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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쿵쿵 뛰었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거리낄 것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눈빛이었다. 그는 말없이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신오에게 시선을 옮겨 갔다.
아이의 이마를, 두 눈을, 콧잔등을, 붉은 입술을, 담갈색 눈동자를, 검은 머리칼을, 오동통한 뺨을. 정신없이 훑어보는 눈동자에 물기가 고이는 듯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라는 작은 생명체를 처음 만나는 듯, 경외 어린 시선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가워, 신오야.”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웃으면서 건넨 말인데, 글자마다 비통한 울음이 새겨져 흘러나오는 것처럼 처절했다.
신오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모르는 남자가 왜 자신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끼어들 수가 없었다. 지금 끼어들어 그를 아빠라고 소개할 수도, 타인으로 둔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아빠라고 말한다면 지금 당장 충격일 테고, 아빠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훗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처 입을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반가워요.”
건넨 인사에 그대로 답하자, 그가 벅찬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오래전 다인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지었던 미소와 똑같았다.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그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 혼인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신오를 가진 걸 알았을 때, 태어났을 때, 첫 옹알이를 했을 때,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을 때……. 그와 함께였다면 이런 미소를 지었을까?
“신오처럼 멋지고, 훌륭한 아이는 처음 봐서.”
당황한 아이를 달래듯 그가 인사를 건넸다.
이런 아이를 처음 본다고?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거짓말을 하려거든 아이 앞에서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경고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가 낳은 아이, 같이 키우고 싶어.」
병원으로 찾아간 다인에게 무정한 이별을 고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분이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엄마가 멋지게 키워 주셨구나.”
그는 그리 말하며 아득한 시선으로 다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너무 많아서 무엇 하나 꼽기가 힘들었다. 왜 아이를 혼자 낳아서 키웠느냐고 묻는 것 같았고,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것도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제 핏줄로 보이니까, 헌신짝 버리듯 내던졌던 여자가 달리 보이니?
대대로 손이 귀한 탓에 비롯된 핏줄에 대한 탐욕이 느껴져서 치가 떨렸다.
“신오야, 카메라 찾아줄게. 가자.”
신오의 손을 움켜잡고 걸음을 옮겼다.
누구 때문에 우리 결혼이 그렇게 됐는데. 누구 때문에 신오가 아빠 없이 자랐는데.
한이 서린 눈빛을 하는 그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아이가 보는 앞이라 화를 낼 수도, 경고할 수도 없었다.
“엄마.”
조용히 걷던 아이가 집 안에 들어서자, 목소리를 냈다.
“저 아저씨 누구야?”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다인은 멈칫했다.
다인은 신오와 눈높이가 맞도록 쪼그려 앉았다. 아이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오도 아는 아저씨야?”
똑똑한 아이였다. 피보나치 수열이니, 뭐니 하는 것과 별개로 신오는 엄마인 다인도 놀랄 만큼 빠른 아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렵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아픈 이면을 먼저 알게 되어서 속으로 곪아 버릴까 봐.
“신오가 이제 알아가야 할 사람이야.”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의문을 표시하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되묻지도 않았다. 신오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카메라 찾아볼까?”
“어딨는지 알아.”
신오는 곧장 놀이방으로 향했다. 장난감 서랍 제일 아래 칸을 열고 카메라를 꺼낸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찾았다!”
다인은 카메라를 들고 소 이야기를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 마당에 있던 그는 두 사람이 사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살고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인은 무감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있잖아요.”
신오가 그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응.”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 왔다는 사실이 기쁜지, 그가 얼른 상체를 낮추며 신오에게 시선을 맞췄다.
“사진 찍어도 돼요?”
아이용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는 것을 좋아하는 신오였다.
“그럼.”
그가 흔쾌히 대답하자, 신오가 다인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엄마, 찍어 줘.”
신오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다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당황스럽기는 다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신오의 재촉에 아무 말 없이 셔터를 눌렀다.
장난감 디지털 카메라여서 화소 수가 높지도 않을뿐더러, LCD 화면으로 보이는 화질도 썩 좋지는 않았다. 작은 화면 안에 담긴 두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카메라를 아이에게 건네자, 아이는 방금 찍힌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위태롭게 내려다보았다. 신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소 보러 갈래.”
다인은 신오의 손을 잡고 카페 마당으로 걸어갔다. 정진은 차로 돌아갔는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세희만 그곳에 있었다.
“굳이 이 카메라를 들고 가겠다네.”
