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 93화 (94/191)

〈 94화 〉 93화

* * *

"준비 끝났대요."

다른건 모르겠지만, 셀레네가 유능하다는 평가는 인정해야겠다.

우리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 오후 느즈막하게였는데 채 날이 지나기도 전에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그 유능함으로 빨리 프리즘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래? 그럼 내일 바로 갈 수 있겠네."

"그… 기억하시죠?"

"알겠다니까. 나 못 믿어?"

"본인이 지금까지 하신 행동들을 좀 돌아보는 게 어때요?"

내가 한 일들?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아마도….

문제될만한 행동은 들키지 않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음…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난 당당해."

"아… 네…."

라티이나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들켰나?

아니면 셀레네 그년이 불었나?

"자각이 없다는 게 더 대단하시네요. 됐어요 정말."

"응? 뭐라고?"

"됐다고요. 어휴. 물자들은 1층 빈방에 쌓아뒀으니까 갈 때 가져가세요."

라티니아는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며 내 방에서 나갔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한 짓이 있어서 뭐라고 따지진 못하겠다.

그냥 나중에 두고 보자....

라티니아에 대한 복수는 복수고 준비가 벌써 됐다고 하니 슬슬 자야겠다.

원래 계획은 오늘따라 반응이 이상했던 지아를 불러서 솔직한 대화를 나누려고 했는데 관둬야겠다.

오늘은 그냥 쉬어야지.

내일부터 며칠간 이렇게 편하게 못 잘 테니까.

­ 끼익.

내가 샤워실에서 나오는 것과 동시에 내 방문이 열리면서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들어왔다.

비비앙은 벌거벗은 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누가 보면 자기 방인지 알겠네.

뭐, 하루이틀 같이 산 게 아니니까 나도 익숙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비비앙, 다른 사람 방에 들어올 땐 노크를 해야지."

"왜?"

"왜는 무슨 왜야? 그게 예의라는 거야."

"그런 거 몰라."

"하이고… 그래,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냐."

비비앙이 원래 그런 걸 어쩌겠어.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평생 나하고만 살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설마 다른 애들 방에 갈 때도 그렇게 들어가?"

"당연히 아니지. 도준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 그래……."

나름 타당한 의문이었는데 오히려 비비앙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말을 들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비앙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도 다른 애들한테는 예의 없이 행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왜 왔어?"

"도준, 오늘따라 이상해."

"뭐가?"

"내가 도준한테 오는 데에 딱히 다른 이유가 어딨어?"

그렇게 말한 비비앙은 테이블에 앉으려던 내 손을 잡아끌어서 침대에 앉히고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생각보다 힘이 세서 어어 하는 사이에 난 침대에 앉게 되었다.

비비앙이 힘이 이렇게 셌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비비앙에게 잔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비비앙이 뒤통수로 내 가슴팍을 콩콩 두드려서 내 말문을 막았다.

그 몸짓이 내 심장에 직격타를 날렸다.

가만히 두면 더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어서 내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정말 심장에 안 좋은 광경이다.

뭔가 아무래도 좋아졌다.

비비앙의 하트어택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비비앙이 고개를 들어서 날 올려다봤다.

"왜 가만히 있어?"

"그래 그래. 우리 비비앙 착하다."

난 비비앙의 똘망똘망한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비비앙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천천히 감겼다.

난 몸에 완전히 힘을 풀고 내게 기댄 비비앙을 한쪽 팔로 감싸 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 (똑똑똑.)

침대에 누웠는데 작은 노크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 방 노크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비비앙, 혹시 방금 노크소리 못 들었어?"

"못 들었어."

"그래? 잘못 들었나 보다."

노크 소리는 한번 들린 후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들은 게 맞는 것 같다.

그럼 딱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맞다, 준비 끝나서 내일 바로 출발할 거거든? 오늘은 좀 빨리 자자."

"응."

난 비비앙을 안은 채 이불을 덮었다.

비비앙이 꼬물거리다가 이불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절로 미소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난 비비앙의 머리에 얼굴을 마구 부볐다.

머리가 헝클어져서 싫어할만한데도 비비앙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난 그렇게 비비앙을 품에 안고 서서히 잠에 빠졌다.

­ 달칵.

잠들기 직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라티니아가 물자들을 준비해뒀다고 한 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이… 이게 무슨…?"

방 안에는 내가 말하지도 않았던 각종 물자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때요? 도준 씨가 말하지 않은 것 중에도 필요해 보이는 건 다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라티니아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어떻게 당당할 수 있는 거지?

"어… 어어… 고마워…."

"왜 그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나요?"

"하… 아니…."

