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33. 살인 연습 (1)
* * *
5월.
봄의 따뜻함으로 잠에서 깨어난 생명력이, 찬란한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
대한민국의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불과 이틀을 사이에 둔 채 붙어 있고, 더불어 그 다음주에는 스승의 날도 존재한다.
이맘때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은사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시간을 가진다.
5월은 좋은 추억들을 쌓을 기회가 많은 달이다.
하지만 이는 나한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은 개뿔.'
나의 부모에게 하나뿐인 아들이란, 당신의 우수한 유전자와 훌륭한 교육을 증명하는 자랑거리에 불과했다.
나는 수년간 자라면서 그들의 결혼과 출산, 양육이 쓸데없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보여야 했다.
부모는 아들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처럼 취급했고, 아들은 부모의 관심을 생존 수단으로 삼았다.
가족의 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삶에, 5월의 단란한 추억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한편, 이세계의 5월은 특별한 달이 아니다. 연초나 연말도 아니고, 역사나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기념일들도 없다.
하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5월이란 애증의 대상이다.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시기.
왜냐하면 이 달에는 '최종 평가'와 '종강'이라는 두 가지 빅 이벤트가 함께 연달아서 학생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기 때문이다.
필기와 실기와 과제가 뒤섞인 비바람이 그들을 무참히 습격한다.
그 결과에 따른 점수가 삶의 한구석에 지울 수 없는 숫자를 매긴다.
그러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잠을 줄여 가며 최선을 다한다.
머지않은 종강의 달콤한 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기 위하여.
"이레이나. 평민 출신이라면 몰라도, 어엿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성적에 목숨 걸 필요까지는 없지 않아?"
나는 다음 강의실로 향하는 마차의 안에서 창밖을 둘러보며, 전직 백작 영애였던 이레이나에게 물었다.
내 시선이 향하는 방향마다, 퀭한 눈가로 꾸벅꾸벅 졸거나 뭔가를 중얼중얼 외우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아카데미 성적은 속성 능력과 지성을 나타내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입니다. 그래서 후계자 선정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어요. 가문을 잇지 못할 경우에 먹고 살 문제도 있고요. 그리고 종종 가문의 명예나 위신과 엮이기도 해요."
과연, 계승과 명예라. 이 두 가지는 귀족들이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것들이다. 그런 이유들 때문이라면 이해가 된다.
그래서 다들 이토록 열심히 사는 거구만.
저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마치 고등학교 3학년의 자습 시간 같아서 되레 친숙하다.
고귀하다는 핏줄들도 우리랑 크게 다를 건 없네.
"···주인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때, 이레이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응? 뭐가?"
"최근 학업 외의 일로 너무 바빠 보이셔서······."
흠, 내가 요즘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긴 했다.
지혜의 임신 사실을 은폐하고 그녀를 돌볼 환경을 마련하랴,
아카데미 부지 내 나만의 단독주택 건설을 위하여 필요한 행정 절차들을 진행하고, 에스나에게서 건설 진행 상황을 보고 받으랴,
아메르를 나흘에 한 번씩 따먹고, 어째선지 최근 더 적극적으로 변한 아이리스와도 유사 성행위를 즐기랴.
······마지막은 결코 뇌가 성욕에 지배당한 게 아니다.
아메르라는 주요 인맥이랑 아이리스라는 최대 전력과의 관계 발전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거기에 스트레스도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고. 한마디로 일석이조란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흐음, 그러니까 이레이나 넌 내가 최종 평가를 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의 짓궂은 물음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제가 더 신경쓰거나 도움을 드릴 일이 있나 해서···."
이레이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발언 죄송합니다······."
하긴, 시녀도 아니고. 일개 도구에 불과한 하녀가 꺼내기에는 건방진 말이었다. 노예 따위가 주인을 걱정하다니.
물론 이는 통념상 그런 것이고, 나는 딱히 화나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이레이나는 특별하다. 내 첫 여자이자, 첫 하녀이자, 차후에 최소 하녀장을 맡을 예정인데. 나한테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지.
"꺄악!"
