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157화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찾아왔다기보단 이미 거실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제 늘어지게 낮잠을 잔 덕분에 일찍 일어난 나는 무방비하게 비비앙을 안고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그 손님을 맞닥뜨렸다.
"두 달 만인가? 잘 지냈나 보군."
"학장님? 여긴 무슨 일로?"
"할 말이 있어서 잠깐 들렸네. 보고 싶은 아이도 있고.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직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라 조금 이르긴 하네요."
"자네는 일찍 일어나는군. 동생하고 사이도 좋은 것 같고."
한명신 학장이 비비앙을 안고 있는 날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차, 아직 비비앙을 내려놓지 않았구나.
이런 실례를...
"비비앙, 잠깐 내려오자. 손님이 계시잖아."
"싫어."
"그러지 말고. 응?"
"괜찮네. 서로 사이가 좋으니 보기 좋구먼."
한명신 학장이 사람 좋은 할머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투닥거림을 중재했다.
아니 사람 좋은 할머니는 맞긴 한데...
한명신 학장도 그리 말하니 딱히 내려놓을 핑계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난 비비앙을 안은 채 한명신 학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라니? 여긴 지금 자네가 살지 않는가? 난 손님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
신경 쓰지 말라고?
그게 말처럼 쉽게 안 되니까 문제다.
내가 비비앙급의 철면피도 아니고 이 상황을 어떻게 신경 안 써?
안 그래도 꾸미지도 않고 옷도 편하게 입은 상태에서 만나서 낮 뜨거운데.
"라세르티아 왕국에서 사건이 생겼었다지?"
내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명신 학장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진짜 이대로 대화하는 건가?
프리즘의 학장이랑 반팔에 반바지 입고 무릎에 비비앙을 앉혀둔 채로?
"혹시 셀레네에게 그 말은 들었나?"
"라티니아에 대한 거라면 들었어요."
"역시 그 아가가 말해 줬나 보군. 라티니아 님은 모르시고?"
"그야 그렇죠. 라티니아에게 할 말은 아니니까요."
"잘했네.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하지."
이제야 내가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물론 라티니아가 뒷전인 건 아니지만 일단 무사히 프리즘에 돌아왔...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네는 프리즘을 떠나줘야겠네."
그 순간 한명신 학장이 평온한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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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신은 평생을 영웅 협회와 대립해왔다.
게이트 작전사령관을 할 때에도, 지금 프리즘의 학장직을 할 때에도.
그만큼 한명신은 영웅 협회의 더러운 부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끈질긴지, 그들이 얼마나 목적 달성을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는지.
그런 그들이 신도준을 타겟으로 삼았다.
지금은 영웅 협회의 관심이 올리비아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올리비아가 발표한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주인이 신도준이라는 사실이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한명신이 신도준에게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명신도 오늘 새벽에 그 정황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이미 신도준의 과거를 파악한 한명신으로써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온갖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는 처지에서 신도준을 안전하게 보호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오히려 특정 생도를 편애한다며 역풍을 맞겠지.
그 상황에서 신도준을 보호할 방법은 영웅 협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신도준을 빼돌리는 것뿐이다.
그래, 마치 대미궁처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한명신은 어안이 벙벙해진 신도준을 바라봤다.
신도준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신도준의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비비앙이란 아이가 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가라앉은 눈동자.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서야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지을 순 없을 테니.
사실 비비앙은 아무 생각이 없어서 표정 변화가 없던 거였지만 한명신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해가 빠르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프리즘에서 떠나줘야겠어. 페르티스라고 기억하나? 그에게 연결해줄 테니..."
"왜죠?"
"설명하자면 기네. 그냥 잠시 피신하는 걸로 알고 있으면..."
"영웅 협회 때문인가요?"
"...눈치 챘는가?"
한명신은 역시 신도준은 머리가 잘 돌아간다, 라고 생각했다.
그 짧은 대화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영웅 협회를 떠올리다니, 이건 본인도 영웅 협회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사고의 흐름이다.
마음속에서 신도준에 대한 기준을 한 단계 높인 한명신이 타이르듯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영웅 협회는 위험하네. 그리고 그들이 자네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정황을 파악했네."
"그렇군요."
"나는 프리즘의 생도를 영웅 협회에게 쉽게 넘겨줄 생각 없네. 영웅 협회로 가더라도 본인이 고민하고 선택해서 가야지. 그런데 지금 영웅 협회는 뭐든지 하겠다고 벼르고 있네."
"영웅 협회라면 그러고도 남죠."
"문제는 내가 자네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상황이라는 거네. 나로서는 도피처를 마련해주는 방법밖에 없어."
"말씀은 감사하지만, 굳이 도피할 필요는 없어 보여요. 저도 그놈들 방식은 익숙하거든요."
"물론 자네만큼 그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프리즘의 모든 생도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나로써 자네가 다시 그들의 위협에 노출되게 둘 순 없네."
'다시?'
한명신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짚어낸 신도준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언제 내가 영웅 협회와 엮였다고 다시 인가?
김예은과 잠깐 교류한 적은 있지만, 영웅 협회와 연결되기도 전에 셀레네 선에서 처리됐다.
