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78화. 포엘 공주. (78/281)



〈 78화 〉78화. 포엘 공주.

고르카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있었다.
그런 그를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시선으로 힐끔거리는 포엘 공주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아주 잘게 부들거리는 바우 경이 있었다.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며 어느새 다시 과자 바구니를 들고는 먹고 있는 운카스와 그런 그의 옆에서 포엘 공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란이었다.


빌로바와 테른 경은 포엘 공주가 이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기까지 일련의 연관된 일을 서로 유추하며 심각한 눈빛으로 생각에 빠져들었고, 알티와 그의 수하들은 포로가 된 용병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리하여 관리하기 바빴다.

고르카는 포엘 공주의 따가운 시선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후 입을 열었다.


“잘생긴 오거 처음 보나?”

“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이상형이시네요. 좀 많이 크다는 것만 제외하고는요.”


“고, 고맙군.”

분위기를 풀고자 가볍게 던진 고르카의 농담에 포엘 공주가 또박또박한 어조로 대꾸하자, 그는 무척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심정이 되어 버벅대며 답했다.


포엘 공주의 말은 주위에 있던 이들의 귀에도 들렸는데, 운카스는 먹던 과자를 땅에 떨어트리고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입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시켜주었고, 마란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도 불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볼 것을 본 것처럼 포엘 공주를 바라보았고, 바우 경은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며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적 감각이 남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  줄이야.
잘생긴 왕궁 귀족 자제들에게 관심을 전혀 주지 않더니.
도대체 어떻게 저 흉악한 오거가 이상형이란 말인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고르카는 오랜만에 맛본 당혹감을 다스리고는 운카스와 빌로바를 불러 수화를 동반한 말을 통역하게 하였다.


“나는 고르카라고 한다. 자네들이 흔히 오거라고 부르는 숲 거인 종족이지. 앞으로 이름을 불러줬으면 고맙겠군.
자네가 일국의 공주이나 종이 다른 나에게 존대를 바라지는 말게.
이렇게 종이 달라, 신체 구조상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수화를 통해서 하니 이해하길 바라고.
자네들의 말은 다 듣고 이해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말하게.
나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여기 라비족의 운카스에게 묻도록 하고.”


그 말에 운카스가 대략적으로 고르카에 대해 설명하였고, 특히 나이가 이제 160세가 넘는다고 하자, 포엘 공주와 바우 경, 사로잡힌 용병 중 귀 밝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이렇게 수화를 동반한 말이 서로 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요. 저는 여기 에이론 왕국의 국왕이신 ‘에이론 엘드 라시달 탈라인 7세’의 넷째  ‘에이론 엘르 포엘 탈라인’이라 합니다.”

“이름에 엘드와 엘르가 들어가는군. 남자라면 엘드, 여자라면 엘르인 건가?”

“역시 잘생긴 외모만큼 명석하시군요. 그렇습니다.”

“...음, 그래. 고맙네. 자네들이 저들에게 쫓겨 여기까지 온 이유를 설명해주겠나?”

포엘 공주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특히 빌로바와 테른 경의 얼굴을 유심히 훑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빌로바 경의 얼굴을 보니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빌로바 경의 예상대로 얼마 전,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공주의 말에 빌로바는 예상대로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테른 경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고 난 후, 바로 왕궁의 문이 모두 폐쇄되었고, 그동안 암암리에 형성되었던 서로의 세력들이 충돌을 일으키며 피를 부르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충돌을 일으킨 세력을 설명하자면, 당시 아바마마께서는 1년 전에 돌아가신 세자 저하 외에 다른 아들을 두지 않으셨고, 딸만 저까지 해서 넷을 두셨지요.


결국 왕위는 큰 언니에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원체 사치가 심하고 허영심이 많았으며, 남편인 중앙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의 형부 또한 욕심이 많지만 무능해 출신 가문 말고는 중앙 귀족들의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었지요.

반면, 둘째 언니도 딱히 나은 점이라고는 없으나, 작은 형부는 제국 출신의 귀족으로 유능했고, 그만큼 야심이 만만치 않아 언제든 제국의 힘을 끌어 올  있다는 점에서 중앙 귀족들의 반대가 가장 많았습니다.

셋째 언니는 그저 평범한 여자로 형부 또한 중앙 귀족 출신이라지만 세력이 미미하여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둘째 언니 세력의 힘이 가장 세고 막강하였기에 큰 언니와 셋째 언니가 힘을 합하여 둘째 언니의 세력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결국 큰 언니와 셋째 언니는 사로잡혔고, 형부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눈치만 보던 귀족 세력들도 둘째 언니와 제국을 앞세운 둘째 형부에게 굴복하였고, 저도 바우 경과 워우 경을 비롯한 소수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겨우 왕궁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를 노리는 용병들이 뒤를 쫓더군요.”

포엘 공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고르카는 생각에 잠기었다.

‘이야기가 너무 두루뭉술하군. 숨기고 있는  너무 많아.
하긴, 국왕이 노쇠하여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물밑에서 공주들 사이에 많은 세력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이 오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겠지.
나도 전생에 왕국의 권력 싸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전생을 생각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의 말에서 거짓은 없으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구나.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생략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같군.
이제 너를 해(害)할 자는 더는 여기에 없단다. 안심하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겠니?
그동안 왕궁의 살얼음판 같은 날을 보내며 말 한마디에도 조심스러워해야 했다는 것을 이해한단다.”


