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80화. 왕실 비사(祕事). (80/281)



〈 80화 〉80화. 왕실 비사(祕事).

널따란 거실에 모여든 이들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자신의 체구에 맞는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거기에 앉았고, 고르카의 자리는 다리가 없는 좌식 의자가 준비되어 있어 얼추 눈높이를 맞출  있었다.


후일, 호사가들은 이 자리를 ‘제1차 원탁의 회의’라고 이름 붙였는데, 참여 인원은 이러했다.
라비족의 대표로는 고르카, 운카스, 마란, 원로  명이었고, 하룬 영지의 대표로는 영주 탈라온 백작, 소영주 빌로바, 테른 경, 알티 경이었다.

왕궁의 대표로 포엘 공주와 그녀의 수호기사 바우 경과 워우 경이었다.


참고로 워우 경은 죽은 줄 알았으나, 고르카와 푸른 바람 용병단의 충돌 이후, 중상을 입고는 혼절한 상태로 용병단의 짐말에 꽁꽁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혹시, 인질로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포로로 잡아들였다고  용병 단원이 털어 놓았다.

마란이 품속에 소중히 들고 다니는 앨리스의 신비한 똥으로 만든 일명 ‘만병통치약’을 먹고는 상처가 빠르게 호전(好轉)되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워우 경이 살아 돌아오자, 포엘 공주는 그를 붙잡고 한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워우 경은 그녀를 달래며 푸른 바람 용병단이 빠르게 자신들의 뒤를 쫓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를 갈며 설명하였다.


“호위병 중에 첩자가 있었습니다. 혼자 남아 놈들과 상대하던 중 눈에 익은 놈이 있더군요. 바로 호위병 중 하나였습니다.
그놈이 여태 우리의 행적을 놈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와 떨어지자, 바로 놈들에게 합류하였던 것이지요.”


용병단을 문초한 결과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용병단이 매수한 것이 아니라 의뢰주가 이미 호위병  하나를 매수하여 용병단과 연결해 준 것이었다.


“그놈만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요하게 그놈만을 노렸고, 다른 놈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으나, 결국 그놈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끄럽게도 이렇게 도그칸 전사의 드높은 명예를 떨어트리는 포로 신세가 되었지만요.”

이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워우 경이었다.
하지만 고르카를 본 후, 도그칸 전사의 드높은 명예고 뭐고 다 팽개치고는 한동안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바우 경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워우 경의 등을 토닥이면서 자신도 한동안 그랬다며 달래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르카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자네들은 나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이 느껴지는 건가? 자네들도 그렇고 저기 렙티언 종족이라는 용병도 유독 과한 반응을 보이는군.
혹시 수인종족은 감각이 남달라서 그런 건가?”

바우 경은 고르카의 질문에 공손하게 답했다.

“예. 저희 수인 종족은 라비족이나 오르크족 보다는 훨씬 감각이 뛰어납니다.
아마 정령 신의 자식이기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도 고르카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약하게나마 온몸이 저릿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음, 과연 그랬군. 이거 미안하네. 아직 내 수양이 부족한 모양이야. 좀 더 노력해야겠군그래.
운카스, 돌아가면 나와 함께 훈련하도록 하자. 좋은 훈련법이 생각이 났다."


그 말에 운카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신이시여! 정녕, 저를 버리시나이까?’

++


고르카는 자상한 어조로 포엘 공주를 향해 말했다.

“이제 사실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속이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말해 주겠느냐?”


포엘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어조로 고르카를 향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자 오라버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난 후, 아바마마께서는 상심(傷心)하시어 국정을 손에서 놓으시고, 세자 오라버니께서 사시던 왕세자궁에 들어가셔서 한동안 나오시지 않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아바마마께서 저와 두 분의 경을 왕세자 궁에 아무도 모르게 부르신 일이 있었지요.”


++


포엘 공주와 바우, 워우 경은 국왕의 부름을 받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왕세자 궁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왕세자가 머무르던 거처에 들어서자, 왕세자가 평소 집무를 보던 책상에 국왕 에이론 엘드 라시달 탈라인 7세가 일렁이는 등잔불을 앞에 두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앉아있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조용히 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바마마의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국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입을 열고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엘.”

“예. 아바마마.”

“무뚝뚝한 성격의 세자가 유달리 너만은 귀여워하고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안다.”

“그렇사옵니다. 아바마마.”

“너는 세자가 평소 몸이 약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포엘 공주는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그래. 아무도 모르게 세자의 시신을 내가 직접 해부(解剖)해 보았다.”


순간 창밖으로 번개가 치며 어두운 실내를 밝게 비췄고, 포엘 공주는 국왕의 얼굴을 똑똑히 볼  있었다.
아비가 아들의 시신을 해부했을 때의 비참함과 참담함이 얼굴에 묻어 나오고 있었고, 두 눈은 분노와 슬픔, 절망이 어우러져 있었다.
왕세자 궁에 머문 며칠 사이에 국왕은  년은 더 늙어 보일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포엘 공주는 국왕이 세자의 시신을 해부하는 모습과 아들의 시신을 해부해야 하는 아비의 심정을 상상하고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아, 아바마마...”

