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11. 유성을 바라보며 (3)
* * *
"네가 이 수업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정지후가 아메르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녀도 그를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수강신청에 조금 더 신중했을 것이다.
물론 지후가 싫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메르는 그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했다. 오늘도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교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 진중한 외모에, 그렇게나 거칠게······.'
그녀의 볼이 머리카락 색과 비슷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홍조를 들키지 않기 위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 눈동자는 바깥 경치를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그런 것 따위에 신경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지후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플래시백된, 토요일의 충격적인 광경.
그것은 아메르에게 있어, 순수한 경악이었다.
ㅡ아앙, 하으앙, 서방님······.
그녀는 남자에게 달라붙어서 애절한 목소리로 사랑을 갈구하는 소니엘 언니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언니는 사교회 같은 곳도 필수적이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이성에 관심이 없는 조신한 여성이었다. 언제나 정갈하고 순결한 태도에, 제니퍼 언니도 소니엘 언니에게는 말을 아끼지 않았던가.
'그랬던 언니를··· 지후가···.'
대체 어떤 달콤한 말로 언니를 꾀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바뀔까?
언니는 자신보다 머리도 좋고,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재는 데 능숙하다. 결코 사탕발림에 넘어갈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목격해버린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소니엘 언니가 정지후에게 처녀를 바쳤다는 결과만이 남아있을 뿐.
결국 아메르는 정지후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위험하고 음흉한 남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를 향한 경계 수준이 한 단계 상승했다. 함부로 방심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지후의 아래에 깔려 그와 배꼽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메르는 순간 그와 정을 통하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정지후가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전력으로 무시했다. 그녀의 홍조가 더욱 짙어졌다.
'미쳤어, 정말!'
머릿속 망상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도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다.
멍을 때리고 있다보면, 어느새 정지후의 나신을 떠올리곤 한다.
혼자 몸을 달래는 빈도가 늘어났고, 그럴 때면 어김 없이 정지후가 자신을 범한다.
매일 밤, 야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그녀는 항상 정지후의 부인, 첩, 약혼녀, 연인, 섹스 파트너, 외도 상대, 혹은 성노예의 역할을 맡는다. 그런 꿈을 한번 잘 때마다 3개씩은 꾼다.
분명 이전에는 안 이랬는데.
아메르는 여전히 박민호를 연모한다. 성아영의 존재 때문에 그에게 함부로 접근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환한 미소와 밝은 성격,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사랑한다.
예전에 아주 가끔 자위했을 때는 민호와의 신혼 생활을 상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음은 민호를 바라지만, 몸이 지후를 원하는 듯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지후는 언니의 약혼자라구···.'
언니의 정인(?人)을 유혹한다?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다. 물론 오늘날 황가는 정치 싸움 때문에 터지기 직전이긴 하지만.
지후는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안았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앞으로 그의 주위에서는 몸매를 감추는 넉넉한 옷을 입어야겠다고, 아메르는 재차 다짐했다. 가린다고 가려지는 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의 정신이 난장판이 된 원인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것이 있다.
바로 [아름다움(美)] 속성.
그때 아메르는 잠시 속성에 잡아먹혔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응접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욕구를 참지 못하고 복도 한가운데에서 자위해버렸다.
절정한 순간 느꼈던 오르가즘은, 정말이지··· 굉장히 황홀했다.
또한, 아메르는 다급하게 숙소로 도망친 후에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녀의 속성 능력이 눈에 띄게 강해졌기 때문이다.
관음자위하는 것만으로 성장하는 속성이라니······.
'여성으로서 자괴감이 들지만··· 이게 내 운명인 걸 어떡해···.'
남들한테는 부끄러워서 절대로 말 못한다.
건국 여제이자 그녀의 선조인 카이로스 여제와 같은 속성이라서 기쁘고 자랑스러웠던 것도 옛날이다. 대체 이걸로 어떻게 대전쟁을 종결하신 걸까.
