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화 악당 영애는 패배하고 싶어 (18)
* * *
소녀에게는꿈이있었다.
감수성이풍부한여느사춘기소녀들처럼멋진남자와만나사랑을받는다는꿈이.
하지만.
그녀가원하는남자는돈이나권력같은것을다가진백마탄왕자님도아니었고,사랑을받는과정도일반적이지않았다.
남들에게말할수없는.
알고있는사람또한없는.
부끄러운비밀에가까웠다.
“...”
목욕을하는와중에도저남자는지긋이나를지켜보고있었다.배려나부끄러움따위는없는것일까.담담하게파이프를피우면서시선을피하지도않는다.
리체르카는방금전까지있었던일을회상했다.
처음느껴보는남자의손길.그것은최악이었을뿐더러,곧바로인생에서가장불쾌했던기억으로자리잡았다
투박하고,더럽고,추악하며온갖저열한욕망이한곳에담겨있는그감촉.
화가나는것은그손길이기분이나쁘지만은않았던것이다.뱀이온몸사이를훑고가는그느낌은,호기심에의해서큐버스에게손길을허락했을때보다더한쾌락이느껴졌다.
“흐읏···.”
앞으로저런양아치같은남자에게순결을빼앗기는걸까.마음속에서분노만쌓여갈뿐,기대나두근거림따위는없었다.그는나의가치를제대로알아보지도못하는저급한남자였으니까.
천박하고추잡한손길에내몸이느껴버리는것은,단순히내가남자에대한경험이없는처녀였기때문일것이다.
반드시.
반드시오늘이지나면살아있는게지옥같은삶은맛보게하리라.
*
창문이열려있는복도에차가운밤바람이들어왔다.어렴풋이비쳐주던촛불이살짝일렁이고,바닥에깔려있는카펫은두개의발자국이찍혀졌다.
커다란발자국은거침없이걸어가고있는아서의것이었다.그뒤에작은발자국은종종걸음으로쫓아오는리체르카의것이었고.
물론두사람이평범하게복도를걷고있는것은아니었다.아서의손에는튼튼한줄이잡혀있었고,그줄을끝에는개목걸이가걸려있는오르시니가의영애,리체르카가있었으니까.
그녀는목욕을마치자마자가축과도같이질질끌려가고있었다.옷은속옷과셔츠한장만이입혀져있었는데,몸을제대로닦지못해서흠뻑젖어있어서그위로풍만한가슴의살결이비쳤다.
이런상황속에서도정신을유지할수있다니.역시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는많이 달랐다.
보통지금쯤이면몸을웅크리고때쓰거나울음을터트렸을터인데.그녀는아직마음이꺾이지도않았을뿐더러,작은실눈속에분노와증오가 가득차있었다.
“...”
뭐,조급해할필요는없었다.새벽은생각보다길었으니까.그녀의몸에서나는라벤더향기가지워질때까지, 시간은충분했다.
그때,리체르카가먼저침묵을깨고조용히입을열었다.
“···두렵지않으신가요?”
겁먹지않은태연한목소리.그녀는진심으로그런질문을걸어왔다.
은밀한협박일까.
확실히 그녀의아버지,오르시니후작의이름이면아직도그녀를도와줄수있는교수는많을터였다.내가평범한학생이나조교,교수였으면무사히이곳을나갈수도없겠지.
아서는걸음을멈추었다.
그리고뒤로돌아서우스꽝스러운표정을지어보이며대답했다.
“드릅쥐읂으쉰그유.”
“...”
한순간에리체르카의눈썹이일그러졌다.장난치지말라는듯이눈을번쩍뜨고아서에게차가운시선과함께위압감을보냈다.
아서는그반응에피식웃었다.방금까지엉덩이로혼나며오줌이나질질싸던영애님이주제파악을하지못하신것같았으니까.
“제선생님께서말씀하셨죠.미인과관계를맺을때에는앞뒤상황을가리지말라고.”
아서의천박한발언.리체르카는같잖게느껴져코웃음을쳤다.저딴말을가르침이라고하는선생이나,그것을자랑이라는듯이말하는제자나수준이낮아보였다.
아서는말을계속이었다.
“당신은그저,오늘밤저에게마구박히면서앙앙거리시기만하면됩니다.헛소리하지마시고.”
