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이제, 아무 생각 안 해도 될 거에요.
* * *
촤아악
물이 쏟아진다.
따뜻한 온수가 루시의 머리를 적셔, 깨끗하게 만들었다.
나는 부끄러운듯 꼬리를 꼼질대는 루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아 주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건지.
얼굴이 완전히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이성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꼬마아이 같다.
“흐아.. 따뜻한 물로 씻으니까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에요..”
그러자 자신도 바라봐 달라는듯.
스칼렛이 내 뒤를 꼭 껴안으며 응석을 부린다.
그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달라 귀여워서.
헤헤 웃으며 그녀의 뺨에 짧게 키스해 주었다.
욕실 안에서는 못 맡던 꽃 향이 났다.
“슬슬 몸 다 씻었으면, 안으로 들어가요.”
스칼렛이 제안했다.
나도 아까 몸을 다 씻었고, 마침 루시의 몸도 다 씻어 주었기에.
우리는 천천히 넓은 욕조에 들어갔다.
욕조 속이 넓은 것도 있고, 루시의 몸집이 작은 덕에 셋도 충분히 욕조를 즐길 수 있었다.
“후아아..”
루시가 매우 귀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사랑스러워서, 루시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아 버렸다.
하지만 그게 상당히 질투가 났는지.
스칼렛이 강제로 우리 둘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그리곤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날 꼭 껴안는다.
살짝 당황해서 스칼렛을 쳐다 보았지만.
그녀는 여우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쪽 하고 키스했다.
“흐읏..”
야릇한 신체 접촉에 음문이 반응한 모양이다.
나는 옅게 신음하며 숨을 헐떡였다.
그걸 보란듯이, 루시를 돌아보며 생긋 웃는 스칼렛.
약간 애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유욕이 짙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루시는 군소리 없이 스칼렛의 등을 꼭 껴안았다.
‘둘 다 귀여워..’
품을 뺏으려고 사이에 끼어든 스칼렛이나, 그것도 좋다고 스칼렛을 안아주는 루시나.
둘 모두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섹스를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
우리 셋은 어제 그렇게 격렬하게 뷰지를 쑤셔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섹스했기 때문이다.
스칼렛이 루시에게 보빨받으며 나와 키스하던 경험은 참 새로웠다.
나는 물을 찰박이며 꽃잎 향이 나는 입욕을 즐겼다.
샤워는 이윽고 끝났다.
욕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우리는 몸만 대충 닦은 뒤, 적나라한 알몸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차피 스칼렛의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아침에 섹스를 그렇게 격렬하게 해서 그런걸까.
왜인지 모르게 잠이 솔솔 온다.
“흐아아암..”
살짝 늘어지게 하품하고선 눈을 감았다.
스칼렛은 피식 웃으며 내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상해. 너무 졸린데.
무거운 눈꺼풀이 절로 감기며 몸이 둥실둥실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뭔가 핏, 하고 영상이 꺼지듯 스파크가 일며.
잠에 빠져들었다.
****
눈을 떴다.
“으음..”
밝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휑한 침대와 가구만이 있을 뿐.
루시도, 스칼렛도.
그 누구도 없었다.
“깨셨습니까?”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바로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본지 한 몇 주는 된, 머리가 없는 남자.
“아저씨!”
나는 굉장히 반가운 기분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다가 잠시, 알몸인것을 뒤늦게 자각하곤 부끄럽게 이불을 끌어다가 몸을 가렸다.
큼, 큼. 헛기침을 한 뒤.
“진짜 오랜만이에요..”
묘한 울컥함과 기쁨을 담아 말했다.
다만 남자는 별 말이 없었다.
원래 평소대로라면 ‘저도 반갑습니다, 아가씨!’ 라며 바보 같은 폭죽을 터뜨려야 하는데.
그럼에도 남자의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나는 다리를 살짝 꼼질거리다가,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에요? 말도 없이.. 불러도 자꾸 안 나오고. 저 조금 서운해요.”
“그러셨나요?”
하지만 남자는 나만큼 재회한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목을 갸웃이고, 주먹을 천천히 쥐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만날 수 없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대체 뭐라고 하는걸까.
아.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장난인가?