아메르는 몰랐지만, 그녀의 속성 성장은 성관계를 맺는 둘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정지후는 미래에 [하늘(?)] 속성으로 운명을 손아귀에 쥘 (예비) 신이고, 소니엘은 그를 섬기는 무녀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욕구를 무녀가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멀쩡하게 고치고, 속성을 개발할 수 있는 단서를 얻고자 '성과 섹스' 강의를 신청했다.
그 결과, 앞으로 아메르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지후와 만날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망상이 폭주를 거듭할 것이고, 그녀의 부작용이 지금보다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제 그녀는 이 수업이 기대 이상으로 유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지혜와 혜린이도 이 과목을 듣는다는 것. '성과 섹스'는 소형 강의이고 고위 귀족들한테는 인기가 별로 없어서, 수강생들 중에 아메르가 아는 사람은 소환자 셋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이 수업이 2인 1조로 진행된다는 것. 인자한 귀족 부인처럼 생긴 교수는, 곧 100% 랜덤으로 조를 정한 뒤 다음 주부터 조별 활동을 주로 진행할 것이라고 공지했다.
다행히 정지후와 내내 붙어 있지는 않을 모양이다.
'···설마 지후랑 같은 조가 되지는 않겠지?'
* * *
수요일과 목요일은 그저 그랬다.
'제국의 역사' 수업은 여전히 수면송 같은 잔잔한 목소리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초급속성학1'의 수요일 첫 진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어서 지루했고, '마나운용1'은 화요일에 면담을 봤기 때문에 이번주에는 강의가 더이상 없었다. '성과 섹스'는 조별 활동이 메인이라 그런지, 아직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아카데미 첫 주는 마치 프롤로그들만 읽은 기분이다. 본격적인 수업은 다음주부터 시작할 듯하다.
연구 조교가 되어달라는 '마나운용1' 교수의 제안은 검토중이다. 나는 소니엘에게 해당 교수와 연구소, 그의 연구 주제 등과 관련된 정보들을 모아서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역시나 지혜와 혜린이도 동일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연구에 참여할 것 같다.
방과 후에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2시간 정도 몸을 단련하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지혜랑 놀다가, 이레이나와 떡치고 잔다. 아직 배운 내용이 없으니 복습은 불가능하고 예습은 내 취향이 아니다.
황궁에서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특별하다.
두 과목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자, '동아리 홍보 기간'의 시작일이기 때문이다.
오전 강의인 '체력단련1'의 교수는 근육질의 헬스 트레이너 같이 생겼다. 사실상 다를 게 없긴 하다.
"몸으로 싸우는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시간 공부와 연구에 매진하는 마법사들에게도 체력은 굉장히 중요하지! 그렇기에 이 강의가 교양필수인 것이고, 제군들이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이다!"
2시간의 수업 중 첫 1시간은 각종 운동과 스트레칭 방법들을 배우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오래달리기 등으로 심폐 지구력을 키운다. 효율적이고 유익한 커리큘럼이다. 이 과목을 통해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운동 직후 먹은 점심은 진짜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랑 지혜는 '살인 연습' 강의를 들으러 출발했다. 어두운 과목답게 교실도 아카데미 외곽에 위치해서, 우리는 마차를 타야 했다.
그곳에서 나는 의외의 사람을 발견했다.
"민호야, 안녕."
"안뇽~"
"지후랑 지혜구나, 안녕."
얘가 이 수업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나는 카일과의 결투에서 눈 찌르기를 망설이는 나 자신을 발견한 후에, 지구의 가치관을 버릴 필요성을 느껴서 이 과목을 신청했다. 지혜의 이유는 그냥 나를 따라서 온 것이 반, 그녀의 속성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반이다.
물어보고 싶다.
민호가 '살인 연습'을 왜 신청했는지 궁금하지만, 질문하기 조금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가 내 얼굴에서 호기심을 읽은 모양이다.
"···나도 마냥 낙천적이진 않거든."
"그렇냐."
"네 결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 나도 슬슬 여기가 지구가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겠지."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교수가 올 때까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수업과 동아리 등등. 그는 동아리보다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지원이 2학년부터 가능해서 현재 고민중이라고 한다.
