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0화
그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부끄러운 과거이기도 하고, 실패담이기도 하다.
이런 사연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난 싫다.
지우고 싶은 과거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침대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는데 비비앙이 내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도준. 그러다 주름 생겨."
"어...어어."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비비앙을 바라보니 인상을 펴라고 한 비비앙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비비앙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
"그러는 너는 왜 울고 있어?"
"도준은... 도준은 그걸로 괜찮은 거야?"
"뭐가?"
"..."
비비앙이 말없이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그 너머에 숨은 내 마음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괜찮을 리 없지.
그래도 난 이렇게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을 모른다.
나는 내 실수, 내 잘못을 마주 보고 극복해낼 수 없는 사람이다.
묻어두고, 외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난 뭐, 괜찮아. 지금 더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거든.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은..."
"도준. 그러지 마."
비비앙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비비앙이 내게 다가와서 내 머리를 감싸 안고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준 탓이 아니야. 도준이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돼."
"비비앙. 얼굴에 딱딱한 게 닿아서 좀 아픈데."
"농담으로 말 돌리려고 하지 마."
왠지 비비앙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간 것 같다.
비비앙이 턱으로 내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난 그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매번 지혜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애초부터 지혜가 몰래 빠져나가는 걸 기대하지 않았었다면,
그래서 가족들의 불이 났을 때 더 빨리 반응했더라면,
내가 지혜와 자주 놀아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망설임 없이 지혜가 병원에 입원했었다면,
그래서 더 나은 치료를 지속해서 받았더라면...
답답해 보여서, 지혜가 잘 따르니까, 지혜가 좋아하니까 했던 행동들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내 선의가 더 안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실수는 되돌릴 수 없다.
잘못한 건 바로잡을 수 없다.
게임에 빙의하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선의로 지아를 도와주려고 했던 게 오히려 학장님에게 덜미를 잡히게 하였다.
다행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날 좋게 봐주셔서 최악의 결과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만약에 학장님이 원칙대로 대응했다면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 거다.
라티니아도 다르지 않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의욕적으로 달려든 결과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했다.
지금 올리비아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는 것도 걱정이 많다.
만약 또 내 선의가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내 삶은 후회의 연속이다.
실수의 연속이다.
내게 과거를 마주 볼 용기는 없다.
하지만 내 생각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비비앙은 분명 실망하겠지.
그러니까 평소대로...
"알겠어. 비비앙. 이제 자책하지 않을게."
"거짓말."
바로 들통이 났다.
비비앙의 말투가 너무 단호하다.
이미 내 마음가짐을 꿰뚫어 본 듯하다.
이건... 변명해 봐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알았어?"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어. 도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
"왜...왜 그러는 거야?"
비비앙이 내 머리를 놓아주고 내 정면에 서서 말했다.
내 생각을 사실대로 말해야겠다.
전부 다 밝히긴 어렵고, 아주 일부분만.
그러면 비비앙도 내 생각을 알아주겠지.
"비비앙. 잘 들어봐.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병원에서 지혜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혜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적어도 치료는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예전부터 몰래 데려나오는 버릇을 들이지 않았으면 애초부터 밖에 나가자고 말을 꺼내지 않지 않았을까? 그러면 위험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
"이걸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겠어? 불가능하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말을 들은 비비앙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줄기 눈물이 비비앙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자기 탓을 하는 거야?"
"내 행동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도준은 그럴 생각으로 행동한 게 아니잖아. 도준은 그 애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었던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도준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 왜 그게 도준의 책임이야?"
"아니 그래도 더 좋은 결과가..."
"아니, 아니야."
비비앙이 내 말을 부정했다.
"도준은 행동하기 전에 결과를 알 수 있어?"
"아니."
"나쁜 마음을 품고 행동했었어?"
"...아니."
"그럼 그게 왜 도준탓이야?"
"아니, 그래도..."
비비앙이 날 감싸안고 등을 토닥였다.
엉겁결에 비비앙에게 안긴 꼴이 돼버렸다.
나보다 작은 애한테 안겨있는 꼴이라니.
"도준이 행동하지 않았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어. 도준의 행동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도준이 모든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도 돼."
"..."
"그리고 모두 다 함께 고민하면 실수한 건 되돌릴 수 있어. 잘못한 건 바로잡을 수 있어. 도준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혼자서 고민하려고 하지 마."
혼자가 아니다, 라...
그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게임에 빙의하기 전까지 난 항상 혼자였다.
게임에 빙의한 후에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때문에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필요한 정보만 단편적으로 제공하고 도움을 받았었지.
비비앙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비앙의 손길을 따라 내 생각들이 씻겨나갔다.
