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화 〉63화. 협상. (63/281)



〈 63화 〉63화. 협상.

관객이 있었다면 승부조작이라 외치며 주최자의 멱살을 붙잡고는 사기꾼이라고 외쳤을 이 일방적인 전투는 고르카의 승리로 끝이 났고, 곧이어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온 라비족이 전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대 토캥이 앨리스가 폴짝, 아니 쿵쾅거리며 뛰어와 고르카의 옆에 섰고, 앨리스는 배 주머니에서 운카스와 마란을 꺼내었다.

“우와~ 역시 고르카님 이십니다. 하하.”

“고르카님의 승리를 감축드리옵니다.”


운카스는 역시 이럴  알았다는 듯이 고르카의 승리에 대해 한 점 의심치 않은 목소리였고, 마란 또한 신의 화신인 그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탈라온 백작을 비롯한 이 전투에 참여한 모든 오르크족은 오거 같지 않은 오거에 이어 또 다른 괴수인 거대 토끼 같은 괴물이 나타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마... 맙소사!”

“저게 토끼란 말인가?”

“뭐, 이런...”

“도대체 저런 괴수들을 라비족 난쟁이들이 어떻게 이용하는 거지?”


하룬 영지의 병사들과 도망도  치고 남은 용병들은 오거와 거대 토끼를 라비족이 길들인 것처럼 여겼으나, 수뇌부인 탈라온 백작과 우사 경, 용병대장 알티의 생각이 달랐다.


‘아니야. 난쟁이들이 길들인 게 아니라, 오히려 난쟁이들이  마수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그들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은 얼마 후에 모두 알게 되었다.

전장을 대충 수습한 라비족 전사들이 고르카의 앞에 도열하였고, 원로들이 앞으로 나서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五體投止)에 가까운 절을 하였다.


뒤에 도열해 있던 이천여 명의 전사들도 원로들을 따라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일어서서 라비족 특유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끼요오오~”

함성이 그치고 흥분이 가라앉자 원로들이 나서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승을 감축드리옵니다. 고르카님”

“하하. 고맙다.”

“역시 전쟁의 화신다우신 대단한 전투였습니다.”

“뭐,  정도까지야. 하하.”


“이제 이놈들을 어찌해야 합니까?”

“음,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지.”

고르카의 시선이 탈라온 백작으로 향했고,  눈을 부릅뜬 채 경악하고 있는 하룬 영지의 수뇌부의 모습을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말을 할 줄 아는 오거라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역시 마신의 축복을 받은 괴물이었어.’

 모습을  고르카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런, 내가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신기한가 보군.
이들과 대화를 나눠 봐야 하니 신전으로 정중히 데리고 가라.

나머지 오르크들은 무장을 해제시키고 포박을 해서 한곳에 모아두고, 잘 감시하도록 하고.
굳이 도망친 놈들을 쫓을 필요까지는 없겠지.

사망한 오르크는 한곳에 모아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지 말고 땅에 묻던가, 아니면 이들이 원하는 대로  수 있게 해주고.
다친 오르크는 치료를 해주도록 하게."

이처럼 관대한 처우에 오르크에게 원한이 깊은 원로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고, 한 원로가 불만이 섞인 투로 말했다.

“오르크 놈들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해줘야 할까요?”

고르카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원로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네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하지만 앞을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니 따르도록 하게.”

고르카의 냉정한 시선과 답변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든 원로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예, 그저 늙은이들이 그동안 오르크족에 대한 원한이 깊어, 차마 고르카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고르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라비족 말을 모르는 하룬 영지의 수뇌부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이었는데, 라비족과 접촉을 해본 적이 있는 경험 많은 용병대장 알티는 라비족 말을 대부분 알아듣고 있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카의 시선이 알티에게 머무르자 그는 들킨 것을 깨닫고는 식은땀을 흘렸고, 고르카는 관심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을 라비족 전사들이 데려갔고, 전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머지 라비족 전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르카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 전투를 복기(復碁)해 보았다.

‘역시, 단시간에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친 것이 주효(奏效)했어.

더구나 기마병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젊은 녀석을 인질로 포획한 것이 신의  수였군.
손안에서 지렸을 때는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기를 잘했어.


여기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과 닮은 것을 보았을 때, 부자지간이나 가까운 친인척이라 생각해 혹시나 싶어 인질극 흉내를 내었더니 진짜로 항복할 줄이야.


약간 피해를 보더라도 가장 빠르게 수뇌부를 처리한다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군.
하긴 이들도 나 같은 규격 외의 존재를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기껏해야 검치호 같은 짐승들을 상대할 것으로 생각한 게 다였겠어.

나였으면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하고 먼저 퇴각한 후, 다시 진용을 정비하면서 상대할 방법을 모색(摸索)했을 거야.
기마병의 기동력을 살려 나를 최대한 묶어두고,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차륜전(車輪戰)을 펼쳤겠지.