참 나. 내가 이런 장난에 속아 넘어갈줄 알고.
픽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그런거 안 속아요. 아저씨 장난 치는걸 제가 몇 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아저씨? 그.. 이거 재미 없어요. 그만 해요.”
벌떡.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도 마찬가지로 남자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훌렁, 이불이 벗겨져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장난이”
“헤헤.. 막 서프라이즈 이런거 안 해도 돼요.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봐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놀랄걸요.”
“..그만 하십시오.”
“뭘.. 그만해요..?”
아무리 얘기를 해 보려고 해도,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고 해도.
남자는 단호한 기색으로 내 말을 끊을 뿐이다.
나는 애써 웃으며 남자의 가슴팍을 붙잡았다.
“아저씨. 말해 봐요. 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러지 마요. 제발..”
왜 자꾸 그러는거야.
간만에 와서,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가슴팍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린다.
“이제 현실을 바라볼 때입니다.”
“현실이요..? 무, 무슨 현실을 말하는 거에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대뜸 나와서 하는 말이 이거야?
전처럼 장난도 치고, 수다도 떨고.
그래줬으면 하는데.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게 그저 웃고 넘어갈 일이 될 수 있게.
살갑게 날 대해줬으면 하는데.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절대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의심하고 도망치세요.”
“도망..? 저, 저는.. 아가씨랑.. 루시랑.. 이렇게 살거에요. 계속.. 계, 소옥.. 끄윽..”
두근, 두근.
심장의 통증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끅끅댔다.
도망치라고?
무엇으로부터?
스칼렛으로부터.
아가씨? 왜?
나는 이 상태로도 충분히 행복한데.
탈출해야 해. 그동안 줄곧 원하던 것이었잖아.
탈출하고 싶지 않아.
약속을 했잖아.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가 머릿속을 헤집고, 심장의 통증은 점점 심해져 간다.
마치 요정의 실루엣을 봤을때처럼.
“끄윽.. 아저.. 씨이..”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남자가 웃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남자의 머리는 제 자리를 찾았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동안..”
부드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살짝 숙이곤.
팔을 배에 딱 붙인 뒤.
“감사했습니다.”
나지막히, 말했다.
쉬이이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마구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남자의 형체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
“아저씨.. 아저.. 씨이..”
폭풍 때문에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손을 뻗어, 간신히 남자의 바지를 꽉 붙잡았다.
안돼. 제발 가지 마.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남자가 없었다면 나는 진즉에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치지 않았다.
새삼스레 그가 처음 농담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아저씨.. 끄윽.. 안돼요.. 제발..”
남자는 점점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폭풍은 더욱 거세지고, 팔에 힘이 풀려 간다.
처음 탈출법을 알려 줬을 때에는 내가 진짜 미쳤던 건가 싶었지.
하지만 그의 조언은 정확했다.
“..제가 없어도, 당신은 충분히 잘 해낼 겁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마.
간절히 애원하며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힘들때, 말동무가 필요할때.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남자가 안아줬던 그 따뜻한 체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스칼렛의 포옹과는 차원이 다른 온기.
쉬이이이이익
폭풍과 함께 남자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폭죽을 터뜨리고, 재미없는 장난을 과장스레 하기나 하고.
때론 의미심장한 말만 하지만.
그래도 전부 나를 위해, 도움을 주기도 하고.
“아저씨..”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이렇게 떠나간다고?
나는 아직 작별인사도 안 했는데.
쿠구구구국
서서히 폭풍은 절정에 치닫아 모든걸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가구를 부수고, 방을 부수고.
서서히 내 몸까지 안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직전.
남자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쿡 누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매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
“히야아악!!”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비명을 질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옆에서 자고 있던 루시가 움찔 하며 깬다.
동시에 곧바로 일어나는 스칼렛.
“세, 세실? 왜 그래요?!”
“허, 허억, 허억.. 끄윽.. 끅..”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급격히 몰려온 호흡 곤란에 꺽꺽대는 소리가 난다.
스칼렛은 극도로 당황하며 내 등을 탁탁 쳐 주었다.
동시에 뺨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는게 느껴졌다.
그건 눈물이었다.
