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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화 〉 142화 (143/191)

〈 143화 〉 142화

* * *

셀레네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셀레네의 상태가 더 자세하게 느껴졌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원리를 따질 때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셀레네가 거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셀레네가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도 다급해졌다.

"올리비아! 달려!"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좀 가!"

올리비아는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하게 발을 놀렸다.

얼마나 달려나갔을까, 셀레네가 그 자리에 멈춰 선 것과 동시에 우리는 셀레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것 말고는 몸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내가 셀레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내 몸을 잡아당겼다.

"왜?"

"기다려 봐. 누군가 있어."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셀레네의 앞에 검은 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바닥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셀레네와 대화하는 그 정체불명의 여자의 기색을 살피며 올리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뜻으로 온 거 같지는 않지?"

"응. 그런데 굳이 우리가 저 사이에 껴들어야 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저쪽도 더러운 피 냄새가 솔솔 나는 걸로 봐서 모기년인 것 같아서 말이지. 쟤들끼리 일인 거 같은데 굳이 방해해야 하나 싶은 거야."

어쩐지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했는데 저 검은 머리 여자도 뱀파이어였다.

뒷모습만 봐서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올리비아는 어떻게 안 거야?

진짜 피 냄새 같은 게 나기라도 하나?

"에이, 우리가 남도 아니잖아. 라티니아도 있고."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좋아, 도와주자."

"올리비아...."

"왜?"

"아무것도 아니야."

난 한심한 소리를 하는 올리비아를 한번 흘겨봐주고 다시 셀레네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곧바로 뭔가를 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올리비아, 저 뱀파이어랑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음...."

올리비아가 턱을 쓰다듬으며 각을 쟀다.

진다고는 안 하네.

역시 올리비아답다.

"한 방, 한 방만 먹이면 이길 수 있어. 근데 워낙 잽싸서 그 한 방을 먹이는 게 어렵지."

"그건 나한테 맡겨."

한 방을 먹일 계책은 있다.

물론 저번에 피렐에게도 자신 있게 덤볐다가 형편없이 깨진 걸 아직 기억하고 있는 만큼 완전히 신뢰하진 않지만 일단은 믿어줘야지.

저 뱀파이어의 발을 묶을 방법은... 방금 떠올랐다.

"내가 신호하면 달려들어. 알겠지?"

"무슨 수라도 있어?"

"응. 아마 가능할 거야."

나는 천변을 아주 얇고 가늘게 펴서 조심스럽게 땅속으로 침투시켰다.

내 손에서 빠져나온 무색투명하고 가느다란 실이 천천히 땅속을 전진해 나갔다.

적당한 거리가 됐다고 생각한 그 순간 흑발의 뱀파이어를 중심으로 뱀파이어의 주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나조차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지금인가?

나는 흑발의 뱀파이어의 발목에 천변로 만든 실을 느슨하게 걸어두고 풀숲을 헤치고 나갔다.

"어... 방해했나요?"

내 맥빠진 목소리가 셀레네와 흑발의 뱀파이어 사이를 갈랐다.

흑발의 뱀파이어는 날 경계하는지 힘을 거두며 한 발짝 물러섰다.

다행히 한 발짝 물러난 것으로는 발목에 걸어둔 천변이 당겨지지 않았다.

나는 천변의 실을 팽팽하게 당기며 올리비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앗!"

뒤늦게 발이 묶였다는 걸 알아차린 흑발의 뱀파이어가 놀라는 걸 확인한 나는 셀레네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마치 나와 교대하듯 올리비아가 흑발의 뱀파이어에게 쏘아져 나갔다.

이제부터는 올리비아가 다 해줄 거야.

난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을 끄고 눈을 질끈 감은 셀레네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여기부턴 우리한테 맡겨."

나름 신뢰를 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는데 셀레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의 날카로운 눈매는 어디 가고 라티니아가 떠오를 정도로 맹한 표정을 지은 셀레네의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어? 야!"

