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족이 나를 보고 딸침-58화 (58/170)

〈 58화 〉 벗는게 싫으면, 벗겨드릴까요?

* * *

“..이번에도 장난 치는거에요?”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소녀가, 장난스레 폭죽을 손에 쥔다.

저걸 터뜨리려는건 아니겠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킥킥..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단순히 구경이나 하려고 나온건 아니니까요.”

참 특이하게도 오늘 소녀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디자인이 상당히 낯이 익은 것은 기분 탓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이며 스칼렛을 옆에 뉘였다.

자면서도 나를 꼭 끌어안는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모양.

그녀를 이대로 떼놓기도 조금 애매했기에.

그냥 그대로 둔 채로 대화를 이어갔다.

“항상 좋은 타이밍에 나오시길래, 오늘도 힌트 알려주려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흐음.. 사실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소녀가 대뜸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톡, 톡.

그러다가 어째서인지, 내 명치에 손가락을 콕콕 갖다댄다.

그 손짓이 묘하게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게 느껴진다.

“그, 아.. 저씨?”

“잠시 벗어 보시겠어요?”

예?

갑자기 왜 벗으라는 거지.

급작스런 부탁에 당황스레 손을 꼼지락댔다.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응시하더니, 밝게 큭큭대는 소녀.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벗는게 싫으면, 벗겨드릴까요?”

그리곤 그 얇고 하얀 손으로 옷깃을 슬쩍 쥔다.

한쪽 손은 내 등을 천천히 쓸고.

반대쪽 손으로는 단추를 하나 하나 천천히 풀었다.

묘하게 능숙한 손놀림이다.

“그.. 아, 음. 큼! 제, 제가 벗을게요. 잠시만요..”

뭔가 이대로 가면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 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소녀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옷이 한꺼풀 한꺼풀 벗겨질 때마다, 얼굴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나는 상체 탈의를 한 상태로, 두 손을 깍지 꼈다.

“어디 봅시다..”

톡.

소녀의 손가락이 내 명치에 닿았다.

약간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힛..”

그 약간 낯선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온다.

손가락은 명치를 빙글빙글 훑다가, 이내 가슴 근처를 꾹 눌렀다.

“상당히 민감하군요. 약의 영향일까요?”

소녀는 내 반응을 상당히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내 살결을 느릿하게 누르다가, 이내 명치 중앙에 손가락을 갖다 댄다.

“흐음.. 생각했던것 보다 상태가 훨씬 좋군요. 그 요정 분의 작품인가요?”

“네에.. 올리가.. 히잇..!”

마저 답하려는 순간.

톡, 하고 소녀의 손가락이 내 젖꼭지를 튕겼다.

동시에 퍼지는건 짜르르한 전류.

나는 몸을 움찔 떨며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하아, 핫..”

“큭큭.. 죄송합니다. 리액션이 너무 좋아서 그만..”

“으으..”

그 요망하고도 짓궃은 표정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모습이 바뀌더니 장난끼가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난 찌릿한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건드리시면 놀라요..”

“이것도 검사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믿으실까요?”

“그럴 리가..”

끝까지 요망한 태도를 감추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소녀한테 농락당한다는게, 묘하게 수치 스러우면서도.

묘한 흥분을 머금어서.

나는 귀까지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그럼, 장난은 이쯤 하고..”

이윽고 생긋 미소 지은 소녀.

그녀는 내게 옷을 다시 입혀주더니, 루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꼬마 아가씨. 잠시 손 좀 주시겠습니까?”

그리곤 작은 루시의 손을 쥔 뒤.

화아악­

묘한 빛을, 흘려 보냈다.

“우으?!”

동시에 눈을 크게 치켜뜨는 루시.

잠시 입을 오물거리고,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빵긋 하고 웃었다.

‘뭘 한거지..?’

“아가씨의 상태는 저 꼬마 아가씨한테 전해 줬으니, 앞으로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약간 아까 한게 간이 진료같은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하여간, 태도는 장난스러우면서도 할건 다 한다.

잠시 입을 오물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 루시.

이내 올리를 보며 작게 입을 달싹인다.

뭘 하고 있는 걸까?

“제가 할 일은 이 정도면 됐고.. 다음 힌트는, 발이 완전히 회복되면 알려 드리죠.”

쉬이익­

그말을 끝으로, 소녀는 조금씩 형체를 잃어 갔다.