국왕은 마음을 다스리려는지 눈을 감고는 아무 말이 없었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는 계속해서 몰아치는 소리만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국왕의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독살이다.”


“헉!”


포엘 공주와 바우, 워우 경은 놀라  눈을 부릅뜨고는 국왕을 쳐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적어도 5년 이상 소량의 독으로 조금씩 중독시킨 방법이었다.
어떠한 독이 쓰였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독에 나도 중독이 된 것 같구나.”


국왕의 연이은 충격적인 발언에 포엘 공주는 몸을 비틀거렸고, 바우 경과 워우 경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최하 단계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포스 각성자인 나를 중독 시킬 정도라면 보통 독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관계이겠지.
그래서 그동안 누가 믿을 수 있고, 없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믿을 수 있는 자가 우습게도 너만이 남았더구나. 왜인지는 너도 알겠지?”

포엘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엘 공주의 어미는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지방 자작 가문의 영애(令愛)였다.
지방의 자작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전대(前代)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의 방계로 나름 중앙 정계에서도 알아주는 가문이었으나, 중앙 정계의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낙향(落鄕)한 후, 다시는 중앙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왕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의 세자 시절, 이제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 좋아하던 사냥을 마음껏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사냥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수도에서 떨어진 지방에까지 내려가 사냥하던 그는 작은 야산에서 늑대와 개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였다.
늑대와 개들은 모두 야생에서 살아가는 놈들임이 분명했으나, 마치 소녀가 자신의 가족이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어울렸고, 그 모습이 신기해 그가 다가가자 짐승들은 그녀를 보호하며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모습에 그가 멈칫하자, 소녀가 짐승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안 돼! 그만!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짐승들은 으르렁거림을 멈추고는 꼬리를 흔들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근방에서는 보지 못한 분이시군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하다가 그의 등에 매인  통을 보고는 인상을 차갑게 굳혔다.


“복장과 사냥하러 다니시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느 귀족 집안의 자제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엄연히 저의 가문 소유의 땅입니다.
사냥이 금지되어 있으니 그만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와 함께 다니던 호위 겸 수행원이 발끈하여 나서려고 했으나, 그가 손짓으로 말리며 말했다.

“미안하오. 산속으로 다니다 보니 그만 실례를 범하게 되었구려.
이 곳의 주인께 사죄를 드려야 마땅하니, 어느 가문의 영애이신지 밝혀 주실  있겠소?”

“저는...”

그는 소녀의 부친인 자작을 만나서야 자신이 왕세자임을 밝혔고, 자작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소녀의 신비로운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이미 세자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에게 청혼했다.

“내 비록 일찍이 결혼하여 세자빈과 왕세손(王世孫)을 두었으나, 얼마 후 연로하신 아바마마께서 선양(禪讓)을 선포하실 것이니, 그때 꼭 후궁(後宮)으로 맞이하겠소.”

자작은 고심 끝에 그에게 자신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세자 저하께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입니다.

에이론 왕국을 건립하신 건국왕께서 왕국을 세우실 때, 왕국은 척박하고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각종 맹수와 마수, 여러 수인 종족들이 난립하여 있었지요.

건국왕께서는 고심 끝에 수인 종족 중 제일 우호적인 도그칸드로프 종족과 동맹을 맺으셨고, 그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쉽게 에이론 왕국을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맹의 증표로 도그칸드로프 종족과 우리 오르크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여아를 건국왕의 아들 중 후궁의 피를 이은 왕자와 혼인하였습니다.

이게 가문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남아가 태어나면 도그칸족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아와 결혼을 시키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 되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이자, 저 아이의 어미도 도그칸족과의 혼혈이지요.


그런데 왕국이 세워지고 시간이 흐르자, 도그칸족의 도움을 얻은 일은 잊어버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저희 가문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는 뭐라고 못하였지만, 뒤에서는 검은 피의 자긍심을 저버린 가문이라고 손가락질하였지요.
 모욕과 수모를 이기지 못하고 선친께서 낙향을 결심하고는 이곳으로 오게  것입니다.


만일 세자저하께서 저 아이를 받아들이신다면, 후일 왕실 내명부에서 저 아이가 무시와 멸시를 받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세자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는 굳건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절대 그녀를 무시하는 이를 좌시(坐視)하지 않겠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엄벌에 처할 것을 약속드리오.
그리고 도그칸족과의 동맹이 여전히 유효하며  굳건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오.”


소녀와 그의 부친인 자작은 한참을 고민 끝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약속대로 그가 왕이 되자 소녀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한동안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하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가 바로 포엘 공주였다.


하지만 난산(難産)으로 인해 포엘 공주의 어미는 몇 해를 앓더니 결국 사망하였고, 그녀가 죽기 전, 딸의 안위를 걱정해 외가인 도그칸족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바우 경과 워우 경이 포엘 공주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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