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161화. 보물섬.
”일단 이 사이좋은 한 쌍을 살리고 봐야겠군. 먼저 바위에 박힌 검부터 뽑아야겠어.“
고르카의 손은 거인답게 건장한 성인 오르크의 몸통을 감싸 쥐고도 남을 만큼 컸고, 그에 반해 섬세함은 부족했기에 가온 불패의 검을 쥔 손에서 검을 떼어내기에는 불편했다.
그리하여 검을 쥔 팔 전체를 굵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는 힘을 주어 당겼다.
뚜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바위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어이쿠, 이런. 보기보다 연약한 친구였군. 평소 팔 근육을 좀 단련할 것이지. 운동 부족이야.“
명실공히 대륙 최강자인 가온 불패에게 태연하게 운동 부족이라며 책임을 떠넘긴 고르카는 팔이 부러졌으나 손에서 검을 놓치지 않는 그에게 작게 감탄했다.
”그래도 의식이 없는 와중에서도 무기를 자기 손에서 떼지 않은 것을 보니 기본은 되어 있는 친구로군.
어디 보자, 아무리 기운을 담았다 해도 바위를 파고들 정도면 보통 검은 아니겠어.“
가온 불패의 검은 기본적으로 장검에 속하는 길이였으나, 고르카의 손에서는 앙증맞은 주머니칼처럼 보였다.
검날을 살펴본 고르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으로 강하게 한번 튕겨 보았고, 맑은 쇳소리와 함께 검신(劍身)이 부르르 떨었다.
”음... 강철이 맞기는 하지만, 지금껏 이곳에서 봐왔던 일반적인 강철이 아니야.
내 손가락의 힘을 이길 정도라니. 티타늄 같은 특수 합금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이상 이럴 수가 없는데.
그동안 왕국의 수도에서 봐왔던 강철을 제련하던 기술력으로는 이런 검을 만들 수 없다.
전생의 특수 합금 기술이 발달 된 현대 지구에서나 볼법한 검이로군. 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고르카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기절해 있는 검의 주인인 가온 불패를 쳐다보았다.
”뭔가 비밀이 많은 친구 같군. 뭐, 깨어나 물어보면 알겠지.“
고르카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쌍을 들고는 뿌옥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
”흙탕물을 마시고 탈이 난 대원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사제님이 돌보아 주시니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탈라께서 돌보신 덕분인지 실종된 대원도 없고,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래터의 부상만 빼면은 말이지요.“
무가의 등위에 오른 고르카에게 알티가 용병대원들의 상태에 대해 짤막하게 보고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강의 상류에서 생긴 환각 소동과 계곡에서 벌어진 싸움, 그리고 래터에 얽힌 일들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래터는 알티의 옆에 묵묵히 서 있었는데, 고르카가 자신의 사라진 팔뚝 부위를 보자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쉬익~ 스승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야. 자기보다 강한 상대, 그것도 원수를 갚는데 팔목 하나쯤이야.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지.
그동안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짐이 한결 가벼워졌겠군.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가족만 찾으면 되겠군그래.“
”쉬익~ 감사합니다. 스승님.“
비록 한쪽 손목이 사라졌으나, 평소와는 달리 한결 홀가분한 표정의 래터였지만, 주위의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쿠하칼 왕자와 사카트 후작은 함께 했던 왕국의 정예 병사 중 2/3가 죽거나 실종되었기에 침울한 표정으로 살아남은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격려를 하고 있었다.
이단 심판기사단원들도 절반만이 살아남아 묵묵히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라놀카 사제의 신성력이 담긴 치유를 받는 가온 불패를 지키고 있었다.
붉은 기사단은 더 처참했다.
일반 단원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고, 붉은 늑대라 불리는 열 명의 형제 중 겨우 다섯만이 살아남은 게 다였다.
살아남은 그들 역시 투구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라놀카 사제의 치료를 받는 붉은 기사단장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르탄 용병대는 그들의 대장 하르탄을 포함해 구조된 생존자는 일절 없었고, 이렇게 그들은 용병대 명부에서 하얀 줄이 그어지며 삭제되었다.