나는 셀레네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셀레네를 안아 들었다.

내 품에 안긴 셀레네의 몸이 축 처졌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썩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절해 있으니까 영 마음에 걸린다.

이게 다 셀레네가 빼다 박았다고 할 정도로 라티니아랑 닮아서 그래.

나는 먼지에 얼룩져 흐트러진 셀레네의 머리를 정리해주면서 한창 투닥거리고 있는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이익! 피하지 마!"

아무래도 상황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올리비아는 한 방 먹인 후에 유효타를 못 먹인 게 짜증 나는지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고, 그런 올리비아를 흑발의 뱀파이어는 간단히 피해내고.

마치 투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뭐? '한 방만 먹이면 이길 수 있어.'라고?

올리비아가 그럼 그렇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변을 다시 소환했다.

이번에는 실이 아니라 그물 형태로.

"이익! 이게!"

나는 천변으로 만든 그물을 손안에 감추고 상황을 살폈다.

흑발과 적발이 휘날리며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잘못 던지면 오히려 올리비아에게 방해가 된다.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해.

"꺄앗!"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올리비아의 저돌적인 맹공에 지쳤는지 지금까지 잘 피해오던 흑발의 뱀파이어가 올리비아에게 공격을 허용했다.

양팔을 교차해서 주먹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까진 해소하지 못한 흑발의 뱀파이어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천변의 그물을 펼쳐서 흑발의 뱀파이어를 옭아맸다.

"신도준? 잘했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올리비아가 허공에 매달린 흑발의 뱀파이어에게 쇄도했다.

올리비아의 오른손에 가공할만한 마력이 응집되었다.

저 공격에 맞았다간 그 누구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만큼 올리비아의 주먹에 담긴 힘은 강력했다.

­ 콰앙!

올리비아의 손에 모인 강력한 마력이 아무 여과 없이 흑발의 뱀파이어를 덮쳤다.

한 번의 주먹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힘은 뱀파이어를 완전히 분해하고도 충분한 여력이 남아서 산 중턱에 내리 꽂혔다.

지진이라도 난 듯한 엄청난 땅 울림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너무 심했나? 헤헷,"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하는 올리비아와,

"허어...."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한 귀퉁이가 완전히 사라진 산 중턱의 모습이었다.

"그 뱀파이어는... 죽었겠지?"

"아니, 안 죽었을걸?"

나는 들쳐 맨 셀레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뒤늦게 자기가 한 짓을 깨닫고 내 눈치만 보던 올리비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뭐라고?

"안 죽었다고? 그런 공격을 맞았는데도?"

"확실히 육체는 소멸했어. 그런데 뭔가 손맛이 안 좋은 게, 아직 안 죽은 것 같아."

"그래?"

"응. 뭔가 최후의 순간에 무슨 수를 쓴 것 같아."

올리비아가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찼다.

뭐, 뱀파이어의 고유 능력 같은 게 있겠지.

관심 없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른다.

하물며 뱀파이어같은 고위급 이종족까지 엮여 있으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내 말투에 그런 생각이 묻어나왔는지 올리비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말투가 조금 맘에 안 드는데."

"기분 탓이야, 기분 탓."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올리비아를 놀리면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셀레네에게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만나서 마음이 가벼웠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야. 주로 라티니아가.

셀레네가 다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라티니아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인가?"

"그렇지?"

"으... 여긴..."

그 순간 셀레네가 몸을 뒤척이며 목소리를 흘렸다.

벌써 정신을 차린 건가?

"일어났어? 몸은 어때?"

"너... 신도준... 윽!"

자기가 누구한테 업혀있는지 알아차린 셀레네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내 등에 몸을 기댔다.

정신만 차렸고 아직 몸을 가누진 못하는 것 같다.

"내려..."

"몸도 제대로 못 일으키면서 뭔 소리야?"

"내가... 너같은 거 한테..."

"아니면 올리비아한테 업혀줄까?"

"...."

