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있었어.”
심장에서 차가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상한 열패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곁에 머무르지 못했던 시간이 더욱 억울해졌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조금 전과 같이 감정을 나누는 키스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버리자, 숨 쉬는 게 버거울 정도였다.
“몇 명이나?”
괜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고는 숫자를 세듯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가락을 다 접고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하자.”
유치하면서 위험한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구속하는 소유욕이 얼마나 위험한 감정인지 잘 알았다. 살면서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진 인간 군상의 범주 안에 속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그동안 유준이 살아오면서 만들어 놓은 표면적인 기준과 감정적 규제를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서게 했다.
“대학 들어가자마자 소개팅을 했거든? 근데 너무 어린애 같은 거야. 점심 뭐 먹을지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전화를 하는 거야, 멍청이가.”
첫 번째 남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열패감에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천진하게 재잘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어여뻐서 감탄이 흘러나올 뻔했다.
“소개팅 때 한 번, 엄마한테 밥 먹겠다고 물어봤을 때, 한 번. 딱 두 번 만났어. 그게 다야.”
제멋대로 몸집을 부풀리던 열패감은 다 타 버린 장작이 사그라지듯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게 다라니? 남자라고는 소개팅 한 번이 전부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놀아났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녀가 설렁탕 국물에 후춧가루를 두 번 쳤을 때였다.
“유준 씨도?”
“나는 없었는데.”
엉뚱한 대답을 했다는 건, 앞에 놓인 설렁탕 뚝배기를 향해 그녀가 후추 통을 가져다 대고 있을 때 알아차렸다. 그녀는 유준의 뚝배기 안에 들어찬 뽀얀 국물에 후춧가루를 두어 번 치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되게 잘한다.”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스산한 목소리였다.
“거짓말?”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어깨가 들썩이도록 한숨을 내쉰 그녀가 산뜻하게 웃는다. 산뜻함 뒤를 맴도는 어색함. 무언가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듯한 모습이다.
“무슨 거짓말?”
재차 되물었더니, 그녀가 눈이 가늘게 휘도록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다. 속마음을 숨기려 얇은 막을 드리우는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먹자, 일단. 나 배고파.”
숟가락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다면서 뽀얀 국물만 연신 홀짝이는 모습이 영 시원찮다.
“거짓말 안 했어. 관심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어.”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을 형용하기에는 지극히 짧은 문장이다.
그녀는 국물을 홀짝이던 숟가락을 힘없이 내려놓더니, 입술을 한 번 비틀어 문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 건지, 머뭇거리는 모습에 속이 타들어 갔다.
“아까.”
새로운 관계의 시작,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게 좋았다. 찝찝한 감정을 숨기고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은 곰팡이가 퍼지는 것을 두고도 모른 척하는 것과 다름없다.
“응, 아까.”
급한 마음에 그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때 명림에 같이 왔던 여자분이랑 지나가는 거 봤어. 유준 씨 할아버지랑 같이 식사했던 거 아냐?”
그날 식사실에서 거북했던 분위기를 그녀도 알아차렸었나 보다. 묘한 양가감정이 동시에 일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서 질투했어?”
애정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감정이기에 기분이 화르르 들뜬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질투는 무슨.”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들고 설렁탕 국물을 휘젓는 그녀의 목덜미가 붉었다. 달아오른 살결에 입술을 묻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럼 지금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명확히 하고 싶은 바람도 일었다.
“지금은, 뭐?”
퉁명스러운 목소리만으로 대답은 충분했지만, 그녀의 입으로 내뱉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유준이 원하는 말을 쉽게 해 주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고 싶은 말부터 해야겠다.
“나는 아까 열받아 죽는 줄 알았는데.”
자신이 이렇게 솔직하고, 유치한 인간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감정이 들끓고,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돼서 입이 먼저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한테는 딱딱하게 굴면서, 처음 보는 남자한테는 웃어 주는 거. 되게 짜증나데?”
