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을 앓다-30화 (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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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리는 한국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모친은 그녀를 낳다가 죽었고, 부친은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면서도 국가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야무진 아가씨였다. 딱 한 번 우연히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이었다. 조경에 각별히 신경을 쓴 덕에 어여쁜 꾀꼬리단풍이 한국대 병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당시 뇌신경센터 건립으로 병원은 분주했고, 강 원장이 초대 센터장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다.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봄꽃이 피어난 듯 향기로운 여자였다. 활짝 웃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같은 여자인 이 여사도 한참을 넋을 놓고 보았다.

활짝 핀 여자가 무참히 버림받는 모습을 목도했다. 봄꽃이 눈앞에서 시들어 갔다. 향기를 잃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교수 연구실로 찾아온 조해리를 남편은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차갑게 돌아섰다.

남편은 복도 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 여사에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사랑을 잃고 넋이 나간 여자의 허망한 눈길 역시 이 여사를 향해 있었다.

간호사였다고 한다. 결혼 전 잠깐 만난 사이였다고.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했고, 헤어진 지 오래인데 자꾸만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라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남편을 따라 걸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가가서 위로해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남편이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건, 결혼 생활이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꽃 같은 여자를 이 집에 가둬 둘 수 없었겠지.

강 이사장은 정신증을 앓는 사람처럼 집요했고, 잔악무도했으며, 냉혈했다. 강 원장이 그토록 모질게 사랑하는 여자를 내쳤던 이유였다.

강 원장은 적당히 부인 노릇을 해 줄 여자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화목한 가정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친정에 누가 될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여사는 강 원장을 가슴속 깊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삭막하고 피폐한 집안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들이 죽고 난 뒤, 조해리의 아들을 군말 없이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인물이 훤한 강 원장을 빼닮은 아이는 죽은 아들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눈빛이었다. 아이의 눈빛은 죽은 조해리의 아름다운 눈빛과 같았다.

제 처지도 기구했지만, 다른 이의 이름으로 사는 아이도 안쓰러웠다. 아이의 눈빛을 들여다보며 언젠가는 모친의 고운 눈빛을 닮았다는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기가 막힌 생각도 해 보았다.

혼외 자식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조해리의 편지 때문이었다. 돈이 없다고 했다. 아들을 낳았는데, 아버지를 닮아 공부를 잘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대포 통장인 듯 보이는 계좌 번호를 알려 주며 돈을 보내라는 말에 강 원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강 이사장은 십수 년 만에 나타나 사기를 치려고 한다며, 그게 진짜 조해리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 후로, 강 원장은 조해리를 찾아 전국 사방팔방을 헤매었다. 결국, 그녀가 죽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아들을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여사가 낳은 아들이 죽은 직후였다.

지나온 날들을 다시 살라고 하면 절대 그러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제껏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머님.”

가만히 숟가락질하던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이 여사를 불렀다. 이 여사는 다감한 시선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이 여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남편이 미운 적도 많았다. 죽은 아들을 대신하는 아이가 끔찍했던 적도 있었고, 강 이사장을 죽이고 싶은 생각도 한 적 있었다. 그래도 살았다. 이제껏 이 집안에 자신을 돌아봐 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을지라도 살아왔다.

선한 눈을 맞추며 자신을 바라봐 주는 며느리를 보며, 이 여사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절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십 년 전 이 집으로 시집온 어린 아가씨의 얼굴이 며느리의 얼굴에 슬쩍 겹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바람이 무참히 깨진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아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니?”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살뜰히 보살펴 주려 노력했고, 며늘아기의 체질에 맞게 예방의학과 박사가 처방해 준 영양제도 잘 챙겨 먹였는데.

결국, 아이를 잃고 말았다. 손이 귀한 집이라는 것을 알기에 며느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 있으면서도 죄송스럽다고 했다.

“죄송해요, 어머님.”

“죄송할 게 뭐가 있니. 그런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것만 신경 쓰자. 응?”

세월이 흐른 탓일까, 강 이사장도 손부에게만은 살갑게 굴었다. 직접 예방의학과 박사를 집으로 불러서 며느리를 시시때때로 진찰하게 했고, 때마다 필요한 영양제를 놔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마치 색이 바랜 종이인형처럼 야위어 갔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데도, 속이 메쓰껍다며 소화를 시키지 못했고, 숨이 차다며 괴로워했다.