"마차 안인데 조심해야지?"
차가 덜컹거리면서 그녀의 몸이 흔들린 틈을 타, 그녀를 잡아당겨 내 다리 위에 앉혔다. 이레이나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
마차 안의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바깥의 마부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나는 이레이나를 품에 껴안았다. 연신 움찔거리는 그녀의 체온은 따뜻했다. 내 숨결이 부드러운 목덜미에 닿자 그녀의 볼이 머리카락처럼 붉어졌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레이나는 내 애착 인형이었다.
"이용 감사합니다!"
내 눈 앞에 우뚝 선 건물은 아카데미 외곽의 특별한 강의실.
일명, '처형장'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나는 이곳에 와서 사람을 죽인다.
'살인?人 연습' 강의였다.
이레이나는 하녀 전용 대기실에 두고, 칙칙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지하의 강당에 도착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대 위에 구속된 10명 가량의 범죄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들은 전원 제국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된 자들로, 학생들에게 살인을 경험시킴으로써 전장에서의 망설임과 실수를 예방하기 위한 교보재다.
한 명 한 명이 극악무도한 사형수들이기에, 억울함이나 동정의 여지는 없다.
나는 이 과목을 통해 티끌만한 지구의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고자 했다. 수강신청을 할 당시에는 사람을 죽이는 감각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후에 실제로 복수를 위해 사적으로 사람을 죽여봤는데,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어서 아쉬웠다.
"민호야, 왔구나."
"······지후야."
민호는 병원에서 무사히 퇴원했는지 사지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얘를 이 과목의 첫 수업에서 만났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온갖 신념들로 똘똘 뭉친 놈이 사람 죽이는 강의에 참석할 줄이야. 설마 수업의 진행을 훼방하려고 등장한 건가!
민호가 손을 벌벌 떨면서도 첫 처형을 집행하자 나는 비로소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는 않지만, 이것도 얘 나름대로 이세계에 적응하는 방법일 터.
생각해보면, 사형은 지구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는 형벌이다. 게다가 저 범죄자들은 철저한 수사와 엄정한 법에 따른 재판을 거쳐서, 죄의 악랄함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은 쓰레기들이다.
저들을 죽이는 건 민호의 입장에서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라는 느낌일까.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피곤한 녀석이다.
"지혜는 같이 안 왔어?"
민호가 내게 물었다.
지혜는 나를 따라서 이 수업을 신청했고,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강의와 그녀의 [죽음(死)] 속성의 궁합은 발군이어서, 덕분에 지혜는 힘을 대폭 키울 수 있었다.
그녀가 죽인 시체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바람에, 한때 아카데미에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걔는 기숙사에서 쉬는 중. 이미 다 통과했으니까 안 와도 되지."
나는 그에게 진실대로 답하지 않았다.
사실 지혜가 임신했다고. 그래서 행여나 [죽음(死)] 속성이 자극 받을까봐 일부러 오지 않았다고. 태아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리도 없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색한 침묵이 우리 둘을 휘감았다. 민호의 만류에도 내가 이유진을 죽인 것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나는 원래 얘가 이런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며칠 전의 질타에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어서 별 생각이 없었다. 반면, 민호는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면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나와 화해하고 원래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지후 학생."
그때, 교수가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지후 학생. 그리고 민호 학생. 혹시 지혜 학생은 아직 안 왔습니까?"
"지혜는 오늘부터 안 올 것 같아요."
나의 대답에 교수가 눈에 띄게 낙담했다. 그의 군인다운 무표정이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런, 그렇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사실 오늘은 아직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의 최종 평가 겸, '공개 수업'입니다. 그래서 지혜 학생만 괜찮다면 관객들에게 그녀의 언데드를 보여줄까 했는데, 안 오면 어쩔 수 없군요."
서사급 [죽음(死)] 속성과 언데드 창조는 분명 훌륭한 구경거리가 됐을 텐데. 나는 교수의 아쉬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는 금방 무표정을 회복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혹시 지후 학생이 대신해서 모범적인 처형을 선보여줄 수 있습니까?"