이 수업의 규모는 '성과 섹스'보다 크다. 또한 수강생 대부분이 고학년생인 듯하다.
이윽고 수업 시간이 되자,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4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첫 번째 사람은 양복을 입은 냉철한 인상의 사내다. 흑색 슈트로도 가려지지 않는 다부진 체격이 그가 기사임을 알렸다. 그의 검은색 장갑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는 기사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아줌마다. 통통한 몸매의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을 둘러보았다.
세 번째는 아카데미 경비원이다. 제복을 입은 그는 웬 수레를 끌고 교실로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작은 철창이 놓여 있다. 그 안에는 네 번째 사람이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으으읍!!"
흰색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입이 묶인 알몸의 젊은 청년. 학생 전원이 그의 정체는 몰랐지만, 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실의 분위기가 한층 경직되면서 가라앉았다.
"반갑다. 나는 '살인 연습' 과목의 담당 교수인 아이언 제페드라고 한다."
교수의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감 능력이 전무한 사이코패스 같다.
"본 수업은 전장에서 적을 공격하는 걸 망설이는 멍청이들을 없애기 위해, 말 그대로 살인을 연습하는 강의이다. 여러분은 엄선된 악질 흉악범들의 처형을 집행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본 수업의 성적은 점수가 아니라 '통과 혹은 불통'이며, 학기 중에 총 4명을 죽이면 통과다."
방 안에서는 아이언 교수의 말과 범죄자의 으으거리는 발악, 그리고 긴장한 학생들의 침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여러분에게 살인을 강요하지 않는다. 수업 참여는 항상 자발적일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본 수업을 그만둬도 좋으며,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면 여기 계신 상담사님께 문의하면 된다."
옆에 선 아줌마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안쓰럽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첫 수업이니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도록 하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지금 바로 나가도록."
선언과 함께 말없이 교실을 둘러보는 교수. 나와 지혜, 민호는 침착했고, 동요를 보일지언정 밖으로 나가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좋다."
"으으! 으으으으!!"
그의 눈짓에 경비원이 철창을 열고 의자를 번쩍 들어 교단의 중앙에 놓았다. 동시에 범죄자의 저항이 거세졌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경비원이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펼치고 적힌 내용을 크게 낭독했다.
"00254번 사형수, 제프먼! 이 자는 촌장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악용, 리프 마을의 15세부터 27세까지의 아녀자를 3개월에 걸쳐 강간하고! 31세의 유부녀를 간살한 그 죄질이 악독하므로! 이에 사형에 처한다! 리에라 지방 영주, 벤돌프 하이먼즈."
"고맙소."
교수가 손짓으로 상담사와 경비원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품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교실을 밝히는 빛에 반사되어 단검이 은색으로 빛났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도록 하지. 지금이라도 나갈 학생 있나?"
그는 손가락으로 단검의 날을 쓸면서 잠시 기다렸으나, 움직이는 자는 강간범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수강생들은 나쁘지 않군."
나지막한 평가와 함께, 날카로운 날붙이가 순식간에 범죄자의 왼쪽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절망스러운 비명과 함께 의자에 묵인 신체가 축 늘어졌다. 즉사였다. 구석에서 상담사가 고개를 숙이며 절레절레 저었다.
칼이 박힌 위치에서 피가 샘물마냥 샘솟았다. 나는 갑자기 지구에 있을 때 너튜브에서 지나가다가 본 초콜릿 분수가 떠올랐다.
민호가 눈을 부릅 뜨고 범죄자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분위기로 시선을 고정했다. 주변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학생들이 몇 명 보인다. 지혜는 내 팔을 꼬옥 붙잡았다. 아무래도 지구에서 자기 동급생을 죽였던 때를 떠올린 것 같다.
나는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좌석과 단상이 꽤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잔인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아직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이것이 1단계다. 전신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상태의 범죄자를 죽이기. 4단계까지 완료하면 수업 통과다."
아이언 교수가 마법으로 피 묻은 옷을 세탁하고 손수건으로 단검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의 자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노련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바라보며, 나도 교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