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98화
* * *
계절은 초여름.
하지만 날씨는 이세계답게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다.
그야말로 모험을 떠나는 데에 절호조인 상태.
"하아…."
하지만 난 순수하게 그 상황을 즐길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지아의 이상행동도 잘 해결했고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던 맹수도 제압했다.
이제 정말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 기대는 다음 날 아침 산산이 부서졌다.
"죄송한데 역시 저는 그 숲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툭.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식당으로 내려가자마자 지아가 파티 탈퇴 선언을 해왔다.
나는 기분을 내기 위해 들고 있던 모험의 필수품, 대용량 배낭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응? 뭐라고?"
"생각해봤는데 역시 저는 따라가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도준 씨."
지아가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서 있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날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제가 다른 분들에 비해 여러모로 떨어지잖아요?"
"아직도 그런 생각 하는 거야? 다른 애들이랑 비교할 필요 없다니까."
"비교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제가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려는 거죠."
그렇게 말한 지아는 양손으로 모아쥔 손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뭉클한 감촉이 내 손 가득 느껴졌다.
"비비앙이랑 둘이서 다녀오세요. 그리고 다녀오시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지아가 말을 흐렸다.
내 손끝으로 지아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전해져 왔다.
우리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그래? 지아 네가 그렇다면야..."
"네..."
나는 지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손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읽고 지아도 살며시 내게 몸을 기댔다.
"나도 안 갈 건데?"
그 순간 비비앙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감돌던 분위기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비비앙이 날려보낸 건 지아와 나 사이에 감돌던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어...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비비앙, 방금 뭐라고...."
"나도 안 갈 거야."
"잠깐, 잠깐만.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줄래?"
"도준 씨...."
"당신...."
지아와 라티니아가 날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난 지금 진지하다.
"왜? 왜 안 가는데?"
"그런 게 있어. 도준은 몰라도 돼."
비비앙은 그 말을 남기고 타박타박 거실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부터 시작될 모험으로 달아올랐던 내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팡!
"언제까지 풀 죽어 있을 거야!"
"흐엑!"
먼 산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겨있던 내 등을 올리비아가 두들겼다.
그 불의의 기습에 비틀거리는 나를 올리비아가 부축했다.
나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올리비아를 돌아봤다.
그런데 나는 차마 올리비아에게 따지지 못했다.
올리비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서 적응이 안 될 정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렇게 간다 간다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출발하니까 가기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비비앙이..."
"사춘기라도 왔나 보지. 대신 내가 같이 가 준다니까?"
"사춘기라니 그걸 네가... 아니다."
나는 걱정이 담겨있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하던 말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이 안 든 건 올리비아인 것 같은데....
진실을 고하는 자는 항상 배척받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의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말을 아끼기로 했다.
대신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마법진은 어쩌고 날 따라오기로 한 거야?"
"지금 마법진이 중요해? 그리고 마법진 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새 진전이 있었나 보네."
"뭐 그렇지. 넌 신경 안 써도 돼."
올리비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며칠 전에 적어도 2주는 넘게 남았다고 했으면서 그새 상황이 바뀌었나 보다.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건 너무 소설 같은 이야기고,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 정도겠지.
"그래? 잘 됐네."
"그러니까 넌 이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그...뭐였지? 의 숲에 가서 뭘 할지나 생각해."
"그래야겠다. 하... 비비앙..."
"아니 그분이 아니라... 하...."
나는 올리비아의 한숨 섞인 푸념을 무시하고 비비앙 생각에 빠져들었다.
────◆────◇────◆────
'저 정도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올리비아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신도준을 바라봤다.
다행히 생각보다 상태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이것 때문에 굳이 연기를 하셨던 건가?'
올리비아는 어젯밤 비비앙의 방에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들어갈게...요."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존댓말을 하며 비비앙의 방으로 들어갔다.
좁고 검소한 방에는 비비앙이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신도준이 없을 때 비비앙은 항상 이런 모습이다.
그런데 올리비아에게는 그 모습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기, 비비앙...님?"
"…."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비비앙을 불렀다.
비비앙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서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붉은 눈동자가 올리비아에게 향했다.