난 하늘 높이 쌓인 물자들을 뒤적거렸다.

식자재…는 필요하고.

로프? 있으면 좋지. 당장 쓸 일은 없겠지만.

땔감…은 숲에서 캐면 되잖아!

텐트… 모포… 침낭… 다 필요 없다.

휴대용 샤워시설? 이런 건 어디에서 구해온 거야?

"반응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고마워 라티니아."

"야영은 익숙하거든요.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주세요."

"하… 그래…."

잡동사니는 놓아두고 싶지만 저렇게 당당하니 차마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그냥 다 챙겨둬야지.

난 마법진을 펼치고 그 안에 물자들을 던져넣었다.

내 모습을 본 라티니아도 함께 물자들을 던져넣기 시작했다.

난 닥치는 대로 물자들을 쓸어담으며 라티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 뱀파이어 친구는 출발했대?"

"셀리요? 네. 어젯밤에 설명해줬더니 곧바로 출발했어요."

"진작에 그랬어야지. 시간 끌기는 쯧쯧."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이렇게 금세 준비해줬잖아요?"

"쓸모 쓸모 없는 것들까지 말이지."

"쓸모 없는거… 라고요?"

라티니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다.

라티니아는 입을 꾹 다물고 물자들을 휙휙 던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행동으로 바로바로 드러나는구나.

"아니, 말이 헛나왔어. 깜빡 잊고 말 안 했던 것까지 어떻게 준비했느냐 그런 의미였지."

난 대충 변명을 주워섬기며 라티니아를 달랬다.

라티니아의 행동이 점차 얌전해졌다.

벌써부터 삐지면 곤란하다.

가지 말라는 곳에 갔다 올 거거든….

난 준비물들을 아공간에 쳐박아두고 거실로 돌아왔다.

준비도 끝났겠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그런데 거실에 지아가 보이지 않았다.

늦잠을 잤나? 싶었지만 지아는 평소 그렇게 늦잠을 자는 애가 아니다.

엇갈린 건가?

"혹시 지아 내려왔었어?"

"아니."

"그래? 이상하네…."

한번 가봐야겠다.

난 거실을 나서서 지아의 방으로 향했다.

­ 똑똑.

"지아야, 아직 자?"

난 노크를 하며 지아의 방 안을 살폈다.

방 안에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긴 하는데 대답이 없었다.

지아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난 지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일어나있었… 지아야?"

지아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지아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눈 밑이 퀭하고 시선이 아득한 게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보인다.

난 지아에게 다가가서 지아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지아야, 이지아!"

"……네, 네?!"

"괜찮아? 왜 넋을 놓고 있어?"

"아… 좀 고민이 있어서요. 어제 잠을 설쳤어요."

"무슨 고민이길래?"

"개인적인 고민이에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대답을 듣고 보니 더 걱정스럽다.

이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우리 사이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무슨 일인데 그래?"

"으…죄송해요."

"죄송하단 말 말고."

"정말 별일 아니에요. 지금 나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려주시겠어요?"

묘하게 선을 긋는 게 좀 수상하다.

그래서 몇 번 찔러봤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반응이 무덤덤했다.

나는 별수 없이 지아의 방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난 홀로 거실로 돌아와서 비비앙과 시간을 죽였다.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지아가 뒤늦게 거실로 내려왔다.

다행히 아침에 봤던 그 묘한 느낌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확인해봐야지.

"지아야."

"네?"

"잠깐만 이쪽으로 와볼래?"

내 부름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지아가 내 앞에 멈춰 서기 직전에 손을 뻗어서 지아를 잡아당겨서 품에 안았다.

지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지며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렇게 보면 평소 그대로인데….

우리 애들은 내가 품에 안을 때 각자 반응이 다르다.

비비앙은 좋다고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며 품속으로 파고들고,

라티니아는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은근히 몸을 기댄다.

올리비아는… 딱히 내가 먼저 안을 기회가 없었네?

그리고 지아는 이렇게 얼굴이 새빨개지며 긴장한다.

"도, 도준 씨?! 갑자기 왜…?"

"네가 좋아서 그래."

"또 그건가요? 정말…."

지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품에 몸을 기댔다.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평소대로 멀쩡한 척을 하는데 이건 전혀 평소의 반응이 아니다.

난 천변을 꺼내서 지아의 손에 쥐여줬다.

"이건 뭔가요?"

"좋은 거야, 좋은거."

"그런가요?"

"응. 그리고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지아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반쯤 확신했다.

이제 정말 확신을 얻을 차례다.

난 잠깐 고민을 하다가 지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후, 지아가 들고 있던 천변이 검게 물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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