음... 그래도 당연히 내가 이겼겠지만, 지금처럼 깨끗하게 끝나지는 않았을걸.
다음에 또 이런 싸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오늘처럼 쉽게 일이 풀리지는 않을 거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


탈라온 백작을 비롯한 수뇌부는  건물로 이송되었는데 건물의 크기를 보아, 자신들을 패배시킨 오거의 거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실내의 벽 쪽에 박제된 맹수들을 보고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나같이 맹수가 아닌 녀석이 없었고, 마수 레벨의 짐승들도 많았다. 그중에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크기의 검치호를 본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 저건?”


“맙소사. 다른 검치호의  배 정도의 크기군요.”


“이마에 뿔이 달려 있습니다. 마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대.. 단하군.”

그들은 실내에 길게 놓인 탁자로 안내되어 라비족 체형에 맞춰져 있는 작은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야만 했다.
그들 앞에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라르떼 한 잔씩이 놓였고, 안내한 전사들이 나가자 큰 실내에 그들만이 남게 되었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탈라온 백작이 아들인 빌로바에게 묻는 말이었고, 빌로바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테른 경이 저를 보호하다가 크게 다쳤으니 걱정입니다.
포스로 몸을 보호했다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내부 장기가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빨리 영지의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님.
제가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기마병을 물렸어야 했는데...”

아들이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자, 탈라온 백작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네 탓이 아니다. 오거가 나타날지 누가 알았겠느냐?
오거도 보통의 오거가 아닌 마신의 축복을 받은 게 분명한 오거였으니, 이렇게 된 것도 당연하다고 해야겠지.
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것인지...“


탈라온 백작은 시선을 돌려 오거가 사용하는 것이 뻔한 거대한 의자를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오거가 말을 하다니... 분명 지능도 높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전투 방식도 아주 효율적이었고. 이대로는 우리 영지뿐만이 아니라 왕국이 위태로워진다.
가뜩이나 왕권을 둘러싼 내분 조짐이 보이는 시점이야.
만약 이 괴물이 왕국으로 눈을 돌린다면...”


탈라온 백작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조용히 침묵하던 우사 경이 백작의 말을 이었다.


“왕국도 왕국이지만 당장 우리 영지가 걱정입니다. 오거와 라비족의 원로들로 보이는 이들과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던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을 보아 무엇을 요구하려는 걸까요?”


이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용병대장 알티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제가 이들 라비족의 언어를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백작과 소영주 빌로바, 우사 경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고, 어서 말해보라는 눈빛이었다.


전투 말미에 비록 자신이 직접 데리고 다니는 용병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옆 영지에서 추가로 모집한 도망친 용병들 때문에 점수를 따야 하는 알티는 고르카와 원로들 간에 오고 간 말을 이야기했다.

“오거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추론하자면 오거는 우리에게 협상 같은 것을  모양이었습니다.
다친 우리 병사들을 치료해 주라고 명령하고는 우리들을 따로 이곳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라비족의 원로라는 늙은이들이 오거의 명령에 꼼짝도 못 하고 따르더군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오거가 라비족을 단단히 휘어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사 경은 알티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용병대장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가축의 울음소리가 무척 많이 들리더군요.
지금도 밖에서 들리지 않습니까?”


우사 경의 말대로 멀리서 어떤 가축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두 마리가 아닌 많은 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모두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걸 알고는 탄식했다.


“음?”
“아...”
“역시, 우사 경이오. 영지의 내정을 돌보는 직책답게 우리가 간과한 것을 잘 짚어주었소.”

마지막 영주의 칭찬에 우사 경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제 직분에 따라 신경을 쓴 결과일 뿐입니다.
하여간에 라비족이 목축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쫓겨날 때만 해도 수렵과 채집이 다인 부족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어떤 계기로 목축을 하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목축업이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우사 경의 말이 맞습니다.
용병 일을 그만두고 모아 둔 돈으로 목장을 하겠다고 나선 은퇴 용병들이 몇 있었습니다만, 성공했다는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건대, 아누크와 산양의 울음소리로 예상이 됩니다.


산양은 어찌어찌해서 길들인다고 해도 아누크는 결코 라비족 같은 난쟁이들이 길들일 수 없는 짐승입니다.
비록 초식동물이지만 크고, 사나운데다가 작게는 수십 마리. 많게는 백여 마리까지 무리 지어 다니며 위협적인 맹수가 나타나면 떼를 지어 대항하기에 마수 레벨인 검치호마저도 잘 사냥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용병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마수 퇴치에도 일가견이 있는 용병단의 우두머리답게 짐승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알티의 말은 신용이 있었기에 모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얼마 가지 못하였는데, 밖에서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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