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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드는 군웅들
정옥련이 몸을 돌려 바삐 사라지려는 데 고강덕이 또 물었다.
“소저의 방명은 어찌 되시오?”
정옥련은 급히 가명을 하나 지어 둘러댔다.
“반은련이에요.”
“반은련! 알겠소. 반소저! 그럼 내일 봅시다. 이만 실례하겠소.”
고강덕은 짐승들을 묶은 덩굴과 목봉을 양손에 나눠 쥐고 쏜살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정옥련은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 반대쪽으로 걷는 척 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살펴보았다. 어찌나 심하게 주물럭거렸는지 양쪽 가슴에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뭐야! 이거, 얻은 건 하나도 없고 가슴만 아파 죽겠잖아!”
정옥련은 이를 뿌드득 갈고는 몸을 돌려 살금살금 고강덕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때 해가 서산에 걸렸는지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오고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초저녁 무렵이었다.
호태왕비가 있는 숲 속의 공터에는 얼추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장한들이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중 열 명은 횃불을 든 채 어둠을 쫓고 있고 나머지는 각종 병장기로 열심히 땅을 헤집고, 나무를 뽑아내고 있었다.
이들을 총지휘하는 자는 삐쩍 마른 중년인으로 호태왕릉 꼭대기에 서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무림최고의 세력인 철혈성궁 심양 지부원들이며 왕릉에 서 있는 깡마른 자는 지부장인 사량귀였다.
사량귀는 원래 철혈성궁의 팔대당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작년에 성주의 세 쌍둥이 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켜 벌을 받아 심양지부장으로 좌천된 것이다.
“빨리빨리 하거라. 무림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비급을 찾아 떠나야 한다.”
사량귀는 침묵을 지키다 이따금 고함을 치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한편 먼저 이곳에 왔던 정씨삼남매 중 정일산, 정이산은 공터 끝의 숲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호태왕비에서 오 장 정도만 떨어진 덤불에 잠복했었으나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깊은 숲으로 후퇴하여 몸을 숨긴 것이었다.
그들은 덩굴 숲으로 기어 들어가 땅에 바싹 엎드린 채 공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일다경쯤 지났을까?
뚱뚱한 중년인 한 명이 호태왕릉 아래로 다가와 사량귀를 보며 소리쳤다. 그는 부지부장인 두조원(杜造原)이란 자였다.
“지부장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이 근방 전체가 한 번 파헤쳐졌다가 메워진 것 같습니다. 부서진 자갈이 너무 많고 뿌리가 뽑혔다가 그냥 눕혀진 잡초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사량귀의 눈이 번쩍 커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직접 내려와서 한 번 보십시오.”
사량귀는 단박에 왕릉 아래로 내려가 주의 깊게 지면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잠시 후 그는 허공을 보며 탄식했다.
“정말 그렇군. 우리 전에 누가 다녀갔단 뜻이 아닌가?”
사량귀는 눈앞이 새카매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수일 전 철혈성궁 총단에서 온 전서구를 받았었다.
요동의 호태왕비를 찾아가 그 부근에서 비급 한 권을 찾아내 총단으로 가져오라는 급전이었다. 급전에는 무림인들이 몰려갈지 모르니 급히 출동하여 반드시 비급을 얻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량귀는 누군가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빌어먹을··· 작년 여름부터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는 거야?’
사량귀의 눈앞에 작년 여름 어느 날밤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량귀는 날씨가 하도 더워 잠이 오지 않아 철혈성궁 총단 뒷산의 계곡으로 들어갔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주의 세 쌍둥이 딸이 함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나이가 열 여섯인 세 쌍둥이는 밤에 몰래 나와서 계곡에서 나체로 수영을 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량귀는 원래 세 쌍둥이들을 연모하여 밤이면 밤마다 그녀들을 ‘딸감’으로 사용했었다.
사량귀는 눈앞에서 세 딸감이 나신으로 깔깔거리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덤불 뒤에 숨어 즉각 바지를 내리고 딸행에 들어갔다.
그는 하늘이 준 선물에 감동한 나머지 조심성을 잃고 거친 숨결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연못 옆 덤불 하나가 괴이한 현상을 나타냈다.
멧돼지가 숨어서 땅을 파는 지 식식! 대는 소리가 마구 흘러나오며 덤불 전체가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세 쌍둥이는 의아심을 느끼고 덤불을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덤불 속에서 희끄무레한 액체 한 줄기가 튀어나와 연못으로 떨어졌다. 이어 끄응! 하는 사내의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꺄아악!
세 쌍둥이의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이튿날 사량귀는 곤장 열 대를 맞고 뇌옥에 감금되었다. 그는 열흘간 뇌옥에서 반성의 시간을 보낸 후 심양지부장으로 좌천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