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족이 나를 보고 딸침-84화 (84/170)

〈 84화 〉 기억을 조금 만지는 것 뿐이에요.

* * *

“히유우..”

루시가 눈을 떴다.

옆에는 세실이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음냐아..”

그 사랑스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세실이 옆에 있는 루시를 꼭 껴안았다.

아직 일어나진 않았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이 참 귀여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가장 중요한게 스쳐 지나갔다.

“아, 우으..!”

‘맞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 여기는 다른 방이다.

세실과 섹스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스칼렛이 노발대발 하며 사지를 잘라버릴 지도 모른다.

루시는 잔뜩 긴장하며 방 밖 창문을 응시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야..’

다행이다.

잔뜩 체력이 빠져서 오늘 아침까지 자버렸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세실은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샤워를 하고 와도 시간이 충분하겠다.

스칼렛이 일어나는 시간은 지금 시간대에서 약 2시간정도 뒤.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진 꽤 걸릴테니, 다행이다.

“읏챠..”

루시가 세실을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

샤워는 필수로 시켜야 한다. 스칼렛은 코가 매우 좋으니까.

다른 여자의 냄새를 맡는다면 곧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

“으히이이.. 간지러엉..”

아직 몸이 작아서 그런지 세실을 들고 가기가 힘들다.

빨리, 몸이 더 커졌으면 좋겠는데.

요즘 성장기라 그런지 키가 커지는건 좋다.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땅콩만한 크기였기에.

더 빨리 클 수는 없나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다.

‘더 커지면 언니 정도는 문제 없이 안고 다닐 수 있겠지?’

물론 지금도 그닥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어깨에 짐짝처럼 들고 다니는 것은 약간 멋이 없지 않는가.

멋있게, 공주님 안기로 세실을 안고 다닌다면.

그녀는 자신의 멋짐에 반해버릴지도 모른다.

“우으으으으으으으..”

이내 머릿속에 떠올린 그 모습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버린다.

멍청이. 모질이.

이런 바보같은 생각이나 하고.

요새 참,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생각 같은 것들이 많이 든다.

공통점은 전부 세실에 관한 것들.

세실을 어떻게 하고 싶다, 세실과 뭘 하고 싶다.

머릿속이 온통 세실로 가득 차 있어서.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소한 약 30년쯤 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벌컥­

잡생각을 하니 욕실에 도착했다.

루시는 옅게 한숨을 쉬며 물을 틀었다.

원래 사용법은 잘 알지 못했지만, 스칼렛이 알려줬다.

쏴아아아­

목욕물로 세실의 몸을 씻기니, 물에 닿은 하얀 피부가 반짝였다.

“우으으.. 루시이..?”

아, 따뜻하지만 물을 끼얹으니 잠에서 깼나 보다.

사랑스러운 세실을 보며 루시가 웃는다.

세실은 잠시 부스스한 눈을 꿈뻑이더니.

이내 상황 파악을 마친다.

“헤헤.. 씻겨 주려고 데리고 온거야..?”

힘들었을텐데. 고마워. 덧붙인 세실이, 루시의 이마에 쪽 하고 키스한다.

그러자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이는 루시.

샤워기도 같이 아래로 내려갔기에, 세실은 얼굴부터 아래까지 물 세례를 맞아야만 했다.

“어푸, 우브브브브브븝..”

“아, 우! 우아으..”

잔뜩 당황한 루시가 팔을 휘적이며 입을 꿈뻑인다.

그러자 낄낄 웃으며 루시를 와락 껴안는 세실.

“괜찮아. 덕분에 잠이 확 깬다.”

당황하는 세실이 굉장히 귀엽다는 투다.

루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세실의 알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샤워기를 내밀었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든 세실.

“이제부턴 내가 씻을게. 자, 이리 와. 너도 씻겨줄 테니까.”

그리 말하며 루시의 몸에 거품칠을 했다.

그렇게 그 둘은 즐겁게 목욕을 한 뒤, 조용히 스칼렛의 방으로 돌아갔다.

목욕을 하다 두 번 더 섹스한건 둘만의 비밀이다.

묘한 두근거림을 안고, 세실은 잠에 들었다.

****

“킁, 킁..”

일어나자 마자 나를 반긴 것은 스칼렛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었다.

조금씩 움찔대는 코와, 부드럽게 내 어깨를 붙잡은 손길이 느껴졌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아가씨..?”