모양새를 보니 다시금 문양으로 돌아가려는 모양.

나는 그런 소녀를 보며.

“자, 잠깐만요, 아저씨!”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음? 왜 그러십니까?”

“그..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이는 소녀.

나는 잠시 턱을 만지작대다, 살짝 망설이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에요?”

줄곧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자, 갑자기 방에 침묵이 흘렀다.

소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눈을 크게 치켜 뜨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이다가.

“푸, 푸하핫..”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크게 깔깔대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추는 소녀.

뭔가 이상한 질문이었나, 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냥, 아가씨 다운 질문이다 싶어서요.”

나 다운게 뭐지. 알 수 없는 말에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소녀는 내 질문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느긋하게 웃어 보인다.

“크리스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그리 말하는 크리스의 얼굴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마치 기분 좋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크리스.. 알겠어요. 새삼스럽지만, 앞으로 잘 부탁..”

쉬르륵­

통성명을 한 기념으로 인사라도 하려 했더니만.

크리스는 그 말만 딱 하고 문양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것도 크리스의 짓궃은 장난일까?

난 픽 웃어 보이고선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운기도, 루시의 애액도, 이제 충분히 돌파구는 찾았다.

남은 것은 그것들을 최대한 활용해 탈출하는 것 뿐.

그리고, 최근 들어 생긴 의문점.

스칼렛과 왕국에 대한 관계.

‘바깥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던가 해야겠어.’

그것들을, 파헤칠 필요가 있어 보였다.

****

“같이 외출하고 싶다구요?”

스칼렛이 상당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나는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채다.

바깥은 깜깜하다.

얼마 전에 깨어난 스칼렛이, 내게 달라붙어 섹스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몸을 섞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밤.

나는 스칼렛에게 줄곧 담고 있던 요구를 말했다.

“네. 아가씨랑 같이 밖에 나가 보고 싶어요.”

“..안돼요.”

예상은 했지만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거절이 날아온다.

쪽.

나는 그런 스칼렛의 말에, 실망조차 하지 않고.

입술에 애교 어린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얼굴을 살짝 안쪽으로 숙이는 스칼렛.

부끄러운 걸까?

“왜요?”

최근 보였던 무미건조한 태도가 아닌, 애정으로 촉촉해진 목소리.

그 목소리에 스칼렛이 바로 반응했다.

그래. 이렇게 하면 관심을 가질 줄 알았어.

“세실은.. 소중하니까요.”

그 ‘소중’ 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안다.

소유하고, 종속시키고, 마치 예쁜 꽃처럼.

저택 안에 꼭꼭 숨겨 두고 싶다는 소리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그런 소유욕에 동참해 줄 생각이 없다.

전에는 꿈도 못 꿨을 행동이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고, 따뜻하게 작은 몸을 끌어 안았다.

움찔. 스칼렛의 몸이 살짝 반응하는게 느껴진다.

더불어 두근거리는 내 심장도.

아직도 스칼렛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정을 머금었다.

“..아가씨를 더 알고 싶어요.”

요즘 외출이 잦잖아요. 작게 덧붙였다.

그러자 얕게 입을 달싹이는 스칼렛.

본인도 그건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를 이렇게 숨기려고 하는건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처음에는 단순한 소유욕이라 생각했으나.

그런것 치곤, 내 저택 안에서의 이동은 꽤 자유롭다.

아예 자기만 보고 싶었으면 진즉에 팔다리를 아작내서 의자 위에 묶어 뒀겠지.

어째서 탈출이라는 리스크를 감내하며 나를 방치해 뒀겠는가?

처음에는 그녀의 사디스트 기질을 채우기 위한 기행인가 싶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저택만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식의 논리도 성립이 된다.

실제로 저택 밖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방대한 환술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안 될까요? 이대로 저택에만 있는건 너무 답답하단 말이에요.”

“그치만..”

내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조르자, 스칼렛이 드디어 망설이는 기색을 드러냈다.

최근 스칼렛의 정신은 많이 약해졌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그건 틈이 생겼다는 소리고.

최근 내게 했던 힘줄 절단.

그게 방아쇠가 되어 항상 여유롭던 저 심경을 짓무르게 만들었겠지.

위기를 기회로.

그녀의 사랑과, 내 고통은 유일하게 내가 쥘 수 있는 조커 카드다.

