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미솔로지 아카데미
* * *
"...무슨 조건인데? 소원을 걸라는 거야? 그건 좀 불공정한데? 넌 합의 없이 내 목숨을 마음대로 걸었잖아."
『뭐... 처음부터 추가적인 소원을 걸라고 하려 했지만... 그 점은 네 말이 맞지. 시작 조건이 조금 불공정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럼?"
『대신 나도 서비스를 해주마.』
"서비스?"
『그래. 한 달간 절대로 타인에게 걸리지 않을 '동선'을 제공하마.』
"!!"
『말했지? 난 인과율을 읽을 수 있다고. 동선 내로 활동하며, 네가 최소한의 선을 지킨다면 너는 절대로 타인에게 걸리지 않을 거다.』
"음..."
『대신 내게 공물로 일기장을 한 장 더 바쳐라. 그러면 난 계약의 패널티를 대신 안아줄 뿐만 아니라, 동선과 적절한 행동방침까지 제공해주지.』
달콤하기 그지없는 악마의 제안. 성일은 이것이 놈이 사전에 구상해놓은 제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씨발...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어차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소원도 남아있으니...'
너무나도 좋은 조건. 결국 성일은 한숨을 쉬며 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아... 좋아. 받아들이지."
『하하! 좋은 선택이야. 일기를 한 장 찢어주겠나?』
"..."
악마를 속으로 욕하며 성일은 이전과 같이 일기를 한 장 찢어 반으로 접는다.
『후후...!!』
그러자 두 동강이 난 일기. 반이 된 일기의 한쪽은 불에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에는 지도와 함께 시간표가 적히기 시작한다.
"...이건?"
『동선이다. 안전한 장소에 대한 내용은 물론, 시간대까지 적혀있으니, 날짜별로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 거기다 영구적 사용이 가능한 아카데미 지도는 덤이야.』
"오..."
『참고로 지도에는 누군가 이동하는 것을 감시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있으니, 지도를 가지고, 정신만 잘 차린다면, 절대로 외부인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장담하지.』
"..."
『선만 넘지 마라. 선만. 쿡쿡...』
"자꾸 그 선이란 걸 말하는데 그게 대체 뭐냐?"
『간단해. 오만해지지 말라는 거다.』
"...?"
『인간들은 보통 악마가 정해준 기준 이상으로 만용을 부리다 파멸하거든. 네 경우는 '조심성'이다. 잊지 마. 내가 준 인과율 계산은 완벽에 가깝지만, 네가 필요 이상으로 탐욕을 부리면 문제가 생긴다.』
"흠...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무슨 헛소리를... 너 역시 걸음마 단계이기는 하나, '인과율'을 가볍게나마 읽을 수 있지 않나? 네 권능을 사방에 뿌리고 있으면 위기 감지하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음..."
『감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라는 악마의 조언. 성일은 그의 말에 평소 궁금했던 점을 질문한다.
"...인과율을 읽는다고 했는데, 난 그냥 위기를 파악한다거나, 대화의 진위 정도만 파악 가능한데?"
『흐음... 신기하군. 그 재능에 그 정도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걸 못한다니.』
"..."
『그럼 이건 어떤가? 내가 인과율을 읽는 방법에 대한 수련법을 가르쳐주지. 물론 고작 1회분의 소원으로는 깊이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긴 어렵다만... 뭐, 그 정도만으로도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됐어. 일단 이번 소원이 끝나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성일은 은근히 마지막 소원을 소진하게 하라고 권유하는 악마의 말을 자르며 생각한다.
'이 개새끼 하는 꼴을 보아하니, 마지막 소원을 사용해 약점이 사라지면, 내게 어떤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는데, 내가 절대로 그 꼴은 못 보지.'
악마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고 싶기에 성일은 그의 권유를 거절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간단해. 일단 시작은 협박이었지만... 막상 '놀이'는 그녀의 취향에 맞게 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오필리아는 부정하고 있긴 하지만, 피학적이고, 지배당하는 걸 즐기는 게 그녀의 본성이지.』
"음..."
『그 점을 파고들어 조교하며, 그녀의 음울한 욕망을 충족시켜줘라. 알겠나?』
"흐음..."
『이미 봐서 알지 않나. 오필리아는 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여성이 아냐. 넌 그녀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데 전력을 다해라. 더불어 그녀로 하여금, 너와 함께 즐기는 시간은 무얼 해도 안전하다는 걸 그녀에게 끊임없이 주입해줘라.』
"음..."
『더불어 넌 그 과정에 네 욕망을 탐하면 되는 거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필리아는 너에게 기대게 될 거다 그걸 노려.』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악마의 조언. 어쨌건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라도 히로인 중 셋을 조교해야 하기에 성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악마의 조언에 동의한다.
『사각 사각』
"...?"
