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화 〉 저주받은 왕좌
* * *
별의 자손과 철천지원수인 타자란 종족 출신답게, 가아즈는 성일의 말에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그 증오심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감응을 통해 전달되는 그 감정에 성일은 순간 포커페이스를 깨뜨릴뻔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성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야만전사의 표정을 한 후 가아즈에게 묻는다.
"별의 교단과 관련된 정보를 달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정의의 신전에서 직접 내게 맡긴 의뢰의 정보를?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그대는. 별의 자손과 타자란 간의 피의 원한을 모르시오?"
'당연히 잘 알지.'
저주받은 왕좌 시리즈의 광적인 팬답게 관련 설정을 상세히 알고 있는 성일. 하지만, 그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뚱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아즈에게 답한다.
"모르는데? 왜 내가 그런 걸 알아야 하나?"
"물론. 모를 수도 있소. 그대는 타자란도. 별의 자손도 아니니까. 하지만, 두 종족의 원한을 안다면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오."
근엄한 표정으로 답한 가아즈는 성일에게 차분히 타자란과 별의 자손이 얼마나 험악한 사이인지에 관해 차분히 역사를 설명해준다.
성일은 당연히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짐짓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연출한다.
"....때문에 우리 종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별의 자손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소. 어떻게든 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할 뿐."
"그래 뭐.... 당신과 당신의 종족은 절대로 『별의 교단』의 하수인일 수 없다는 건 믿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게 내가 당신에게 『별의 교단』 관련 정보를 공유해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어째서 그렇소?"
"그거야.... 일단, 내가 개고생해서 얻은 정보를 타인에게 공짜로 주는 건 멍청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 정보를 듣는 대상이 내 잠재적 경쟁자일지도 모르고."
"....."
가아즈는 성일의 말에 감정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주시한다.
'어우.... 아저씨 화가 많이 나셨네.'
하지만, 감응을 통해 그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던 성일은 가아즈가 속으로 얼마나 격분한 상태인지 온몸으로 체감한다.
"....나는 그대의 경쟁자가 아니오."
하지만, 들끓는 감정과는 정반대인 가아즈의 목소리.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성일을 설득한다.
"나는 명예도. 금전적인 보상이 필요 없소. 내가 필요한 것은 오로지 별의 자손을 죽여 그들의 피를 우리 선조께 바치는 것일 뿐이오."
'저게 진심이라 더 무섭네.'
또박또박한 말소리 안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증오심.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대에게 양보할 각오가 되어있소. 필요하다면 문서 작성도 가능하오."
"....그냥 당신이 직접 조사하면 되지 않나?"
"우리 타자란이 별의 자손에게 피의 원한을 지니고 있다는 건 너무도 유명하오. 때문에 우리가 어설프게 지하수도를 직접 탐사하려 들면 놈들은 우리를 경계해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버릴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기대하는 복수의 시간은 늦춰지겠지."
"....그래서?"
가아즈는 성일의 말에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낸다.
"....?"
뜬금없는 그의 행동. 감응을 통해 가아즈에게서 어떠한 적대적인 감정도 느끼지 않았기에, 성일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스윽.
뜬금없이 자신의 손바닥에 자상을 입힌 가아즈는 입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자 시꺼멓게 변하는 그의 피.
"나 타자란의 가아즈는 내 피와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소. 별의 자손을 추적하는 와중 그대에게 손해를 끼치면,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대에게 보상하겠음을.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내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오."
'와.... 저걸 저렇게까지 행동한다고?'
사실 텍스트를 통해 역사만 읽었던 성일은 별의 자손에 관한 타자란의 증오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것과 글로 읽는 건 다가오는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 가아즈가 자신의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맹세의 주문을 읊자, 그는 그들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내 말을 믿어줄 수 있겠소?"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 아니야. 당신이 실망할 수도 있는데? 그리고 내가 말한 게 진실인지는 어떻게 알고?"
"중요하고 중요치 않고는 내가 판단하오. 그리고 내게는 타인의 거짓을 파악할 수 있는 비법이 있소. 그러니 두 개 다 내게 문제가 되지 않소."
"흠...."
겉으로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지만, 성일은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대화를 이끌었음을 직감해 속으로 기뻐한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면 당신은 내게 좋은 물건을 팔아줄 수 있나? 지금보다 더 좋은."
"약속하겠소."
'됐다!!'
게임에서 보지 않았던 새로운 고급 아이템을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성일은 속으로 환호한다.
"잠시 기다려주겠나? 1층에 있는 내 성기사 동료와 상의하고 그가 동의하면 바로 자료를 건네주지. 그에게 양해를 구하긴 해야 해서...."
"물론이오. 기다리겠소."
"기다려."
끓어오르는 환희를 숨긴 채, 성일은 짐짓 동료와 상의하러 가는 척을 하며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1층으로 가는 계단 중턱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성일은 스마트폰을 들고 오랜만에 현실 세계로 복귀를 시도한다.
"에드워드."
『예. 주인님.』
"....너 혹시 인쇄 기능도 있냐?"