그말과함께목줄을확잡아당기는아서.리체르카의몸이휘청거리며순식간에아서쪽으로기울어졌다.
“크윽!”
그녀는몇번을캑캑거리며숨을고른다음눈을치켜떠아서를째려보았다.
하지만목줄을잡고있는손아귀를쳐내지는않았다.자신의힘으로쳐낼수없을거라는생각이들었을뿐더러,쳐내는순간그가더악랄한짓거리를할수도있었으니까.
아서는그것에만족했다는듯이지긋이리체르카를쳐다본다음,다시앞으로몸을돌려걸어나갔다.
몇분을걸었을때,그들이도착한곳은리체르카의방이었다.리체르카는어떻게자신의방을알고있는지에대해질문하고싶었으나,입을꾹다물어그것을참아냈다.
아서는그녀의방에들어오자마자파이프를입에물었다.리체르카는아직도아서가연기를사용해마법을일으킨다는사실을몰랐으니,그저성교를하기전여유를가지는한량처럼보였다.
그러나방심할수는없는노릇.
이곳은숨겨온비밀의방과연결되어있었으니,조금씩쿵쾅거리는심장을애써참아내며태연하게입을열었다.
“소녀의방에서교접을행하시겠다니,정말악취미를가지셨군요.”
리체르카는조롱하듯이입을놀렸다.하지만아서는그녀의말에반응하지않고계속연청초를태워갔다.
그리고.
“···역시있었네요.”
짧게말을내뱉은다음망설임없이걸어갔다.리체르카는침을꿀꺽삼켰다.그가정확하게비밀장치가있는곳까지거침없이나아갔으니까.
분명착각이겠지.무려5서클마법사가직접와서만든비밀장치였다.사용된자재와마법도구들또한굉장히값어치가나가는것뿐이었는데,저런남자가파악할수있을리가.
덜컥.
끼이익
의미를알수없는아서의중얼거림에의해열리는문.
“아···.”
리체르카가탄식을내뱉었다.상념이완전히깨진것은문이열렸을때였다.
순간그녀의머릿속에서는 '어떻게'라는질문이계속반복되었다.하지만아서는그녀의머릿속에있는질문에대답해주지않았다.그저파이프의불길을꺼트린다음재를바닥에툭툭떨어트릴뿐.
“아아···.”
리체르카는바닥에털썩주저앉았다.살면서가장숨겨왔던비밀이오늘밤제일들키고싶지않은상대에게들켜버릴터였으니.아직보여지지않은지금도마음이부서지는것만같았다.
“뭘멋대로쉬시려는겁니까.일어서세요.”
아서는쉴틈따위주지않고목줄을확잡아당겼다.
“크,흐윽!”
“대체이앞에무엇이있기에이렇게과민반응을하시는겁니까?”
능글맞은표정을짓는아서.양아치같은얼굴과합쳐져완전히악당의모습을만들어냈다.
리체르카는간신히숨통이트였을때,눈물을찔끔흘리며입을열었다.
“···아서씨.여기까지하시면오늘있었던일들은그냥넘어가드리겠습니다.저밑으로내려가는순간당신은크흣!”
아서는목줄을갑자기잡아당기며리체르카의말을끊었다.그리고캑캑거리는그녀에게말한다.
“얌전히같이내려가시죠.저,여성에게폭력을휘두르는걸별로좋아하지않으니까요.”
남녀평등하게전력으로얼굴을가격할수있는아서였지만,좋아하지않는것은진심이었다.
리체르카는그의말을듣고,상식이나협박은통하지않는남자라는것을다시한번깨우쳤다.부들거리는다리를애써일으켜세우며,둘은같이계단으로걸어갔다.
*
···어떻게해야하지?
여기서기습하면성공할수있을까?
리체르카는다급하게생각했다.이대로가다가는그가자신의컬렉션들을보게되는것은피할수가없었다.
분명가만히있지않을터.단죄자의친구라고스스로밝힌만큼그그림들을한눈에알아볼것이었다.
하지만그는갑작스럽게날린총알도피할수있었고,격투술또한능숙했으니기습이성공할가능성은현저히 낮았다.
그래도···어쩔수없었다.
여기서공격하지않으면.
