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전신 마비
* * *
벌컥
문이 열리고, 스칼렛이 모습을 드러낸다.
“헤헤.. 아가씨..”
나는 늘 하던 대로, 손에 딜도를 든 채로 스칼렛에게 달려갔으나.
터업
곧바로 굳은 얼굴을 한 그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반대쪽 손에는 크기가 살짝 큰 주사기를 들고 말이다.
“아가씨..?”
저렇게 차가운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갸웃였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던 것일까.
하지만 스칼렛은 말 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내 목에 주사기를 콱 꽂아 버렸다.
“아, 그악..!”
동시에 목을 뚫고 전해지는 것은 무언가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순식간에 느껴지는 것은 머리가 청량하게 맑아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콰창!
이내 목 뒤에서 뭔가가 박살나는 듯한 감각이 퍼지고.
머릿속을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가득 채운다.
“아, 으읏.. 극..”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움찔대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녀가 주사기 안의 내용물을 전부 다 집어넣자.
“어, 어어..?”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 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떠오른것은 루시의 얼굴이었다.
첫 만남 전의, 첫 만남.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던 표정.
나 때문에 혀가 잘렸던 때.
그동안 느꼈던 감정들.
애정, 사랑, 보호 욕구, 추억.
모든 것들이 과도하고 숨 막히게 머릿속을 범하기 시작한다.
“악, 카악..”
목이 달아오르고,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온다.
가장 먼저 나를 감싼 것은 격렬한 구토감이었다.
“우웁..!”
속이 아프다.
쓰리면서도, 불타오르는 것 같고.
그 작열하는 고통 속에서 식도에 얼음을 밀착시켜 문대는 듯한 기분.
손 끝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그렇지만 구토감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힘 없는 다리에 박차를 가하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달려갔다.
“오, 오웨에에에엑..”
그리고선 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바깥에 토사물을 쏟아낸다.
“엑, 케엑.. 웨에엑..”
그러면서도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어제 먹은 것까지 토해낸것 같다, 싶을 정도까지 구토를 계속하고 나서야.
“퉷, 켈록.. 켁.. 하아.. 하..”
털썩
나는 곧바로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몸이 움찔움찔 떨리고, 시야가 흐리다.
그 와중에도 파도치는 기억은 나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었고.
두통 때문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린다.
“..아직 기억이 복구 단계라서, 조금 힘들 거에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스칼렛이 내게 다가온다.
내 몸을 천천히 들어 받쳐준 뒤, 무언가로 입을 슥슥 닦아 준다.
컵 하나를 받쳐, 입까지 헹궈준 뒤.
그녀는 부들부들 경련하는 내 몸을 천천히 껴안아 주었다.
“미안해요, 세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세실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찮은 일이 생겨 버려서요.”
어쩔 수 없이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렸어요. 스칼렛이 덧붙인다.
“에, 으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머리가 핑핑 돌아, 그녀의 말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태?
원래대로?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멍하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잊고 있던 상황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래. 나는 스칼렛에게 약을 맞고..
기억을 잃었지.
무슨 약을 또 먹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 애초에 내가 무슨 약 때문에 이렇게 됐던거지?
아직도 머리가 뒤죽박죽하다.
그저 지금은 머리가 아프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멍하니 입을 달싹일 뿐.
“아.. 가씨..”
“자.. 많이 아프죠? 더 이상 말하지 마요. 나머지는 세실이 자고 일어나면.. 설명해 줄테니까.”
스칼렛은 그리 말하며 내 눈 위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직도 머리가 아프지만, 스칼렛의 냄새 때문일까.
마음이 보다 편안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스칼렛의 부드러운 품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
처음 느껴진 것은 팔에 무언가가 꽂혀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건 상당히 욱신대면서도, 느낌이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일어났어요?”
스칼렛이 물었다.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안에, 붉은 액체가 반쯤 차 있는 작은 병을.
탁, 탁
이윽고 옆에서 무언가를 치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 루시였다.
상당히 불안한 표정으로, 꼬리를 꿈틀대고 있는 루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읏..”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팔다리가 매우 뻐근하다.
딱히 팔다리가 결박된건 아니었기에 모종의 약물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힘 없이 입을 오물거렸다.
“아가씨.. 저.. 몸이..”
“괜찮아요. 괜찮아요, 세실.. 약을 좀 넣었어요. 피를 뽑았으니까, 약간 피곤할거에요.”
피를 뽑았다고?
그렇다면 저 병 안에 들어있는건 내 피란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아직 잠에서 덜 깨서 그런지 생각의 회전이 느리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몸에 힘을 풀었다.
스칼렛은 잠시 병을 옆에 내려놓고, 이내 말을 이었다.
“요즘, 참 저희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그녀가 내 머리칼을 천천히 어루만져 준다.
손가락을 살짝 펼쳐 흘러 내리는 머리칼의 감촉을 즐기다가.
이내 뺨으로 손이 내려온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평범한 방식으로는 세실을 지킬 수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평범한 방식?
스칼렛이 생각하는 ‘평범한 방식’ 이란 무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이 돌아온 지금,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절대로 평범한 방식이 아니었다.
사람을 약에 절이고, 머릿속을 주물러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평범’ 이라고?
미친 소리다. 제정신인 사람이 할 발상이 아니다.
“..그 표정을 보니까,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네요.”
아차.
생각이 너무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스칼렛은 옅게 웃으며 내 옆에 살포시 앉았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희는 이미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그쵸?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런 작은 다툼도 있을 수 있죠.”