악마와 일기로 필담을 나누는 와중 옆에서 들리는 글씨 소리. 성일은 그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옆을 바라본다.
『답이 온 모양이군.』
"!!"
아마도 오필리아의 연락인듯한 글씨 소리. 성일은 잽싸게 내용을 확인해본다.
"...위 계약 내용을 철저하게 지켜준다면. 또, 계약 마법술식을 제가 직접 준비해간다면 계약에 동의할게요."
"오..."
의외로 선선히 계약을 동의하는 오필리아. 그런 그녀의 태도에 악마는 키득거리며 답한다.
『그거 보라고. 그녀는 거부하지 못할 거라니까. 다만, 계약서에 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그 점은 내가 감시해주지.』
"흠? 네가?"
『그럼. 내 계획인데 그 정도는 책임져주어야 하지 않겠나.』
'지랄. 지 목숨이 담보로 잡히니 도와주는 거겠지.'
은근히 자신을 돕기 위함이라고 포장하지만, 성일은 악마가 제공하는 친절의 본질은 악마 자신의 목숨을 저당잡아 시행되는 계약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법 계약은 자신 있고? 넌 이 세상의 존재도 아니잖아."
『상관없다. 우리 악마들에게 있어 마법과 계약이란 숨 쉬는 것과 같은 행위. 오필리아라는 아가씨가 갖은 수작을 부린다 치더라도, 결단코 나를 기만할 수 없지. 더불어 그녀와 나의 사이에 있는 격차라면 더더욱.』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잖아."
『없다. 그 정도 인과는 이미 계산해놨지. 더불어 그녀는 그만한 배짱이 없어.』
'뭘 믿고 이러는 건지...'
너무나도 단호한 악마의 태도에 성일은 조금 의아했지만,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인데 불구, 저토록 자신만만해하자 그는 그냥 의심을 거두기로 한다.
'여차하면 이 세상을 버릴 각오로 튄다. 최악의 경우 이너플레인도 있고, 현실로 도주할 방법도 있으니까.'
성일이 고민하는 사이, 악마는 이미 오필리아와 약속을 잡은 듯했다.
『오늘 자정. 내가 적어둔 도서관 근처로 이동해.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가면을 착용하라고.』
"그냥 거기로 가면 되는 건가?"
『그래. 그곳에 가면 그녀는 계약서를 하나 꺼내 너에게 보여줄 거다. 넌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면 되고. 다만, 그전에...』
"...그전에?"
『네 검지에 찢긴 일기를 둘러보겠어?』
"...?"
알 수 없는 행동을 권유하는 악마. 하지만, 성일은 질문 대신 순순히 그의 말대로 일기 조각을 검지에 둘러본다.
"!!"
흥미롭게도 기묘한 붉은빛을 발산하며 성일의 손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일기장. 그것은 마치 성일의 손가락인 것처럼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지장은 계약서가 감긴 검지로 찍도록 해. 그러면 계약의 패널티는 내게 전이될 거다.』
"...그나저나, 오필리아가 어떤 형식의 마법 계약서를 준비할 줄 알고 미리 대비한 거야? 그것도 인과율을 읽은 건가?"
『절반쯤은? 더불어 내 본체의 일부가 그녀의 방에 있잖나. 그걸로 그녀가 상비하고 있던 마법 계약서를 훔쳐봤지. 별것 아닌 수준의 마법이더군. 그딴 마법에 대비하는 것쯤은 쉽지.』
"흠... 그래?"
『그래. 가문의 힘을 빌릴 때 쓰는 용도 같던데... 제법 강한 술식이 걸려있긴 했지만, 악마인 내게는 별것 아니지.』
'그래서 그렇게 빨리 대비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성일은 얌전히 영혼가면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얼굴에 착용하고 이동을 준비한다.
『호... 굉장히 좋아 보이는 가면이군. 혹시 그걸 내게 팔 생각 없나? 값은 제대로 쳐주지.』
"꺼져."
고작 1만 포인트짜리 일기 주제에 10만 포인트짜리의 가면을 거래하자고 하자, 성일은 악마의 요구를 가볍게 잘라버리고, 어둠 속에서 그림자로 몸을 감싸 약속된 장소로 이동한다.
'밤이라 은신 마법을 안 써도 돼서 편하군.'
그림자 은신이 완벽하게 통용되는 늦은 밤. 심지어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인지라, 성일은 아무런 방해 없이 편하게 약속 장소로 도착한다.
'오! 진짜로 있군.'
가로등 부근에서 로브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서 있는 여인의 모습. 성일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일기에게 묻는다.
"...아까, 찢어진 일기를 통해 수작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지? 어때?"
『걱정 마라. 그녀는 혼자니까.』
성일을 안심시키는 일기의 글. 그것을 본 성일은 일기를 품에 집어넣고 은신한 채로 오필리아의 곁으로 다가선다.
