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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화 〉 151화 (152/191)

〈 152화 〉 151화

* *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의 영원의 숲 초입, 세 명의 이종족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영원의 숲의 식생은 전부 거대하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해가 빨리 진다.

라티니아가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음에도 깜깜해진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해가 많이 짧아졌구나. 서두르자."

"그러게 조금 일찍 출발하자니까."

"나야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피렐 님이 안 놓아주시는 걸 어떡해?"

"참... 말로만 들었지 그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생각보다 더하시더라."

셀레네가 라티니아가 맨 배낭을 보며 말했다.

그 배낭은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있음에도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안에는 피렐이 건네준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무게 감소 마법이 걸려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못 들고 갔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은신처는 왜 정리한 거야?"

그뿐만 아니라 배낭에는 오두막에서 챙겨온 물건까지 들어있었다.

이것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해서 하루 더 걸리게 된 것이다.

셀레네의 질문에 라티니아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왠지 느낌이 안 좋아. 오랜 시간, 혹은 영영 저 오두막을 못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또 그 직감이야?"

"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라티니아는 이렇게 가끔 자신의 직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다.

물론 그 직감이 괜한 걱정이거나, 망상이라고 해도 셀레네는 군말 없이 따랐으리라.

"맞다! 너 늦는다고 저택에 연락 보냈어?"

"아니? 이제 코앞인데 뭘."

"그러지 말고. 아마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에이, 이제 곧 도착하는데 뭘."

"너도 참..."

라티니아가 고개를 잘래잘래 저으며 자신과 손을 맞잡은 유엘을 내려다봤다.

평범함을 꾸미고 있었지만 은은하게 느껴지는 피곤한 기운을 라티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라티니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유엘에게 말을 걸었다.

"아라는 힘들지 않니?"

"네, 괜찮아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들어도 참아. 얼마 안 남았어."

"네, 언니."

세 자매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좁은 숲길을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서로의 어깨가 조금씩 부딪쳤지만, 그 누구도 불편함을 티 내지 않았다.

영원의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이변이 일어났다.

이상함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셀레네였다.

"잠깐만. 둘 다 멈춰봐."

셀레네가 한 발짝 앞서나가서 팔을 쳐들고 라티니아와 유엘을 가로막았다.

라티니아는 그 상황이 익숙한지 망설임 없이 한 발짝 물러서서 유엘을 등 뒤로 보내고 몸을 긴장시켰다.

­ 짝짝짝.

"대단하구나, 셀레네. 내 은신을 알아차리다니."

그순간 에스트가 손뼉을 치며 숲의 어둠을 가르고 걸어나왔다.

그 박수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지금까지 셀레네를 추격했던 체페슈의 인원들이 은신을 해제하고 그들을 둥글게 감쌌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셀레네의 표정이 낭패감에 젖어들었다.

'실수했어. 매복을 이렇게 늦게 알아차리다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친근하게 말 걸지 마시죠."

"슬프구나. 너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컸었는데.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다가오지 마!"

셀레네가 날카롭게 벼린 손톱을 휘두르며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에스트를 위협했다.

셀레네는 속지 않는다.

무해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에스트의 발밑에선 그림자가 격렬하고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밤눈이 밝은 뱀파이어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연기다.

"신중하구나. 역시 우수해."

셀레네의 반응을 보고 연기가 들켰다는 걸 알아차린 에스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체페슈의 수장인 에스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장이다.

하지만 셀레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셀레네는 그저 주변을 둘러싼 뱀파이어의 벽을 훑으며 틈을 찾을 뿐이었다.

"그렇게 찾아도 빈틈은 없단다."

"칫,"

여유로운 에스트의 반응에 셀레네가 혀를 찼다.

그 말대로 어디에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에스트가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다.

그럴만 한 상황이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셀레네는 어깨에 힘을 풀며 포기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면서 신도준에게 맡겨둔 자신의 사역마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통신까지 할 여유는 없다.

그저 구조 요청을 보내는 것만이 셀레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도준이 알아차려야 할 텐데...'

"휴... 좋아요. 목적은 저 하나죠?"

"셀리!"

"언니는 가만히 있어. 수장님?"

다 포기한듯한 제스쳐와 다시 수장님으로 돌아온 호칭.

누가 봐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반응이다.

하지만 신중한 에스트는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흐음... 어쩔까?"

그 여유로운 반응에 애가 타는 건 셀레네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 새끼가 원하는 건 저 아닌가요? 그럼 저만 데려가면 되잖아요."

"확실히 그랬지. 그런데 애초부터 목적은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숨은 저 왕녀님 같단 말이지."

"언니는 건드리지 마!"

"네가 큰소리칠 처지가 아닐 텐데?"

에스트가 라티니아를 언급하자마자 발작하듯 반말을 외친 셀레네를 유들유들한 미소로 받아쳤다.

앞에는 과장되게 고민하는 척하는 에스트, 뒤에는 무슨 소리냐는 듯 옷자락을 부여잡은 라티니아.

전퇴양난의 상황에 셀레네의 애간장이 타올랐다.

그 불안한 상황을 깨트린 건 에스트였다.

"좋아, 지금 오면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을게."

"정말인가요?"

"셀리! 안 돼!"

"언니는 가만히 있어."

"하지만!"

라티니아와 셀레네가 주변 상황을 잊고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에스트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역시 셀레네만 데려가도 다 해결되겠군.'

에스트의 주인의 명령은 '셀레네를 무사히 데려올 것'이었다.

그가 라티니아를 원한다는 것은 에스트의 추측이었다.

에스트는 그가 실제로 라티니아를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 불확실한 지금 모험을 할 용기가 없었다.