『물론이죠. 종이만 주신다면야....』
에드워드에게 시답잖은 질문을 한 성일은 그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가볍게 설명해준다.
『아, 그런 거라면야 쉽습니다. 주인님께서 인쇄를 희망하시는 게임 관련 자료를 증강현실에 띄워두시면, 제가 잘 정리해서 인쇄해오겠습니다.』
"오. 그렇단 말이지."
에드워드의 말에 성일은 폰을 이용해 빠르게 관련 자료를 검색한다.
'....그런데, 이너플레인은 다른 차원 아니었나? 그런데 파인애플 하우스에서는 어떻게 인터넷이 되는 거지?'
폰으로 자료 검색을 하다 드는 의문 하나.
'뭐.... 이것도 결국 게임 마스터의 능력이겠지. 이상한 게 한두 개인가 뭐....'
스페이스 야옹이 같은 절대적 존재조차도 인정하는 게임 마스터이기에, 성일은 타차원에서 그의 폰을 들고 인터넷 검색하는 것쯤은 사실 별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료를 수집하기를 한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만족할만한 수준의 자료들을 준비하는 데 성공한다.
'너무 상세한 내용을 전달해주면 되레 이상해 보일 테니.....'
『별의 교단』 내부 시설이나 안에 상주하는 인원 따위가 상세히 적혀있다면 되레 오해받을 수 있는 관계로, 성일은 해당 내용을 누락시키고 간단하게 놈들이 숨어있는 하수도 좌표와 그 주변 지도를 가아즈에게 건네기로 마음먹는다.
"에드워드.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써줄 수 있냐?"
『물론입니다. 제게 주신 자료를 바탕으로 그곳 세상에 걸맞은 보고서를 만들어드리죠.』
"오....."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에드워드의 대답. 그가 작업을 시작한 사이 성일은 여신의 정원 풀밭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인다.
『....주인님. 작업을 끝마쳤습니다만?』
"오.... 벌써?"
눈을 감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작업을 끝냈다는 에드워드의 말에 성일은 놀랍다는 투로 그의 자료를 확인해본다.
"....그럴듯한데?"
놀랍게도 양피지로 지하수도 지도를 그려낸 에드워드. 그는 너무 기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투박한 그림체로 지도를 묘사해두는 기교까지 써 성일을 감탄하게 만든다.
『아,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완벽한데....? 좋아. 이대로 가아즈와 거래를 시도하면 되겠군."
그렇게 성일은 에드워드를 다시금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저주받은 왕좌 세계로 몸을 옮긴다.
***
"이거 받으쇼."
성일은 에드워드에게 받은 양피지 묶음을 타자란 상인 가아즈에게 건넨다.
"음...."
그가 건넨 보고서를 차분히 읽기 시작하는 가아즈. 사실, 보고서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으로 양이 적었지만, 내용은 정말 알차서 가아즈를 놀라게 만든다.
"그대는 어떻게 이곳에 별의 자손들이 숨어있다고 확신하는 거요?"
"....이중 첩자가 하나 있거든. 그가 그쪽 부근에 별의 자손이 비밀리에 숨겨놓은 통로 하나가 있다고 내게 귀띔해줬고, 난 그 정보를 바탕으로 동료와 함께 그 부근을 철저하게 탐사했지. 그리고 난 실제로 그곳에서 은밀하고 고등한 은폐 마법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성일은 게임 플레이를 통해 별의 교단으로 가는 이벤트를 떠올리며 간략하게 가아즈에게 설명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루트를 묘사하는 관계로 그의 말은 제법 생동감이 있게 들린다.
"....그럴 수는 없소."
"....?"
하지만, 그런 성일의 꼼꼼한 설명에도 가아즈는 표정을 굳히며 성일의 말을 부정한다.
"별의 자손은 하나하나가 강대한 초능력자라오. 때문에 그들은 배신을 날카롭게 파악할 수 있지. 그대의 말은 어폐가 있소."
날카롭게 성일의 논리가 지닌 허점을 지적하는 가아즈. 하지만, 성일은 게임 플레이를 통해, 속이는 게 진짜 가능함을 알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의 가설을 반박한다.
"천만에.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었나? 솔라니움. 만신전이 있는 곳이지. 신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 놈들을 기만할 수 있다. 신전이 먼 곳도 아니고 말이지. 진위가 의심되면 새벽의 신전으로 가보도록. 그들은 여명으로 초능력을 기만하는 축복을 걸어줄 수 있으니."
"으음.... 새벽이라.... 확실히.... 그곳이라면."
적당히 게임에서 얻은 지식을 내뱉어줬을 뿐인데, 흥미롭게도 가아즈는 성일의 말을 알아듣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당신네끼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들쑤실 생각은 하지 마쇼. 괜히 그랬다가 별의 교단이 지하 깊숙이 숨어버리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알겠소."
"정의, 망치와 모루 신전이 직접 내게 의뢰한 사건이요. 당신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나뿐만 아니라, 두 신전의 추궁도 걱정해야 할거요."