다인이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자, 세희도 이내 어두운 표정을 감추고는 웃었다.
“아유. 우리 신오가 사진을 좀 잘 찍어? 당연히 카메라 가지고 가야지.”
세희가 다인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본 세희의 얼굴에 확신의 기색이 어렸다.
“여보! 신오 나왔어!”
차로 돌아간 줄 알았던 정진이 카페 안에서 테이크아웃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신오야, 아저씨랑 먼저 차로 가자. 아저씨가 소 젖 짜는 법 알려 줄게.”
“와! 진짜요?”
정진의 말에 현혹된 신오는 신이 나서 그의 뒤를 따랐다. 세희는 다인의 곁으로 바짝 붙어 섰다.
“괜찮아? 너 얼굴 너무 하얘.”
“얼굴 원래 하얘.”
“나 가지 말고 여기 있을까? 신오는 저 사람한테 보라고 하지, 뭐. 너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야.”
“그 정도 아니야.”
다인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세희를 달랬다. 만약 세희가 여기에 남는다면, 신오는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엄마 걱정을 하게 되겠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세상 걱정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로서 가슴 아픈 일이다.
“얼른 가.”
다인은 세희에게 어서 가라며 채근했다. 세희는 미간을 설풋 찌푸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속이 깊은 세희는 그저 다인에 대한 걱정을 앞세웠다. 만난 지 3년이 지나서야 겨우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조심스레 물었던 세희였다.
그때도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무거운 감정을 엷게 만드는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세희는 다인의 기분을 환기해 주곤 했다.
힘이 되는 사람. 세희가 없었다면, 제주에서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주차장으로 향하며 세희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인은 어렴풋한 미소를 지은 채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들이 탄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를 마주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카페 입구 쪽으로 돌아서자, 전형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이 상황에 저런 눈부신 미소라니. 속이 뒤틀렸다.
카페에서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인은 하는 수 없이 집 안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현관 안으로 들어선 그는 또다시 벅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집 안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어났다.
“앉아, 여기.”
다인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식탁 위에는 오늘 아침에 신오가 밥을 먹으며 꼼지락거렸던 원목 자동차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이의 손때가 묻은 장난감에 머물렀다.
“자동차 장난감 좋아해?”
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로 물었다.
“어. 좋아해.”
다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또 뭘 좋아해?”
이내 그의 시선이 다인을 향해 왔다. 그동안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버텨 왔느냐고 안타까워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내보이는 감정에 동요되고 싶지 않아서 슬쩍 시선을 빗겨 내렸다.
“뭐 이것저것 많아. 어느 날은 클레이만 가지고 놀고. 어느 날은 밖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물놀이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수영을 가르쳤다는 말에 그는 ‘그렇구나.’ 하고 대꾸했다.
“강유준 씨가 친부라는 거.”
그가 턱을 굳히며 눈에 띄게 긴장했다. 아마도 다인이 숨길 거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숨길 생각 없어.”
어깨가 들썩이도록 한숨을 내쉰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자리했다.
“그런데 나는 신오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아. 당신이 친부라는 걸 말해 주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야. 그러니까.”
“성급하게 나서지 말라는 거잖아, 그치?”
그가 식탁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리며 몸을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다인은 저로 모르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싹 붙였다.
“맞아.”
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순간은 나중이 되었으면 좋겠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니까 오죽 잘 처신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잖아. 행동 조심하라는 말이야.”
비꼬는 말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충동적인 말이 뒤이었다.
“누구는 아버지와 살고, 누구는 버림받은 기분…… 그거 모르는 거 아니잖아?”
그러다 뒤늦게 찾은 친부가 좋았느냐고 잔인하게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당신이 똑같이 겪은 일이니, 아이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지는 말라는 경고였다. 이미 상처는 번져 가고 있지만.
“있잖아, 다인아.”
“그런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했다. 다인은 두 눈을 꾹 감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르지 마, 앞으로. 신오 앞에서는 더더욱. 신오 빠른 아이야. 이미 이상하다는 거 눈치챘을지도 몰라. 조심해 줘.”
그가 안타까운 얼굴로 입만 벙끗하는 사이,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지는 카페였다.
“어. 무슨 일이야?”
― 사장님, 좀 와 보셔야겠는데요.
“알겠어, 지금 갈게.”
처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유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어나 줄래? 나 나가 봐야 하거든.”
매정한 목소리라도 좋았다. 그녀와 마주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