꾸우욱. 얼굴을 쓰담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가, 이내 손의 힘을 풀고선.
밝게 웃어 보이는 그녀.
“그동안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저택 안에만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아니네요. 스칼렛이 덧붙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기억을 잃고 반쯤 백치 상태가 되었었는데.
뭔가 조합할 만한 정보도, 기억나는 것도 없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묘한 탈력감.
피를 뽑아서인지, 약을 많이 맞아서인지.
정신이 매우 피로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고 해요.”
특단의 조치라니.
지금 그녀가 뽑은 피와 관련이있는 것일까.
“특단의.. 조치..?”
“이제부터 세실은 아무데도 못 가요.”
“그, 그거언..”
원래부터 내가 자유로운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저택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고.
종종 외출에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스칼렛이 말하는 그 말에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몸을 파르르 떨며 스칼렛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해 보였다.
‘진작에 이렇게 할걸’ 싶은 표정.
“아, 그리고..”
내가 차마 대꾸하기도 전, 스칼렛이 무언가가 잔뜩 든 통을 하나 꺼낸다.
거기에는 주사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방금 제가 놓은 약이.. 그 동안 주입했던 약 기운들을 죄다 빼 놓는 약이었거든요.”
나긋나긋하게 말을 잇는 스칼렛의 표정은 섬뜩했다.
아, 그래서.
내가 급격하게 구토감을 느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그렇지만 그걸 알아챈다 한들 뭐 하겠는가.
스칼렛은 밝게 미소 지으며, 첫 번째 주사기를 내 피부에 갖다댔다.
“사랑의 묘약 효과가 사라진건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쭈우우욱
동시에 안쪽으로 들어오는 약물.
조금씩 정신이 혼미해 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만 참아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두 번째 약이 내 피부 안쪽으로 들어왔고.
나는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
“억, 허억!”
눈이 곧바로 떠졌다.
사방은 어둡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게 전에 와 봤던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한 번도 아니다.
여러번.
“헥, 헤엑..”
내 옆에선 굉장히 익숙한 개 한 마리가 헥헥대며 귀엽게 앉아 있었다.
하얀 털에, 마치 솜뭉치처럼 부드럽게 몸을 감싼 형태.
나는 전에 이 강아지를 본 적이 있었다.
“끼잉, 낑..”
강아지는 여린 울음소리를 내며 내 손등을 핥쨕핥쨕 핥았다.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 난다.
분명, 이 강아지한테 머리카락을 몇 가닥 준 적이 있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여기는.. 꿈인가?’
그래. 나는 분명히 스칼렛에게 약을 투여받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다면 방이어야 하겠지만.
여기서 깨어났다는 것은, 꿈이라는 소리밖에 되질 않는다.
분명히 두 번째 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게 소위 말하는 자각몽이란 것일까?
난 계속해서 낑낑대는 강아지를 안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착하지.”
왜인지 모르게 슬퍼하는 것 같았기에, 폭신한 몸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털을 피부로 느끼니 좀 안정되는 기분이다.
“끼잉, 낑.. 헥헥..”
할쨕, 핥쨕.
강아지는 귀엽게 혀를 빼물며 내 뺨을 핥아 주었다.
시선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가지고 싶은거라도..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왕!”
그러자, 곧바로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아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구나.
솜뭉치가 생기발랄하게 움직이기까지 하니 사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뭘 줘야 할까.
저번에는 머리카락을 줬었는데.
지금은 딱히 줄 게 없고.
“음.. 근데, 난 줄게 없는데. 어떡하지..”
작게 중얼거리니, 강아지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이내 내 손목을 핥쨕였다.
“응? 이거?”
손목은 갑자기 왜 핥는걸까, 싶어 쓱 내밀어 주었다.
그러자.
콰직
“아, 아악..!”
강아지가 내 손목을 이빨로 콱 깨문다.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통증은 전혀 없었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가?
쮸읍, 쯉
강아지는 잠시간 피를 정말 맛깔나게 빨았다.
그렇게 잠깐 동안을 행복하게 있다가.
이내 입을 떼는 강아지.
“왕!”
쉬르르륵
그러자, 곧바로 목에 이빨 모양의 문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건..’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꼭 강아지와의 상호작용을 하면 생겨나는 문양이다.
대체 저 강아지는 정체가 뭘까?
크리스의 또 다른 형태기라도 한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강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씨익, 하고.
강아지가 선명히 웃었다.
****
“으, 으음..”
또 다시 눈이 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로’ 깨어난 것이지만.
“깼어요?”
내 옆에는 스칼렛이 헤실헤실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다.
뭐지. 벌써 끝난 것인가?
시선 건너편에 다 쓴 주사기가 무수히 많이 널브러져 있다.
‘정신이 아직 멀쩡해..’
보통 저만한 양이라면 정신이 반쯤 녹아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확실히, 그 꿈에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살짝 상기된 기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어?”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침착하게 목을 움직여 보았다.
목은 잘 움직였다.
그렇지만, 아래쪽이 움직이질 않는다.
분명히 감각은 존재한다.
그리고 딱 그 뿐이었다.
“아, 아가씨. 몸, 몸. 몸이.. 몸..!”
인식은 당황으로 번지고.
그 당황은, 이내 공포심으로 불어난다.
마구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나를 보며, 스칼렛이 싱그럽게 웃는다.
“걱정하지 마요, 세실. 제가 말했잖아요.”
그리고선.
내 귀에 그 사랑스러운 입술을 갖다대더니.
“이제부터, 아무데도 못 간다고.”
그 어떤 때보다 달콤하게.
속삭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