“흠.. 어제 같이 씻긴 했는데..”

스칼렛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마, 들켰나..?’

어제 섹스한 것까지는 들키지 않은 것 같았지만.

뭔가 이변을 알아챈 것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욕실 비누 냄새가 조금 더 강하게 나는 것 같아서.”

‘저런건 대체 어떻게 아는거야..’

보면 볼수록 스칼렛의 후각은 정말로 경이로웠다.

저게 정말로 사람이 맞긴 한건가?

저 초인적인 후각에, 곤란한 일을 겪은 적도 있었고.

“밥 가져올게요. 배고프죠?”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스칼렛.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이동했다.

“루시.. 이리 와..”

그러자 나는 곧바로 팔을 벌려 루시를 불렀다.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내게 쪼르르 다가와 품에 안기는 루시.

귀엽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다시금 쿵쿵대는 가슴에, 그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담았다.

그리고 어깨에 얼굴을 묻어 볼을 부볐다.

“헤헤..”

이거지.

따뜻한 신체 접촉에 행복감이 차오르는게 느껴진다.

약 따위로 기분이 좋은게 아니다.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루시 덕문에.

나는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사랑’ 을 떠올리니,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친다.

이 전에 또 뭔가를 사랑했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렇게 까먹어 버릴 정도면, 그닥 중요한건 아니라는 거겠지.

“우으으..”

내가 딱 달라붙어 스킨십을 하자, 루시가 부끄러운듯 목소리를 냈다.

이런 스킨십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걸까.

허벅지를 자꾸 꼼질거리길래, 살짝 얼굴을 뒤로 뺐다.

“우..”

루시는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더 빨개진 얼굴로, 뺨을 내 얼굴에 쓱 들이댔다.

싫은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구나.

솔직하지 못한 점마저 너무나도 귀엽다.

벌컥­

잠시 루시와 꽁냥대며 헤헤 웃고 있자.

스칼렛이 방으로 올라왔다.

손에 든 접시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 나온다.

쟁반에는 무슨 주사기 같은 것이 올라가 있었다.

나한테 쓸건 아닌지, 별 말 없이 곧바로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오늘 식사에요. 자, 맛있게 먹어요.”

나는 다시금 루시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 위에 올라탄 뒤.

식탁 앞에 앉았다.

달칵­

접시를 올리니 그 안에는 먹음직스런 황금 볶음밥이 들어 있었다.

최근에는 잘 안 해주더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루시와 함께 행복한 식사 시간에 들어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칼렛.

“어제는, 기분 좋았어요?”

갑자기 주어 없는 질문을 던진다.

“크흡..!”

그러자 바로 당혹스러움에 사레가 들려 버린다.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아마 저 속에서는 굉장히 커다란 당혹감이 맴돌았을 것이다.

“켁, 켁..”

“음? 왜 그래요? 이거 마셔요.”

벌컥, 벌컥­

나는 스칼렛이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선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진정 됐어요?”

“어, 음.. 네.”

뭐가 기분 좋았냐는거지?

우리가 섹스한걸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걸 알고 있었으면 바로바로 말했을 텐데.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내 스칼렛이 입을 열자.

그 불안감은 확 날아가 버렸다.

“어제 한 번 다른 딜도 써 봤잖아요. 약간 얇은거. 그거 어땠냐는 말이었는데.”

얼굴에 옅은 미소가 올라가 있다.

아마 내 반응이 재미있었던 모양.

아, 그런 거였나.

어제 씻기 전에 딜도를 잠깐 시연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기분 좋았어요. 그리 크지도 않구..”

“그래요? 그럼 루시한테도 한 번 써보라고 해야겠네.”

끄덕. 고개를 끄덕인 스칼렛이 하던대로 식사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묘하게 불편한 식사는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나는 밥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워, 스칼렛의 무릎 베개를 받았다.

얇지만 말랑한 허벅지가 기분 좋았다.

“히히..”

그리고 그것보다,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루시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왜 이렇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좋았다. 너무 좋아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스칼렛은 내 머리를 쓰담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늘 섹스는 안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그녀가 주머니에서 주사 하나를 꺼냈다.

‘저건..’

아까 그냥 말 없이 주머니에 넣어 뒀던 주사다.

전에 내가 맞았던 종류의 미약인 것일까?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였다.

그녀는 내가 궁금증을 느낀 것을 아는지.

픽 웃으며 내 목 옆에 손을 올려 두었다.