“혹시.”
그때.
리체르카의마음을꿰뚫어본듯멈춰서는아서.뒤로돌아서말을계속이었다.
“저를공격할마음이있으시다면그만둬주시길바랍니다.”
아서는미소지으며리체르카에게말했다.그에방금까지주먹을꽉쥐고있던리체르카의가슴이덜컹거리며심장이쿵떨어지는것같았다.
동공또한눈에띄게커져갔으니,마음속에수치심이나배덕감뿐만아니라공포심도점차심어져갔다.
유리한상황에서조차방심하지않다니.추악하게시도하려했던마지막저항또한예상범위내였던것일까.인정하지않으려고했던패배감이점차목을조여왔다.
좌절한리체르카는다시그의발걸음에맞추어서같이내려갔다.아서또한내려갈때까지입을열지않았다.
그렇게,그들이계단에서다내려왔을때.
“와···.”
아서는먼저감탄했다.
자신이경매장에올렸던그림들중절반이상이이곳에모여있었으니까.분명적지않은가격이었을터.무엇보다세계각지의경매장에올려가지고모으는것또한쉬운일이아니었을것이다.
그녀는자신의팬이었던것일까.
“흐···흐읏.”
그렇다고하기에는그녀가자신의그림에가지는마음이너무불건전한것같았다.
리체르카는지하비밀의방에내려오자마자,다리를오므렸다.허벅지사이의은밀한부위에서는끈적하게침이흐르듯액체가뚝뚝떨어지고있었고,인상을찡그린채자신의몸을부여잡고있었다.
입은것은셔츠밖에없었으니,자신의몸을가리려고해봐야가릴수도없었다.
아서는그것을뚫어져라쳐다보며그녀의가슴을후벼파듯이말했다.
“헤에···.제친구의그림을보고흥분하는겁니까?이거정말믿을수없을정도로변태네요.”
“···지마세요.”
“네?”
“매도하지···흐읏···말아주세요.”
리체르카는애절하게부탁했다.눈가에는이미눈물이그렁그렁맺혀져있었으니,굉장히안쓰럽고고혹적으로보였다.
저표정을보고거절할수있는사람이있을까.아니면음심을가지지않을수있는사람이있을까.
“제가왜그래야하죠?”
있었다.
아서는여성의유혹같은거에넘어가지않는남자였다.냉정하게대답하고말을이어간다.
“당신은누군가가그만둬달라고할때그만둔적이있으신가요?”
“...”
“하지말라고했는데도불구하고,계속사람을보내저의기분을망가트리지않았습니까?”
“···그건···당신이.”
“결국에는제주변사람들에게까지손을뻗치고,협박하고,이용하기까지했죠.”
“···그럴생각까지는···흐읏···없었어요.”
“당신이그럴생각이있었든없었든지간에,납치자체가별로깨끗한행위는아니지않습니까?”
아서는자신의그림을쳐다보고있다가등을돌렸다.그리고리체르카에게서서히다가갔다.
“학원도시밖으로그들을나오게하기위해저지른과정을저에게당당히말씀하실수있으십니까?”
“...”
“귀족으로태어나서권력과재물로타인을마음대로조종하고,부족함이없는삶을사는것만으로는만족하지못하시는겁니까?”
“......”
“그렇더라도사람은가려서하셨어야죠.”
“그렇더라도선은지켰어야죠.”
“저는단죄자가아닙니다.”
한걸음.
아서가한걸음리체르카에게다가갔다.
“지금까지당신이어떠한일을저질러왔든지는저와의별개의일.신경쓰지않겠습니다.”
또한걸음.
성욕을참고있는리체르카의바로앞에섰다.
“다만.”
목줄을확잡아당기는아서.
리체르카를확끌고와서자신의얼굴과마주대었다.
“저의친구,선생님,친하게지냈던지인모두에게지었던죄만큼은.”
꿰뚫듯이리체르카의눈을바라보았다.
그리고엄숙한목소리로입을연다.
“단죄하겠습니다.”
몸이어려졌어도.
영혼과기억에자물쇠가걸려졌어도.
과거와삶이사라진것은아니었으니.아서에게서위압감이단번에뿜어져나왔다.
“···크흣.”
리체르카는그대로바닥에주저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