마치, 아끼는 손녀를 대하듯 보기 드문 고르카의 자상한 말에 포엘 공주는 그를 보며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결국, 아름다운 눈에서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운카스는 그동안 익히 봐왔던 무표정, 무감정의 대명사 고르카가 저렇게 자상하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다른 라비족은 모르고 있지만, 고르카가 주술사 계승식 때 신물을 붙잡고는 사냥의 신에게 협박하는 말을 유일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신에게도 서슴없이 협박하는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자, 경악에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이럴 수가. 이보시게 사제들, 우리 스승님이 저렇게 다정한 분이셨나?”

하지만 운카스의 사제들은 다른 생각으로 바빴다.
특히 테른 경은 오거 주제에 마치 왕궁에서 생활 해 본 것처럼 이야기하자, 그의 정체에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오직 빌로바만이 공주의 눈물을 흘리는 자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홀린 듯 포엘 공주에게 다가가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어 정중하게 건네주었다.

“공주님, 여기 손수건을 받으십시오.”

포엘 공주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말했다.

“고맙군요. 빌로바 경.”


공주는 눈물을 닦고는 다시 빌로바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고, 그는 그것을 소중하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본 운카스는 재밌는 일이 생겼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오호~ 이거 사제에게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테른 경도 빌로바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조카이자 장차 모셔야 할 소영주가 차기 왕국의 주인이 될 유력한 자에게 쫓기는 포엘 공주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은 소영주의 앞날에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알티만이 운카스의 말에 동의하듯 ‘오~’하고 감탄했을 뿐이었다.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른 포엘 공주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네, 고르카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거짓은 없었으나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지요.
고르카님, 제가 솔직히 이야기 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제안에 그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이지.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있느냐?”

포엘 공주는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드리겠습니다.”

“.....”


포엘 공주의 발언에 모두 동작을 멈추고 떡하니 입을 벌리고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옆의 바우 경에게 공주가 살짝 어떻게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 눈빛이 되었고, 바우 경은  쏟아지는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해야 했다.


고르카는 다시 황망한 심정이 되어 빠르게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고는 말했다.

“아, 아니 그것은 되었고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네. 큼, 지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여기 영주인 탈라온 백작도 있어야겠군.
이대로 라오 시장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 가도록 하지. 공주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군.
저 용병들도 처리해야 하고 말이야. 저들은 어찌했으면 좋겠나?”

그들은 이제 푸른 바람 용병단의 처우(處遇)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빌로바가 일행들 앞에 나서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원칙대로라면 이놈들을 모두 성으로 끌고 가서 이들을 사주한 배후를 밝히고, 왕족 및 귀족 시해 미수 혐의를 적용해 3족을 멸하는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렵겠군요. 이들을 데리고 간다면 영지에 있는 많은 눈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중앙 귀족의 끈이 닿은 자들에 의해 금방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모두...”

빌로바가 말끝을 흐렸으나 모두 어떤 뜻인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이 깔끔하겠습니다.”

“시간을 벌 목적이면 그게 괜찮겠군요.”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고르카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숫자가 만만찮게 많으니 살려두면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용병 노릇을 하려면 몸이 튼튼해야겠지. 이렇게 좋은 노동력을 그냥 없애기에는 아까워.
지금 거의 놀려두다시피하고 있는 내 소유의 광산에 투입하도록 하지.
거기서 도망치려고 해도 갈 곳이 없는 곳이야. 아마 죽을 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걸세.”

태연하게 종신 노동형을 선고하자, 고르카 소유의 광산이 북쪽 끝에 있는 수정 광산이라는 것과 그곳의 환경을  아는 운카스와 빌로바는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좋군요. 그곳에서 도망쳐 봤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어 죽거나, 야생 맹수들의 밥이 되겠죠.”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고, 빨리 자네 부친에게 연락하게. 공주의 자세한 사정은 모두 모여서 듣자고.”


“예. 스승님.”


곧 알티의 수하 중 둘이 빌로바의 전언이 담긴 편지를 들고, 탈라온 백작을 향해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푸른 바람 용병단과의 일방적인 전투 이후, 고르카 일행은 의논 끝에 새로 형성된 라오 시장으로 향하지 않고, 다시 라비족 영역으로 향했다.
물론 포엘 공주를 포함하여 푸른 바람 용병단의 생존자들도 함께였다.


생존자라고 했지만 실제로 죽은 이들은 5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고르카가 처음 던진 산탄용 돌멩이에 죽은 이들은 스물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놀란 말들에 의해 낙마하여 재수 없게 목뼈가 부러져 즉사하거나, 날뛰는 말의 발굽에 차이여 죽은 이들이었다.


용병단 대부분은 경상(輕傷)을 입은 것이 다였으나, 용병단장 이누클의 자살과 가만히 있어도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는 고르카의 모습에 고양이 앞의  마냥 아무 소리도  하고 순순히 포로가 되었다.


한 백인대(百人隊)를 이끄는 1단계 포스 각성자가 야밤에 몰래 도망치던 중, 고르카의 비웃음과 함께 던진 돌에 머리를 맞고 절명하자,  뒤로 도망치려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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