그 후 지금까지 영웅 협회와 엮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신도준의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명신은 자신이 준비한 도피방법을 신도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하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티스가 대미궁 체험 생도 모집 명목으로 프리즘을 방문할걸세. 그리고 그 생도 모집에 자네와 라티니아 님이 선발될걸세. 그들과 함께 내가 영웅 협회를 억누를 때까지 대미궁을 탐험하다가 오면 되네. 간단하지?"
"음...."
"뭔가 문제라도 있나?"
"네."
한명신의 계획상 대미궁으로 사실상 피신하는 인원은 신도준과 라티니아밖에 없다.
비비앙과 셀레네는 프리즘 생도가 아니니까 일행을 따라온다고 해도, 남은 올리비아와 이지아가 붕 뜬다.
신도준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저는 영웅 협회에게서 도망갈 생각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린가? 그들을 직접 겪어 보고도 그들의 무서움을 모르는가?"
"알죠. 하지만 도망쳐봐야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도망쳐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직접 몸으로 뛰고,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신도준의 지난 5개월간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다행히 신도준은 영웅협회를 다루는 데에 제법 익숙하다.
그것을 한명신은 모르는 것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직접 위험한 곳에 발들 들일 필요는 없을 텐데."
"안 위험해요. 그놈들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허어..."
한명신이 장탄식을 내뱉으며 신도준의 기색을 살폈다.
미래의 두려움이란 흔적도 보이지 않는 당당한 신도준의 모습을.
한명신은 직감적으로 설득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몰라.'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같은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니다.
그저 겪을 대로 겼어본 신도준이 저런 말을 한 만큼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릴 생각은 없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는가?"
"네. 학장님은 라티니아 쪽을 부탁드려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절대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으니."
한명신의 대답에 만족한 듯 신도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한명신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말일세. 혹시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가?"
"계획이요? 물론 있죠."
"역시 그렇군. 혹시 그 계획이란 걸 들어볼 수 있겠나?"
"안 될 건 없죠. 간단해요. 제 계획은 바로..."
"바로?"
신도준이 간단하게 자신이 세운 계획을 털어놓았다.
신도준의 설명이 진행될수록 한명신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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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야 가셨네. 지루했지 비비앙?"
"아니, 난 괜찮아."
"그래 우리 비비앙 착하다."
나는 한명신 학장이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내 무릎 위에서 기다린 비비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 뜨기 직전에 온 학장님은 결국 다른 애들이 하나둘씩 거실에 모이고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돌아갔다.
그동안 나는 한명신 학장에게 수없이 많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부분은 내가 세운 계획에 대한 잔소리였다.
"난 학장님 의견에 동의해.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는 거야?"
"그렇게 위험한가?"
"당연하지! 그런 짓 했다간 사회의 먼지가 돼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거라고!"
"올리비아, 어디에서 그런 어려운 말 배워온 거야? 그런 성격 아니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나는 발끈하는 올리비아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계획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내가 세운 계획은 간단하다.
학장님이 말씀하기엔 지금 올리비아가 한 발표의 모티브가 내 능력이라는 연결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부정하면 된다.
나는 천변 이외에 다른 능력도 많으니까, 그걸 내세워서 내가 아니란 걸 보여준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적당히 「치유」나 「투과」정도로.
그런데 그랬다간 산 채로 해부실험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질책을 당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웅 협회가 그 정도까지 하겠어? 싶었는데 학장님이 들려준 일화를 들어보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게임으로 할 때도 더러운 짓을 마구 해댔었는데 현실은 더하구나.
영웅 협회에 대한 인상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그렇다고 대미궁에 갈 생각은 없지만.
계획을 어떻게 수정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맞다, 신도준. 다음 학기에 복학한다면 그때까지 우린 뭐 해?"
"맞아요. 왜 굳이 다음 학기 복학으로 정하신 거에요?"
지아도 내가 굳이 다음 학기 복학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지 질문을 던졌다.
...딱히 이유 없는데.
그냥 이제 와서 한 달 남짓 남은 수업 나가기도 귀찮고 놀면 좋으니까.
별생각 없이 정한 거다.
그런데 그걸 솔직히 말했다간 경멸을 받겠지?
올리비아야 경멸하는 표정이 일상이지만 지아의 경멸을 받았다간 내 마음이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아직 올리비아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다잖아. 지금 상황에 복귀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뻔히 보이지 않아? 다행히 우리가 프리즘으로 돌아왔다는 건 들키지 않았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숨어지내자."
"역시 도준 씨..."
"아니, 그런 거면 다음 학기에 복귀해도 똑같은 거 아니야?"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그 얄팍한 수작으로?"
"얄팍한 수작이라니 말이 심하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처음 생각한 대로 김예은을 만날 생각이었다.
편하게 가보려고 나름 계획을 세워봤는데 턱도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천변에 대한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그냥 김예은을 들이받는 게 훨씬 더 편할 테니까.
"그러니까 셀레네. 김예은하고 좀 연결시켜줘."
"어? 나?"
"뭘 모르는 척하고 있어? 네가 처리했다며? 설마 이미 묻어버린 거야?"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온건한 방식으로 처리했지! 기다려 봐. 바로 자리를 준비해 줄 테니까."
기세좋게 대답한 셀레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허공에 스며들듯 사라지는 셀레네에게 당부를 남겼다.
"납치하면 안 된다?"
"안 해!"
그 말을 남기고 셀레네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언제 봐도 대단한 은신이다.
저거, 나도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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