참고로 한 몸처럼 철석 달라붙어 있던 가온 불패와 붉은 기사단장은 라놀카 사제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치유를 받자,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부처럼 바로 떨어졌다.
이단 심판기사단과 붉은 기사단은 무가의 등위에 올라 더는 싸우지 않았다.
대장들이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되겠으나, 일반적인 오거를 넘어선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고르카.
토끼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그렇다고 토끼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럴 수 없는 앨리스.
마수 대전 속의 전설적인 마수인 쿤차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뿌옥.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 그 이상의 위엄을 자랑하는 무가를 보고 나니, 싸울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고르카를 제외한 무가의 등위에 오른 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새끼라기에는 너무 큰 새끼거북들을 조끼 주머니에 넣은 채, 답답했는지 꼬물거리며 벗어나려는 녀석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는 앨리스와 그간 힘을 쓰느라 피곤했는지, 그나마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늘어져 귀찮은 날벌레를 쫓기 위해 긴 코를 한 번씩 휘두르며 연신 하품을 하는 뿌옥을 보았다.
범람하던 홍수를 막고 있던 무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계곡은 다시 구조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대한 배에서 유람이라도 하듯 별 흔들림 없이 천천히 물살을 따라 내려오자, 생존자들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고, 그동안 고르카를 비롯한 마수에 단련된 용병대원들이 그나마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하, 저 친구들, 완전히 넋 나간 표정인데.“
”쳇, 조금 전만 해도 너도 똑같았다고.“
”어험~ 뭐, 그렇단 이야기지. 거참, 빡빡하기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계곡을 벗어나는군. 봐봐, 벌써 강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게. 뱃놀이하는 기분이야.“
대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고, 아쉽게도 이들의 뱃놀이는 고르카에 의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끝나버렸다.
”잡담을 하는 것을 보니 다들 이제 움직일만한가 보군. 그럼 뱃삯은 내야겠지?“
무가의 등껍질에는 고르카가 제거한 커다란 산호 기둥들 외에도 무수히 많은 따개비나 해초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그 이물질들을 제거하는 엄청난 막노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고르카 용병대는 고객 만족을 위해 사후 관리에도 철저히 신경을 쓰는 용병대지.“
대원들은 고르카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동안 들어본 적도 없는 희한한 말을 하자, 산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란 등껍질에 나 있는 무수한 일거리와 뻔뻔한 표정의 고르카를 번갈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언제 이걸 다 제거한단 말이야.“
운카스는 고르카가 듣지 못하게 작게 투덜거렸고, 대원들도 울상을 지은 채 동감했다.
그리고 그 강제노동(?)에는 환자와 환자를 치료하는 라놀카 사제 외에는 예외란 없었는데, 붉은 기사단과 이단 심판기사단, 심지어 쿠하칼 왕자마저도 군소리도 못 내고 참여해야 했다.
물론 쿠하칼 왕자만은 왕족 예우를 인정해 노동의 강도가 다른 관리자 역할이기는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엄청난 막노동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이었을뿐더러, 재물신의 축복이 가득 담겨 있는 보물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 봐, 조개 안에 까만 구슬이 있어.“
”어디? 어라~ 진짜네. 뭐지?“
대원들이 파낸 커다란 크기의 조개의 벌어진 껍질 속에서 살점과 함께 붙어 있는 구슬을 발견하고는 소란을 떨자, 감독관의 감투를 차지한 쿠하칼 왕자가 다가와 감정을 하였다.
”어디 보세. 오호~ 이건 진주로군. 그것도 특등급으로 분류되는 검은 진주야.
용의 눈물이라 불리는 희귀 수정과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지. 심해에서 떠밀려 온 조개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하고 비싼 보석이지. 축하하네.“
왕자의 품평에 대원들과 병사들의 눈이 뒤집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안을 벗어나 엄청난 높이의 파도와 시시각각 돌변하는 기후, 엄청난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바다로 나갈 간 큰 이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진주와 산호 같은 바다에서만 나는 보석은 가온 대륙에서 높은 가치를 자랑했다.