"후우..."
긴장이 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숨을 내쉬는 오필리아.
"안녕."
"꺄악!!"
"쉬잇.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참인가?"
"다... 당신이...?"
"그래. 만나서 반갑군."
창백해진 얼굴로 오필리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평범한 검은 로브를 입고, 기묘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 가면은 보통 물건이 아닌지, 남자의 목소리를 기묘하게 변이시키고 있었다.
"이... 이봐요."
"...?"
"그 이상한 계약은 집어치우고! 그냥 다른 조건은 안되나요? 만약 그것들만 없애준다면 제가 다른 보상을..."
"필요 없는데?"
"..."
"금전 같은 거로 날 매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난 그딴 거엔 관심이 없으니까."
"흐... 흐윽..."
단호한 성일의 태도에 살짝 울먹이기까지 하는 오필리아. 성일은 그 모습에 살짝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미 악마가 저질러놓은 일을 되돌릴 수도 없었기에 그는 냉정히 말을 꺼낸다.
"싫으면 말라고...?"
그 말과 동시에 한걸음 뒤로 슬쩍 이동하는 성일. 그가 가로등의 불빛에서 벗어나자, 그림자가 성일을 집어삼키더니, 그는 어둠과 동화되어 순식간에 오필리아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자... 잠깐...!!"
성일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순식간에 떠나버리자 기겁하는 오필리아. 그녀는 사라진 성일을 방향으로 재빠르게 손을 뻗으며 고함친다.
스윽.
"왜. 마음이 바뀌었나?"
"!!"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귀신같이 튀어나오는 성일. 오필리아는 그런 성일의 귀신같은 움직임에 기겁하며 몸을 떨기 시작한다.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마법사인가...?'
하기야, 고위 마법사라면 금전적으로 풍요로울 게 당연할 테니, 자신의 제안이 우스워 보였을 거라 생각이 든다.
"자자...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마법 계약서를 쓸 건가? 말 건가?"
"저... 정말 한 달만 지나면..."
"하아... 목숨을 거는 맹세인데 뭘 자꾸 되묻게 하지?"
"..."
"그것도 당신이 준비해온 마법 계약서로 하겠다는데 말이지."
"...좋아요."
똑부러지는 성일의 답변이 오필리아에게도 영향을 준 것인지, 그녀는 조금 냉정해진 모습으로 품에서 계약서를 꺼낸다.
"내용은?"
"...아까 말한 대로 적어왔어요."
"살펴봐도 되나?"
"자... 잠시만요."
"...?"
"소... 손을 대지 말고 읽는 거로 해주세요."
"하..."
오필리아는 아마도 자신을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한 마법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 성일은 그 모습에 속으로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는 성일. 뿐만 아니라 그는 『감응』을 사용해 추가적인 수작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해본다.
'악마 놈의 말만 마냥 믿을 수는 없지.'
막상 일이 터지면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뿐 이기에 성일은 신중을 다해 오필리아가 준비해온 계약서를 체크해본다.
"어... 언제까지 읽으실 거죠?"
혹시라도 성일이 계약서를 읽는 척하며, 계약서에 무언가 수작을 부릴까 봐 두려워하는 오필리아. 그녀의 감정을 『감응』으로 읽은 성일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 없군. 계약을 이행하자고."
"저... 정말로 이... 이 이상한 일에 목숨을 건 계약을 하겠다고요? 이 계약서는 저희 가문의 비전 마법이 걸려있다고요! 당신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저... 정말로 약속을 어기면 목숨이..."
"내 목숨이니 내가 알아서 하지. 계약이나 이행하자고."
"..."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성일의 모습에 오필리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서 있는다.
"싫은가? 그럼 이만 가 보도록..."
"아... 아니...!! 자... 잠깐만... 여기..."
성일의 기백에 압도당한 오필리아는 그가 떠날 것처럼 보이자, 재빠르게 그를 붙잡으며 계약서를 건넨다.
"이... 이 반지를 낀 다음, 반지를 낀 손가락에 이 마법 시약을 바르고 지장을 찍으시면 되는데... 저... 정말로?"
은근슬쩍 만류하는 오필리아를 무시하고, 성일은 거침없이 반지를 끼고, 검지에 시약을 묻혀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다.
"...!!"
"당신 차례군."
"...기다려요."
손을 덜덜 떨며 검지손가락에 시약을 묻히는 오필리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하아..."
그리고 살짝 울먹이는 표정으로 지장을 찍는 그녀. 그러자 마법 계약서에서 강렬한 마력이 뿜어지더니, 두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흐음..."
정확히는 성일의 검지손가락으로 흘러가는 마력. 성일은 정말로 악마가 패널티를 가져갔음을 깨닫는다.
"이... 이제 계약됐어요."
"그래? 잘됐네. 벗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