목 근처에 저런 뾰족한게 있다니. 약간 무섭다.

“아가씨.. 왜 그래요?”

“진짜로 제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요?”

그리고선 완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답하는 스칼렛.

움찔. 몸이 떨렸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을 한다.

“무, 무슨 소리세요..?”

“하하.. 하하하하.. 하하..”

내 물음에,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스칼렛.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가씨.. 무, 무서워요. 그러지 마세요.”

“어제.. 새벽에.. 루시랑.. 섹스하러 갔죠..?”

꾸우욱, 내 어깨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뭘 먹었는지, 압도적인 근력이 어깨를 짓누른다.

“읏, 으윽.. 그, 그게.. 아가씨이..”

“저를.. 내버려두고.. 왜.. 어째서.. 저런 도마뱀 같은 년이라앙..!”

스칼렛은 잔뜩 독기 어린 목소리로 내 어깨를 짓눌렀다.

“우, 으­”

“넌 닥치고 있어!! 감히, 감히.. 아가씨를.. 내 아가씨를..”

“으그읏..”

꽈아아악­

진짜, 귀족이라 혈통 빨을 받아서 그런가.

어마어마한 힘에, 손톱이 내 살을 파고든다.

피가 흘렀지만 스칼렛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시뻘개진 얼굴로 이를 악물며.

내 어깨를 짓누를 뿐이다.

“사, 사랑의 묘약을.. 먹였는데도.. 어째서어..”

“사랑의.. 묘약..?”

그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내가 사랑의 묘약을 먹었다고?

그러고 보니, 전에 스칼렛이 준 빨간색 약이 기억났다.

설마.

그게 사랑의 묘약이라고?

그걸 먹고 루시에게 극한의 애정을 느꼈었는데.

이제서야 뭔가 상황이 이해된다.

“분명히.. 식탁 위에 올려뒀.. 식탁..”

스칼렛은 무언가를 연상하듯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딱 멈추고.

“..그러고 보니.. 루시. 너도, 아가씨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았지.”

네가 약에 손을 댔구나.

덧붙인 스칼렛이 루시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러다가, 이내 제 손을 부르르 떨고선.

“아니. 이제 상관 없어. 아가씬.. 너 따위는 잊어 버릴 테니까.”

떨리는 손을 치켜 들었다.

“아가씨, 무슨­”

쿠욱!

“아그으읏!”

동시에 목에 욱신대는 감촉이 퍼진다.

주삿바늘이, 목 바로 아래에 꽂혔다.

이윽고 들어오는 것은 살짝 화끈한 느낌이 드는 액체.

“아가.. 씨..”

“..괜찮아요. 이제, 더 이상 세실을 뺏길 일은 없을 거니까.”

서서히 몸 안으로 액체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리와 팔로 몸을 꽉 고정해서 뺄 수도 없다.

그리고, 무언가 기이한 감각이 몸 안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것은 머리 한구석이었다.

“아, 아각..!”

허리가 탁 튀고, 온 몸이 급속도로 발열한다.

나는 몸을 펄떡펄떡 튀며 새하얘지는 머릿속을 느꼈다.

“..기억을 조금 만지는 것 뿐이에요.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처음 봤던, 루시와의 만남.

그게 조금씩 하얀색 물감으로 덧씌워진다.

“힉, 히긱.. 그으으윽..”

바보같이 몸을 떨며 벌린 입에서는 침을 줄줄 흘려댄다.

아무리 몸을 버둥거려도 스칼렛에게 붙잡혀 움직일 수가 없다.

“괜찮아요. 부작용으로 아주 살짝, 지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스칼렛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루시의 얼굴이 무수히 많이 떠오른다.

전에 루시에게 힐링을 받았을 때, 루시와 처음 키스를 했을 때.

루시가 혀를 잘렸을 때.

루시와 섹스를 했을 때.

루시, 루시, 루시, 루시, 루시.

모든 기억들이 하얀 백지처럼 지워져 간다.

“아, 아..”

주륵.

코에서는 끈적한 무언가가 흘러 내렸다.

안돼.

저항하려고 해도, 격렬한 쾌감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주물렀기에.

그저 축 늘어진 몸을 파르르 경련하며.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자아.. 괜찮아요.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마지막으로.

루시와 했던, 새벽의 섹스와. 샤워가.

바스라졌을 때.

쉬이이이­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애액과 오줌을 지려 버린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선.

무언가가 사라져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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