에 혹이 난 완안(完顔)씨 노인을 찾아라. 그 노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혹시 더 얘기해 줄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가봐라.”
고강덕은 변장을 하고 따라와 자신의 내력을 이야기 해준 사부가 너무도 고마웠다.
하나 사부의 뜻이 정체를 숨기려는 것이므로 그저 타인을 대하듯이 말했다.
“뉘신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고강덕은 한 차례 큰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심장 박동은 격렬히 뛰고 있었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자신의 출생내력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일단 부석촌부터 들르기로 작정하고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푸르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