수정은 생산되는 물량 대부분이 태양교 교단의 공물로 바쳐지기에 구하기 힘들었기에, 사실상 유통되는 보석은 금과 은이 대부분이었다.
그랬기에 진주와 일부 산호류의 보석은 수정을 제외한 보석류 중에서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기회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들에게서 광풍이 불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꺼져버렸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물건에 손대려 하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군. 쯧쯧.“
고르카가 한심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혀를 차자,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헤헤, 스승님, 주인이라고 하시면….“
깨달음을 얻으라고 주장하던 운카스가 재물 욕심은 버리지 못했는지,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고, 고르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무가님의 몸에 나 있는 것은 당연히 무가님 것이지. 그리고 내가 대리인이고.“
스스로 대리인이라 칭하는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듯한 말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고르카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 언제... 그렇다면 혹시?“
고르카에 대해 이제는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운카스 마저 더듬거리며 물었고, 고르카는 싱긋 미소 짓는다고 생각했으나, 그 누구보다 흉측한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다.“
이 말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야호! 역시 고르카님이셔!“
고르카는 환호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고, 모두는 다시 침묵했다.
”그런데 선장의 배분이 더 높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공평을 가장한 노동착취의 현장이 시작되었다.
++
누워서 미동(微動)도 하지 않던 가온 불패의 눈이 번쩍 떠지며 스프링이 튕기듯 상체가 벌떡 일어났고, 옆에서 다른 환자를 돌보던 라놀카 사제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깜작이야! 깨어나셨군요.“
”여긴?... 윽,“
가온 불패는 머리가 아팠던지 손으로 투구를 짚었고, 그 차가운 촉감에 그때야 제정신을 차리고서는 주위를 황급하게 살폈다.
그의 옆에 자신의 애검이 놓여 있자, 다행이라는 듯이 짧은 한숨을 쉬고는 검을 잡았다.
”휴~“
검을 찾고 나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그는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고, 어느새 태풍이 지나간 청명한 날씨 속에 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희한한 광경이 포착되었고, 경악에 찬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앗! 오거? 게다가 토끼? 설마, 쿤차까지? 게다가 단원들은 저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
고르카를 비롯한 이상한 거대 마수들과 자신의 단원들을 비롯해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죽자 살자 다투었던 붉은 기사단 및 다른 이들이 열심히 막노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렸다.
자신의 기사단원들과 붉은 기사단원들은 고르카에 의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반강제적으로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각하.“
가온 불패는 같은 교단의 인물 사이에서는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제복장을 한 인물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당신은 라놀카 갈의(褐衣) 사제?“
”예, 맞습니다. 몇 해 전, 한번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도 기억하시는군요.
궁금한 것이 많으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이분만 마저 치료하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라놀카 사제가 지목한 자는 다름 아닌 붉은 기사단장이었고, 가온 불패는 그를 보고 묘한 눈빛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라놀카 사제가 작게 기도문을 읊조리자, 그의 손에서 신성력으로 충만한 황금빛 태양이 떠올랐고, 지켜보던 가온 불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어느새 저런 신성력을 품게 되었지? 분명, 갈의 사제 중에서는 뛰어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어 눈여겨보았으나,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황 성하와 거의 동급의 신성력이 아닌가? 게다가 저렇게 또렷한 황금빛이라니. 허~ 차기 교황의 구도가 묘해지겠군.’
가온 불패는 현재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인 한 사제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눈을 찡그렸다.
‘잘 되었군. 그자를 볼 때마다 미묘하게 뭔가가 탐탁지 않았어. 그자의 뒤를 캐보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데. 이번이 기회가 되겠군.
음, 그런데 팔이 왜 이렇게 불편하지? 꼭 부러졌다가 방금 아문 것처럼 말이야.’
가온 불패는 살짝 인상을 쓰며 고르카에 의해 부러졌던 팔을 주물럭거렸고, 실제로 라놀카 사제의 신성력으로 인해 부러진 뼈가 붙은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