“그렇게 걱정되면, 모습을 바꾸고 가면 되잖아요. 저도 나가고 싶어요. 저택 안에만 있는 것도 힘들어요.”

요 일주일간 처음으로 보이는 정확한 의사 표현이었기에.

스칼렛은, 자신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었다.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다가.

“..알겠어요. 대신, 밖에서는 꼭 제 말에 따라야 해요. 알겠죠?”

살짝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헤헤.. 알겠어요, 아가씨.”

쪽. 다시금 스칼렛의 입술에 짧게 키스해 주었다.

이걸로, 허락을 얻어내는건 성공.

밖에서 얼마 만큼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 보는 수밖에 없다.

****

“..준비 다 됐어요?”

스칼렛이 물었다.

언제나처럼 외출복을 차려 입은 그녀.

나는 생긋 웃으며, 스칼렛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휠체어에 앉은 내 얼굴에 꽂힌다.

뭐지.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약간 어색하게 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뇨. 너무.. 예뻐서.”

그리 말하는 스칼렛의 얼굴은 완전히 무언가에 홀딱 빠진 채였다.

단순히 겉치례나 칭찬 따위가 아닌, 진심이 드러나는 표정.

그 칭찬에 도리어 부끄러움이 밀려 온다.

내 얼굴 그대로 꾸민 것도 아니고, 화장과 가발로 생김새를 좀 바꿨을 뿐인데.

아, 눈 색이 변하는 마도구도 하나 꼈다.

스칼렛은 잠시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시간이 지체됨을 자각했는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음.. 이제 슬슬 나가요. 루시. 휠체어 좀 밀어줄래?”

“아으!”

활기차게 답한 루시. 약간 짧은 팔을 쭉 뻗는다.

끼익­

이윽고 앞으로 움직이는 휠체어.

이런건 어디서 가져왔는지, 어젯밤 ‘내일 세실이 쓸 거에요’ 라며 내게 보여준 물건이다.

덕분에 이동 문제는 한껏 줄어들었다.

“아우, 우으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외출에는 루시도 함께 간다.

외출 내용은 ‘칼슨’ 이라는 암시장 딜러와의 거래.

그와 짧은 거래를 한 뒤, 마을을 둘러 볼 예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나를 데려가는 것을 보면 나름 신용도 있는 딜러인 모양.

‘그만큼 자기 마법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저택을 빠르게 나와서,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스칼렛과의 첫 만남때 봤던 기사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저택에서 저런 기사들은 못 봤는데.

그들은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묵고 있는 듯했다.

“오셨습니까?”

우리를 맞이한건 매우 우직해 보이는 기사였다.

커다란 체격,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얼굴.

스칼렛은 그를 기사단장 유스턴이라고 소개했다.

‘기사 단장이라..’

보통 기사단은 왕국에 소속되어 있을 텐데.

이렇게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호위하는 기사단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역시 스칼렛.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것들 투성이다.

“응. 오늘도 고생해줘, 유스턴. 바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가 타고 갈 마차는 상당히 고급진 디자인의 마차였다.

스칼렛과 유스턴이 먼저 타고, 난 루시의 도움을 받아 안쪽에 탑승했다.

마차 안은 매우 넓었다. 여덟 명도 거뜬해 보이는 크기였다.

나는 잠시 마차 안 풍경을 구경하다.

“..기사 단장님도 외출에 따라가시는 건가요?”

문득 든 의문을 입에 담았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유스턴.

그는 뭔가 최대한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인상을 찾는 것 같았다.

눈썹이 꿈틀거리고, 입가가 경련하다가.

이내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저희는 끝까지 동행하진 않습니다. 그저, 우연히 가는 길이 같아 데려다 드릴 뿐입니다.”

뭔가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잘 들어맞는 것 같지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이랴앗!”

이윽고 앞쪽에서 누군가가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출발하는 모양이다.

나는 딱 알맞은 크기의 루시를 무릎 위에 앉혀, 작고 포근한 체온을 즐겼다.

생각보다 마차의 속도는 빨랐다.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순식간에 숲의 풍경이 뒤로 휙휙 지나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 쿵!

숲을 지나 넓은 황야로 나오자 마자, 어딘가에서 좀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하..”

동시에 깊게 한숨을 쉬는 스칼렛.

피융, 팍!

무언가가 마차 문에 꽂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끼이이익­

마차가, 천천히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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