안 그래도 1차 추격전에서 그 마녀의 습격으로 심하게 문책을 당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안전한 수를 둘 때다.

그런 상황에서 라티니아의 저런 반응은 에스트에게는 좋은 기회로 느껴졌다.

셀레네만 데려가도 라티니아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테니까.

'좋아, 조금만 더 흔들면 되겠어.'

"말다툼은 끝냈니? 어떻게 할래?"

"제가 순순히 따라가면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건 확실하죠?"

"그럼, 당연하지. 정 못 미더우면 맹세해도 좋아. '네 자매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한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후... 어쩔 수 없네요."

"셀리!"

"어쩔 수 없잖아. 언니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아."

"안 돼! 절대 못 보내! 너도 국왕님 성격 알잖아!"

한번 문 목표는 죽어도 놓지 않는 맹수.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폭군.

셀레네가 그런 그에게 간다면...

"잘 알지. 그런데 언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

"지금 상황을 봐. 언니도 조금만 냉정해지면..."

"이 상황에 어떻게 냉정해져! 난 못 해!"

"언니도 알잖아? 다른 방법이 없어."

"그치만!"

"더 기다려야 할까?"

다시 언쟁을 시작하려는 셀레나와 라티니아를 지켜보던 에스트가 둘의 말을 끊고 파고들었다.

지루함이 잔뜩 묻은 에스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셀레네가 라티니아의 손에 깍지를 끼고 서로를 마주 봤다.

"아무튼 이걸로 끝이야. 잘 지내."

'곧 신도준이 올 거야. 잠깐만 자고 있어.'

"셀리? 아...."

셀레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표하던 라티니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자신의 계책을 들키지 않기 위한 셀레네의 조치였다.

셀레네가 천천히 무너지려는 라티니아의 몸을 받쳐 들었다.

아끼는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라티니아의 볼을 쓰다듬은 셀레네가 라티니아를 유엘에게 건넸다.

상황을 모두 파악한 유엘이 가타부타 말없이 라티니아를 받아들었다.

셀레네가 눈치 빠른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칭찬하듯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니?"

"네, 수장님."

"그럼 이제 가자꾸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

그렇게 말한 에스트가 셀레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신도준이 제때에 도착한다면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더는 시간을 끌 거리가 없다.

망설이는 셀레네를 에스트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입술을 질끈 깨문 셀레네가 천천히 에스트가 내민 손으로 손을 뻗었다.

셀레네와 에스트의 손끝이 맞닿기 직전, 에스트의 표정이 급변했다.

────◆────◇────◆────

우리는 박돌이를 따라 어두운 숲 속을 달려나갔다.

군데군데에 나무뿌리가 삐죽 튀어나와서 걸음을 방해하고 시야까지 어두워서 속도를 내기 쉽지 않았다.

나는 일단 달리던 걸 멈추고 박돌이를 불렀다.

"케륵?"

"박돌아. 정확한 방향이 어디야?"

"케륵! 케르륵!"

내가 멈추자마자 내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날 재촉하던 박돌이가 날개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긴... 영원의 숲의 초입 방향인가?

방향과 위치상 영원의 숲의 초입이 맞는 것 같다.

영원의 숲은 넓지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한정되어있다.

지금 박돌이가 가리킨 방향에 바로 그 입구가 있다.

잘 됐어.

"뭐야 너, 박쥐랑 대화도 할 줄 알아?"

"마녀랑도 대화하는데 뭘."

"그건 무슨 의미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위험하니까 잠깐 물러나 봐."

나는 천변 리볼버를 소환하며 올리비아를 불러세웠다.

이걸로 길을 뚫을 생각이었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올리비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놔. 위험하잖아."

"위험한 건 니가 지금 하려는 거고. 그러다가 라티니아가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

그걸 생각을 못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어.

나는 천변 리볼버를 없애고 다시 달릴 준비를 했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봐.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 생각?"

"야, 박쥐. 지금 걔들 멈춰있는 거 맞아?"

"케륵!"

"...뭐라는거야?"

"맞대. 그건 왜?"

"지하로 이동하자."

"지하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가 두더지도 아니고 어떻게 지하로 다녀?

"설명하긴 귀찮으니까 생략. 아무튼, 달리는 것보단 빠르고 편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맞지."

"그럼 이리로 와. 박쥐, 너도!"

올리비아가 내 팔을 잡아끌어서 품에 안았다.

내 주변을 날아다니던 박돌이도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올리비아의 손에 잡힌 박돌이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저거 괜찮은 건가?

박돌이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던 와중에 핏빛 장막이 우리를 감쌌다.

"이건...전에 봤던 그거잖아?"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이번에 개량 좀 했지."

당당하게 외친 올리비아가 마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우리를 태운 핏빛 구체가 천천히 지면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지면으로 스며든 올리비아가 박돌이를 쥐고 흔들며 말했다.

"야, 박쥐! 방향이 어느 쪽이라고?"

"이쪽이야. 그리고 박돌이는 돌려줘."

"쳇, 나약한 녀석."

올리비아가 혀를 차며 미라처럼 쪼그라든 박돌이를 내게 휙 던졌다.

쪼그라든 건 의태였는지 박돌이는 내게 돌아오자마자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바들바들 떠는 박돌이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준비됐지? 간다."

"어떻게... 으아악!"

내가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구체가 빠르게 발진했다.

그 엄청난 속도를 예상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날 올리비아가 품에 안았다.

전에는 그냥 답답하기만 했는데 지금만큼은 이 자세가 오히려 도움이 되는구나.

사람 한 명과 마녀 한 명, 그리고 박쥐를 태운 구체가 우리의 목적지, 영원의 숲 초입으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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