감추는 게 없었으면 한다. 서로를 멀어지게 할 오해 따위, 없었으면 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까 그 여자분이랑 퇴근 같이 하는 것 같던데……. 왜 다시 올라왔어?”
그녀가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재희와 나란히 로비를 지나가는 모습을 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뇌인지과학센터 일로 며칠 정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저녁을 약속해 놓고도 연락 한 번 주지 못해서 신경이 쓰였다. 연구실을 나서며 연락을 해 볼까 했는데, 재희가 따라붙었다. 옆에서 연신 떠들어 대는 통에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저 오픈데…… 바쁘지 않으면, 맥주 한잔할래요?」
가벼운 제안이었지만, 교태 어린 몸짓은 거북했다. 산뜻한 미소가 생각난 것도 동시였다.
「선약이 있는 걸 깜빡했네. 나중에 보자.」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꾸하고는 돌아섰다. 그 길로 김순희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방금 나갔다는 소리에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복도 저편에서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떠난 뒤였다.
그녀가 탄 것으로 짐작되는 엘리베이터가 옥상 정원에서 멈춰 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따라 올라갔다. 당장에 그녀를 마주하고 싶었다. 잠시 재희와 말을 섞었을 뿐인데,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면죄부를 얻고 싶은 죄스러운 기분.
그런데 옥상 정원에서 다른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때 그 엿 같은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해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숨의 의미를 달리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흠칫하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나는 이제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다른 여자와 말을 섞는 것조차 역겹고, 네가 다른 남자랑 마주하고 있는 건 돌아 버리겠고.
“같이 퇴근한 거 아니야.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거고. 할아버지 친구 손녀야. 그래서 식사 같이 한 거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했지만,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정다인.”
진지한 부름에 내내 설렁탕 뚝배기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보고 싶어서 올라간 거야.”
당장 눈에 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내 그녀의 말간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되게 잘 어울리더라.”
하지만 미소 어린 얼굴로 내뱉은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두고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나무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속상했어. 오늘 좀 바빴고 지쳤고…… 그랬는데,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좀 그랬어.”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다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그녀는 상념 어린 얼굴로 어깻숨을 내쉬었다.
“누가 지치게 했는데?”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정을 뺀 목소리를 내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런데 안쓰러운 얼굴로 고된 하루를 간단히 정리해 버리며, ‘좀 그랬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마주하자, 복잡다단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은 얇은 막 하나 없이 와닿은 것 같은데, 거리감이 느껴지는 상황이 야속해서.
어서 그녀에게 묵직한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또 돌이켜 보건대, 이제껏 살아오면서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상대는 앞에 앉은 그녀가 유일했다.
껍데기끼리 맺는 관계가 아닌, 속을 오롯이 드러내는 관계. 진짜 자신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 건지도.
그녀 앞에서는 견고하게 쌓아 올린 허울을 지키려 긴장할 필요도,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까하는 불안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고 말하기가 힘든 날이었어.”
그녀의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때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답이 구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하거든.”
그녀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설렁탕 앞에 두고 상담해 주는 거야?”
“언제든지 내가 듣는 귀가 되어 줄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내가 다 들어 줄게.”
담갈색 눈동자 아래로 말간 물기가 고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준은 길게 손을 뻗어 냅킨을 뽑아서 건네주었다.
떨어져 있던 기간과 서로가 모르는 역사와 그로 인한 간극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제 곁에는 굳건한 존재가 지키고 있다는 듯이 진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재단이 좀 안 좋아. 할머니 수술 전까지는 막아야 하는데……. 하아, 빨리 수술하셔야 하는데.”
뭉뚱그려 한 이야기는 심각해 보였다. 이제는 어떤 이유에서건 힘에 부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조부의 부름으로 안온했던 그녀의 집을 떠나오면서 유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난 집안의 버려진 핏줄이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던 것도 잠시, 정해진 틀에 맞추어 구속된 삶을 살아야 했다.
제한된 삶의 틀에서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그간 얻은 것을 유용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조용히 영위해 왔을 뿐.
그런데 처음으로 손에 쥔 것을 이용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