성일은 혹시나 가아즈가 쓸데없는 행동을 하여 퀘스트를 꼬아버릴까 걱정해, 그에게 반쯤 위협하듯 경고한다.
그러나 의외로 가아즈는 그의 까다로운 요구에도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당신은 이후에도 해당 임무를 계속할 예정이오?"
"물론. 다만, 난 지급 성물을 급히 회수하는 임무를 의뢰받은지라.... 그 건을 해결하고 놈들의 소굴을 조사할 예정이외다."
"으음.... 별의 교단이 우선 아니오? 그들은 정말로 위험한 존재요."
성물이 아무리 귀하다고는 하나, 적은 다름 아닌 『별의 교단』. 전 우주에서 난동을 피웠던 사악한 존재를 내버려 두고 다른 임무를 우선하겠다는 성일의 말에 가아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글쎄? 지금 내가 싸워야 할 놈은 레드 드래곤이거든. 그놈이라면 별의 자손보다 충분히 우선순위가 될 법하지."
"....인간인 그대가 용을?"
성일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처음으로 얼굴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가아즈.
그는 성일이 무려 필멸자 중 최강이라는 용을 사냥하겠다고 말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감응은 여기서 내게 도박수를 시행하라고 속삭이는군.'
'어차피.... 율리나 여사는 잠시 자리를 비워 이곳에는 가아즈 혼자만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어차피 자신의 능력은 야옹이 때문에 동료들에게 밝혀질 때로 밝혀졌겠다. 성일은 가아즈의 신뢰를 확실하게 얻고자 모든 능력을 그의 앞에서 개방하기로 마음먹는다.
"!!!"
눈앞의 야만전사가 뜬금없이 몸에서 기묘한 힘을 뿜어대자, 가아즈는 충격으로 큰 눈을 뜬다.
"그대는.... 대체?"
염력을 이용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오른손에는 태양처럼 밝은 빛을 뿜고, 왼손에서는 칠흑처럼 사악한 뿜는 성일의 모습.
심지어 그의 그림자에서는 강대한 정령으로 보이는 존재가 튀어나와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아직도 내가 용이랑 싸우러 가는 게 우스워 보여?"
"...."
눈앞의 전사가 초월적인 신위를 보여주자, 가아즈는 마음속에서 의심이 눈처럼 녹는 것을 느낀다.
"....그대처럼 강대한 자가 평범한 존재일 리는 없을 터. 여지껏 한 말이 거짓일 리가 없겠지."
"그래서?"
"그대에게 거래를 제안하오."
'드디어!!'
오랜 밀당 끝에 원하는 답이 나오자 속으로 크게 환호하는 성일. 하지만, 그는 기쁨을 최대한 감춘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묻는다.
"무슨 거래?"
"....그대가 별의 교단을 토벌하러 갈 때. 나와 내 동료들을 동행하게 해주시오."
"....동료가 있나?"
"물론. 내가 왜 아무 이유 없이 이곳에서 상행위를 할 것 같소?"
"....!!"
처음 듣는 이야기. 게임에서 가아즈는 그저 DLC를 깔면 나오는 상인으로만 설명됐고, 그 이외의 설명은 일언반구 없었기에 성일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와 내 동료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별의 교단을 쓸어버리고 놈들에게 가장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라오."
'그랬던 거였군.'
게임 플레이 당시 어째서 뜬금없이 DLC를 깔면 다른 차원 출신의 상인이 등장했던 것인지 의아했었던 성일.
하지만, 그는 가아즈의 등장이 그저 이전 작품 『죽음의 구도자』를 플레이한 플레이어가 예기치 못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제작진이 이스터에그를 하나 넣어준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숨겨진 진실이 한 꺼풀 벗겨져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가아즈에게 묻는다.
"당신과 당신 동료들은 강한가?"
"물론. 나와 내 동료들은 타자란의 '집행자'라오. 그들은 우리 종족에서 최강의 무위를 가진 존재들이지. 수없이 많은 별의 자손을 죽였던 자들이고."
'씨벌.... 그냥 상인이 아니라 집행자였어?!'
성일은 이미 『죽음의 구도자』에서 타자란 집행자와 전투를 해봤던 경험이 있어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집행자 새끼들은 한놈 한놈이 살인 기계들인 살벌한 놈들이잖아? 『죽음의 구도자』에서 타락 루트로 갔을 때 놈들이랑 붙었다 피봤던 경험이 있는데....'
타자란 집행자들의 강함을 잘 알았기에 성일은 이번 기회를 틈타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의외로 『별의 교단』 토벌 서브 미션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만하면 서브 퀘스트 하나를 날로 먹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성일이 즐거운 상상에 빠져있던 그때. 가아즈는 드디어 성일에게 자신의 조건을 내뱉는다.
"만약.... 그대가 나와 내 동료를 『별의 교단』 토벌에 끼워준다면 타인에게 절대로 팔지 않았던 강력한 물품을 싼값에 넘겨주겠소."
"오....? 어떤 물건인데?"
다행히 성일이 흥미로워하자, 가아즈는 품에서 성일에게 3개의 감각석을 꺼내 그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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