"제가 말씀입니까?"
"자네가 이번 수강생들 중 가장 빨리 4단계까지 통과해서 하는 요청입니다. 끝까지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만약 이 과목이 점수를 매겼다면, 지후 학생은 만점입니다."
이세계에서는 사람을 잘 죽이면 칭찬받는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수업에서 가산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거리낌없이 말해줘요. 추천서도 필요하다면 써주겠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망설이지 않는다."
"좋습니다. 민호 학생은 오늘 최종 평가를 위해 정신 무장을 철저히 하기를 바랍니다."
"···네 교수님."
다시 어딘가로 성큼성큼 떠나는 교수의 등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민호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남자 새끼가 기분 나쁘게 왜 이래.
"역시 지후 너는 대단하네."
"갑자기?"
"'망설이지 않는다'라···. 우린 똑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어째서 실전에서는 달랐을까."
이유진의 껍데기 괴물을 상대했을 때의 얘기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 나는 두려웠어. 친구를 내 손으로 해한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자꾸 망설였지. 기회는 여러 번 있었는데. 수많은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됐는데. 그날 네가 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억울한 죽음이 생겼을 거야. 그리고 나는 우유부단했던 나를 용서하지 못했겠지."
그러더니 민호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후야 미안해. 아무것도 못한 주제에,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너의 결단을 왈가왈부해서. 너 덕분에 이번에 유진이 말고는 아무도 안 죽었다고 들었어.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민호는 스스로의 생각을 고쳐먹은 게 아니었다. 얘는 여전히 이유진을 구출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녀를 다시 우리 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치관이 다른 이에게도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나에게 건넨 사과는 그 자체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역시, 옳다고 여기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민호답다.
"됐어 인마. 그게 왜 다 내 덕이냐. 유진이가 실수하지 못하게 붙들고 있던 네 활약이 컸지."
나는 질색 어린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얼른 가서 평가를 통과할 준비나 해."
"응. 알았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단을 향하는 민호의 등을,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 * *
'살인 연습' 강의의 평가는 총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범죄자를 처형한다는 행위의 의미는 동일했으나, 그 과정이 단계별로 달랐다.
1단계의 사형수는 눈이 가려지고, 입이 막히며, 사지가 구속된 상태다. 그냥 가까이 다가가서 몸부림치는 심장에 날붙이를 꽂아 넣으면 된다.
2단계의 사형수는 눈동자를 굴릴 수만 있다. 학생들은 죽음이 임박한 자들의 죽어 가는 눈동자를 근거리에서 쳐다보아야 한다.
3단계의 사형수는 추가적으로 입이 자유롭다.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자비를 구하는 목소리의 절박함 앞에서 학생들은 망설이지 말고 생명을 거두어야 한다.
마지막 4단계의 사형수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이들을 직접 쫓아서 사냥해야 한다.
각 단계별로 한 명씩, 총 네 명을 처형하면 이 과목을 무사히 수료한 셈이다.
나랑 지혜는 이미 모든 과정을 클리어했고, 민호는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사형수 케이나! 죄명은 내란??!"
나는 무대 위의 민호와 그 앞의 여성 범죄자를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했다.
"그녀는 반역 결사 '파랑새'에 가담! 국가 전복 및 반란을 모의했으며! 황도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다수의 빈민 및 경비들을 납치하여! 이에 사형에 처한다!"
파랑새는 현 제국의 신분제와 속성주의를 거부하고, 인간 평등을 주창하며 만인이 대등한 국가를 꿈꾸는 테러 단체다.
민호가 너무 좋아할 것 같은 이상을 따르는 자들.
"박민호 학생은 제국보안법원의 처형 명령을 신속하게 집행하도록."
여태 그가 죽인 범죄자들은 죄다 연쇄살인마 혹은 강간범 따위의 중죄를 저질렀다.
과연 민호는 지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상범한테도 제국법이라는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까?
나는 마치 잘 짜여진 각본 같은 운명의 매치를 앞두고 주머니를 뒤졌다.
아, 팝콘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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