“꺼억, 끅.. 으윽.. 끄윽.. 흐윽..”
호흡 곤란은 이윽고 멈췄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거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극도로 슬픈 감정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잘 느껴졌다.
가슴이 찢어질듯 슬프고, 아파서.
나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며 흐느꼈다.
“끄윽, 히윽..”
“세실, 세실! 지, 진정해요. 이쪽 봐요.. 전 여기 있어요..”
그러자 스칼렛이 나를 꽉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는 최대한 나를 안정시키려 애쓰고 있고.
알몸을 밀착해 체온을 나눈다.
스칼렛과의 스킨십 덕에 떨림은 잦아 들었지만.
무언가, 머릿속 한구석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이건..’
손등에 찍힌 기이한 문양에서 옅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전에 보았던 문양과는 모양이 다르다.
무언가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건 저번 문양과 같았지만.
이번 문양은 이빨이 단 두개밖에 없었다.
“자아.. 세실. 이제 다시 자요. 지금은 밤이 조금 늦었으니까, 내일..”
“아으..!”
내 등을 껴안으며 외치는 루시의 옹알이 때문에, 스칼렛이 말한 마지막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 정신은 다른 곳에 완전히 팔려 있었다.
빛나고 있는 문양.
거기에는, 매우 익숙한 요정의 날개 한 쌍이 그려져 있었다.
****
“으으음..”
나는 몸을 살짝 뒤척이며 스칼렛의 체온을 찾아 팔을 휘적였다.
하지만 느껴지는건 허공을 젓는 감각.
옆으로 팔을 뻗으니, 작고 말랑한게 만져진다.
이번엔 제대로 잡았다.
따뜻한 루시의 몸을 끌어안은 뒤, 매끈매끈한 뿔을 만지작대며 헤헤 웃었다.
체온을 나누며 시작하는 아침은 기분이 좋다.
벌컥
잠시 루시를 만끽하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등에 적힌 문양은 선명히 새겨져 밤에 있었던 일이 잘못 본게 아니라는걸 증명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밝은 표정의 스칼렛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아가씨!”
“일어났어요? 마침 잘 됐네요. 줄 게 하나 있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고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건 바로 약이었다.
평소처럼 또 약으로 기분을 좋게 해주려나 싶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요즘 스칼렛의 약을 잘 먹지 못했다.
중독성은 따로 없지만 그 기분 좋은걸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오른다.
“빨리, 약 주세요. 아아..”
입을 살짝 벌리며 약을 애타게 조르자.
스칼렛이 여느때처럼 내 입에 약을 넣은 뒤, 혀를 천천히 섞어 주었다.
꿀꺽. 하고 약이 넘어가자.
털썩
“에, 으으?”
순간, 다리가 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탁 멈추고.
기분이 둥실둥실 떠오른 뒤.
뷰지 안쪽이 마구 뜨거워진다.
“엑, 게엑. 헤에엣..”
아래에서 뭔가가 계속 새는걸 참을 수가 없다.
뷰지를 문지르자, 나오는건 끈적한 애액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비틀 하고 뒤로 꼬꾸라져 버렸다.
터업
그걸 재빠르게 잡아챈 스칼렛.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몸을 늘어뜨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평소보다 엄청 강도가 셀 거에요. 어제 말했죠? 새로 들어온 약초로 만들었거든요.”
“에으.. 으으..”
퓻, 퓻.
스칼렛의 숨결이 귀를 스치자.
허리가 활어처럼 펄떡 뛰며 애액이 뿜어져 나온다.
감도가 이상하다. 음문도 뜨겁고, 뷰지가 미친 듯이 간질이고, 머리가 녹아버렸다.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싸는게 애액인지 오줌인지도 잘 모르겠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행복감.
약에 녹아버린 나를 보며, 스칼렛이 몇 마디를 더 덧붙인다.
“요새 약이 조금 줄어서.. 세실이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원래는 한참 뒤에나 할 예정이었지만..”
그리곤 나를 껴안은 채, 주머니에서 주사기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게 무슨 용도인지는 뻔했다.
그녀는 내 피부에 주사기를 갖다대고.
“일정을 좀 앞당겨야겠네요. 이제,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될 거에요.”
생긋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