'꿀꺽.'
올리비아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낮에 보여줬던 날카로운 모습과는 또 달랐다.
하지만 여전히 본능적인 위화감이 느껴졌다.
역시 비비앙은 아니, 이 분은 어딘가가 달라졌다.
"혹시 마법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
여전히 비비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며 조용히 비비앙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긴 시간이 지나고 비비앙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올리비아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으신 거구나.
'그렇다면 나도 분위기에 맞춰 줘야지.'
"알겠어.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을게...요."
"응?"
올리비아는 비비앙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비비앙의 방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비비앙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역시 신도준을 신경 쓰시는 건가? 그건 다행이구나."
올리비아는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뱉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변했는데....'
지금까지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신도준도 언젠가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겠지.
고작 같이 가기로 했던 산책하러 가지 않기로 한 걸로 저렇게 반응을 하는데 만약 신도준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아마 큰 사단이 일어날 거다.
'나라도 신도준을 위로해줘야지.'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올리비아의 안에서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지금 별로 관심도 없는 무슨 숲에 따라 나선 것도 그 일환이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올리비아의 머릿속에서 어떤 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내가 영원의 숲에 가려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오픈형 던전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비비앙과 둘이서 트리마체까지 올 때 몇 번 던전에 들어가 보긴 했지만 그건 애들 장난 같은 거고 영원의 숲 같은 오픈형 던전은 또 다르다.
게다가 그 넓이도 엄청나니까 오히려 확인하기 제격이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대미궁에 갈 생각이니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느낌이다.
두 번째 이유는 클리어 보상을 위해서이다.
게임에서는 랜덤 보상을 하나씩만 얻을 수 있었는데 여긴 게임이 아니니까.
혹시 보상 테이블의 모든 보상을 다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어느 정도 깔려있다.
애초에 길은 다 알고 있으니까.
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말이 좋아서 마력이 봉인되는 숲이지 비전투형 던전이라 그냥 단순히 넓은 던전일 뿐이다.
치트키를 한두 개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껌이지.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이유는....
영원의 숲의 보스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영원의 숲의 보스는 랜덤으로 생성되는데 그 보스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델링이 기가 막히게 뽑혔다는 것.
하나같이 정말 예쁘게 잘 나왔다.
에일린을 실제로 본 순간 나는 확신을 얻었다.
모델링보다 더 잘 나오면 나왔지 절대 못 나오진 않는다고.
누가 되었든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물론 이 이유를 애들에게 말하긴 조금 민망해서 굳이 밝히진 않았지만...
라티니아가 질색을 해서 관심이 생겼다는 부차적인 이유도 있지만 큰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라티니아가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그 장소에 가지 않을 건 아니지만.
절대 괴롭히려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라티니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그런 거다.
라티니아는 나를 못 믿는 거 같았지만...
언젠가 본때를 보여줄 거다.
"하아...."
원래라면 이렇게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될 모험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조져졌다.
올리비아랑 같이 가는 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그 꼬맹이만 생각하고 있어?"
올리비아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내가 너무 다른 애들 생각만 했구나.
막상 나를 따라 나선 건 올리비아인데.
"미안, 올리비아. 널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어?"
핀잔이라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올리비아는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뭔가 심경의 변화라고 있나?
관심 없다던 영원의 숲에 굳이 따라 나온 것도 그렇고 뭔가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 보다.
나로서는 올리비아의 사회성이 좋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비비앙이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니 편이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하고."
"올리비아?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올리비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잠깐 정지했던 올리비아가 상황을 파악한 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짝!
"무슨 짓이야!"
"아야!"
나는 올리비아에게 얻어맞은 손을 호호 불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은가보다.
그냥 워낙 오랜만에 단둘이만 나와서 그렇게 느꼈나 보다.
"너... 걱정해주는 사람을 환자 취급해?"
"걱정? 네가 나를 왜 걱정해?"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적으로 당황한 올리비아가 표정을 싹 바꾸고 앞서나갔다.
나는 그런 올리비아에게 따라붙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저 멀리에 우리의 목적지 영원의 숲 초입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