말갛고 매끈거렸던 얼굴이 푸석푸석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주치의에게서 흘러나왔을 때, 이 여사는 망연자실했다. 앞으로 며느리가 걸어가야 할 가혹한 날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강 이사장은 변한 게 없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은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며느리가 난임 진단을 받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집에 이 여사와 다인, 두 사람만 있는 시각에 강 이사장이 귀가했다. 이른 귀가였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고르거라.”

응접실 소파 상석에 앉은 강 이사장은 사진 석 장을 며느리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며느리에게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기가 하나도 없는 망연자실한 음성이다.

각기 다른 여자 사진이었다. 며느리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의 사진을 멀리서 보면서 이 여사가 끼어들었다.

“네가 키우게 될 아이 낳을 사람, 직접 고르거라.”

“아버님. 새아가 시술 날짜 잡았어요. 인공 수정부터 해 보고.”

강 이사장이 매서운 시선으로 이 여사를 쏘아보았다. 아들 하나를 낳고 몸이 상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조해리의 아들이 없었다면, 아마 자신이 저 자리에 앉아서 며느리와 같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물러날 수 없었다. 이 여사는 강 이사장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며느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러실 필요 없잖아요. 애들 아직 젊어요. 조금 기다려 주세요. 기다려 주시면…….”

“자네는.”

뾰족하고 듣기 싫은 금속성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의학을 업으로 삼은 집안의 어른이면서, 더러운 구석을 돌아다니며 독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쥐새끼 같은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다려 주지 않았던가?”

강 이사장의 말이 이 여사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 듯 숨이 턱 막혀 왔다. 치부를 들추고, 아픈 기억을 헤집는 데는 저만한 위인이 없을 것 같았다.

“얘들은 다르잖아요. 저랑 유준 아비 하고는 다르잖아요!”

유준은 아내를 지극히 보살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할 만큼 절절하게 사랑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들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요즘 들어 처음이었다.

아들이 며느리에게 보여 주는 사랑을 통해, 지난날의 아픔이 아무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 듯 마음이 좋았다.

강 이사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세상에 아이가 없는 부부는 서로 귀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란 말이냐?”

빗겨나간 시선에 바르르 떨고 있는 며느리의 손이 보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 쥔 손이 하얗게 불거져 있었다. 순간 조해리의 안쓰러운 얼굴이 떠오른 건 왜일까? 손을 뻗어 잡아 주려는데, 며느리의 작은 손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이 사람으로 할게요.”

며느리의 시선은 사진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사진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으면서 그악한 상황 속에 고른 선택지인 듯했다.

“대리모인 거죠?”

이 여사가 눈에 불을 켜며 물었다.

“대리모?”

강 이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공으로 교합에서 낳은 아이를 어찌 믿고 키울까?”

며느리가 숨을 멈추는 듯했다.

“그이도 아나요?”

가까스로 내뱉는 며느리의 힘없는 목소리가 아스라이 울렸다.

“모를 리가. 괜한 소리 해서 유준이 속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것 말고도 바쁜 아이니.”

강 이사장은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부엌 출입도 좀 하고. 살림에도 신경 좀 쓰고. 언제까지 죽은 이 가슴에 담고 죽은 듯이 살 게야? 사람답게 제 몫 하나는 해야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소처럼 집 안을 퍼져 나갔다. 며느리가 제 할 도리를 안 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살갑고 어여쁜 아이를 사람 구실도 못하는 천치 취급을 했다.

강 이사장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이 여사는 며느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다인아, 유준이 그럴 애 아니다. 유준이가 널 얼마나 귀애하는데.”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강 원장이 조해리를 무참히 버렸던 것처럼, 그리고 자신과 결혼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같은 핏줄이었다. 유준이라고 다를 리 없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훅 일어났다.

“저, 괜찮아요. 어머님.”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며 웃는 며느리가 마치 수십 년 전 제 모습 같아서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가,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제발 이렇게 아프게 살지 말아다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혀끝을 고통스럽게 맴돌았다.

집중할 일이 필요했는지, 며느리는 할머니가 남기고 떠난 재단 일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정신을 딴 데다 팔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라도 힘을 빼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눈빛을 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워서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저기, 혹시 이한희 여사님?”

재단 순의 미혼모 돕기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며느리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이 여사는 행사를 도우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누구?”

물음을 던지며 알아차렸다. 죽은 조해리의 간호대 선배인 권옥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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