그건 싫은지 셀레네는 조용히 내 등에 머리를 기댔다.

서로 좀 사이좋게 지내라고.

이제 와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일단 나부터 셀레네와 사이가 안 좋다. 셀레네가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지만.

참 걱정이야. 왜 그렇게 서로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난 딱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불편한 사람은 있지만.

"그래, 얌전히 있어야지."

"이익!"

내 말에 발끈한 셀레네가 몸을 일으켰다가 힘없이 다시 내게 기댔다.

반항이 약하니까 건드릴 맛이 나는구나.

그 후로도 나는 셀레네를 계속 건드리면서 산길을 걸어갔다.

그런 나를 올리비아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걸은 후에야 우리는 마법진이 그려진 공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쁜 마음에 달려갈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멀었구나.

아침 일찍 출발했었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아직 준비 안 됐어?"

"이제 곧 끝나! 좀만 더 기다려!"

바로 돌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올리비아가 마법진을 수정하겠다고 나서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멀미를 심하게 느낀 것에 대해서 자기 책임을 느끼나 보다.

내가 멀미를 심하게 느끼는 체질이라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말이지.

뭐, 나야 좋지.

마침 할 일도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안 도망가니까."

"으읏!"

내 팔뚝에 이빨을 박고 피를 빨던 셀레네가 찌릿, 하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입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나는 지금 셀레네에게 피를 주고 있다.

"야! 너 괜찮아?!"

처음 마법진이 그려진 공터에 도착해서 셀레네를 내려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그만큼 셀레네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나는 핏기가 완전히 가셔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는 셀레네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쩐지 언제부턴가 말이 없다고 했어.

그냥 잠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태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왜 그래?"

"얘 상태가 이상해!"

"그래?"

올리비아가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라고 할 때가 아니야!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 하면... 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실례 좀 할게, 셀레네."

나는 셀레네의 턱을 잡아당겨서 입을 강제로 벌렸다.

셀레네의 입이 힘없이 열리며 셀레네의 입 안쪽이 그대로 보였다.

내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평소에는 숨겨져 있어야 할 송곳니가 삐죽 드러나 있었다.

"음..."

나는 소매를 걷으며 각오를 다졌다.

문득 비비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몸을 막 쓴다고 했지.

그리고 내 정기가 바닥났다고도 했다.

별일이야 있겠냐만, 왠지 마음에 걸린다. 비비앙이 빈말을 할 리 없으니까.

그래도 이걸 그냥 둘 순 없잖아?

나는 팔뚝을 셀레네의 입에 물려줬다.

"아얏!"

그 순간 셀레네의 송곳니가 내 팔뚝에 꽂혔다.

생살에 날카로운 이빨이 꽂히는 섬뜩한 감각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던 셀레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셀레네의 당황에 찬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본능에 따라 내 팔을 물었나 보다.

"뭐 해? 얼른 마셔."

"으브..."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우물거리던 셀레네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을 타고 피가 쭉쭉 빠져나가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감각은 소름이 끼쳤지만 마시고 있는 게 라티니아와 비슷한 외형을 한 셀레네다 보니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라티니아를 놀리다가 자주 물렸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다 되는구나.

앞으로도 라티니아를 많이 놀려줘야겠다.

나는 새에게 모이를 주는 감각이랄까, 거머리에게 밥을 주는 느낌을 느끼며 셀레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피를 빨던 셀레네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날 올려다봤다.

"뭐, 왜? 마시기 싫어?"

내 말에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셀레네가 다시 눈을 감고 내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가 피가 빨려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셀레네의 새하얗게 바랬던 안색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다행히야. 피만 줘도 되는구나.

나는 그럴 린 없겠지만 혹시라도 셀레네가 다른 주술을 쓰지 않을까 경계하며 셀레네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내 걱정과 달리 셀레네는 당장 뭔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허탈감과 만족감이라는 상반되는 감각을 느끼며 셀레네가 만족할 때까지 팔을 내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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