왠지 마음이 편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감정이 가라앉으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해버린 거지?
일단 뒷수습을 해야 한다.
"맞다. 비비앙."
"응?"
"오늘 내가 했던 말은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야.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슬슬 놓아줘."
"싫어."
비비앙이 내 머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행동 같은데...
광대뼈가 눌려서 조금 아프다.
비비앙도 그걸 깨달았는지 갑자기 날 밀쳐냈다.
"이익....!"
"진정해. 비비앙. 아직 어려서 그래."
"난 이미 어른이야!"
"그래 그래. 우리 비비앙 어른이...지...?"
평소처럼 웃어넘기려다가 문득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진짜로?
난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비비앙이 내 마법 보조 재료로 등록되어 있을 테니까 신상정보도 등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법 보조 재료창이 비어있었다.
대신 비비앙은 나와 가족 관계로 등록되어있었다.
나이가....26살?
"스물 여섯 살이라고?!"
난 비비앙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잘 쳐줘도 10대 후반이고 요즘 시대를 고려해보면 10대 초중반의 몸매다.
26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비비앙. 설마 다른 애들한테 반말을 했던게..."
"도준도 도준보다 어린 애들한테는 반말하잖아?"
"아니, 나는... 그렇긴 한데!"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다.
건드리면 범죄일 것처럼 생겼으면서 나보다 연상이라니....
정말 충격적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난 비비앙의 특정 부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엽게도...그러면 이제 가망이 없는...으악!"
"아니야!"
비비앙이 날 넘어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꿈쩍도 안 했지만.
난 씩씩대고 있는 비비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 비비앙 어른이야. 누나라고 불러줄까?"
"이제서야 날 어른으로 봐 주는거야? 그럼..."
비비앙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품으로 파고든 비비앙이 내 가슴팍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날 올려다봤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비비앙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다.
"...하자?"
비비앙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비비앙의 얼굴이 내 얼굴을 덮었다.
────◆────◇────◆────
어느새 이세계로 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응접실로 내려가 보니 지아가 가장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준씨? 엄청 일찍 오셨네요. 그런데... 비비앙은 왜 그래요?"
"나도 몰라."
내 말을 들은 비비앙이 날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흥!"
"하하... 우리 비비앙 누나가 사춘기가 왔나 봐."
난 비비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비앙이 화난 듯 내 손을 쳐냈다.
"머리 만지지 마!"
그래봤자 내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난 내 손을 벗어나려고 하는 비비앙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봐. 그렇지?"
"아, 네..."
비비앙이 치명적인 척 해봐야 비비앙이지.
이건 지혜의 대용품으로 보고 나발이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어떻게 비비앙을 건드려?
비비앙은 누구한테 알아왔는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내게 달라붙었고, 그 결과 이렇게 삐져버렸다는 거다.
"비비앙. 화 풀어. 비비앙이 크면 꼭 해줄게.."
"언제 할 건데? 그러다 또 '비비앙은 어리니까' 라고 할 거잖아!"
"아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기준을 딱 정해!"
"그럼..."
난 주변을 돌아봤다.
올리비아는 너무 가망이 없고, 라티니아는 너무 기준점이 낮다.
역시 지아가 딱 맞지.
"지아만큼 커지면 해 줄게. 어때?"
"네? 저요?"
비비앙이 지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갑자기 무언가를 알아차린 비비앙의 눈빛이 아련해지더니 지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아가 당황한 듯 허둥대기 시작했다.
"왜...왜요?"
"이...이..."
비비앙이 지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슴을 마구 쥐어짜기 시작했다.
지아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몸부림치며 비비앙을 밀어내려고 몸을 꿈틀거렸다.
비비앙이 부럽다.
"아야! 아파요. 비비앙!"
"이런게! 뭐가 좋다고! 이익!"
"도준씨?! 비비앙 좀 어떻게... 아윽!"
"고작 이런 게 뭐라고!"
"비비앙 진정해. 어른이잖아?"
난 지아에게 달라붙은 비비앙을 떼어냈다.
비비앙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아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이익! 저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키를 말한 건데?"
"어...?"
"아직 비비앙은 너무 작잖아. 지아 정도까진 키가 커야 몸에 무리가 안 갈거야. ...왜 그래?"
비비앙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멍한 표정으로 나와 지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비비앙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비비앙이라니. 쉽게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난 부끄러운지 내 품에 파고드는 비비앙을 품에 안아서 숨겨주었다.
"고마워. 지아 덕분에 비비앙이 삐진 게 풀렸네."
"하아... 네..."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우리는 라티니아와 올리비아가 준비를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